혼자 있으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려놓게 된다. 어빙 고프먼의 말처럼 ‘무대 밖으로’ 나오면 대중 앞에서 썼던 가면을 벗고 진정한 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사색에 잠길 수 있다. 스스로 행동을 돌아봄으로써 내면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즉 웨스틴이 말하는 ‘도덕적 성찰’의 기회를 얻는 것이다.
--- p.18
“대체 언제 한숨을 돌리지?” 1950년대 차일드 부부가 파리에 살 때 요리 연구가 줄리아 차일드의 남편 폴이 편지에 썼던 질문이다. “그림은 언제 그리고 사색은 또 언제 할까? 언제 가족에게 편지를 쓰고, 언제 이끼 위에 앉아 쉬고,언제 모차르트를 감상하고, 언제 반짝이는 바다를 볼까?” 답은 바로 혼자 있을 때다.
--- p.30~31
분명 음식을 함께 먹는 행위는 인생의 크나큰 즐거움 중 하나다. 하지만 식사를 혼자 한다고 해서 이것이 사교의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 자신이나 주변 혹은 더 큰 힘과 연결될 수도 있다. 유네스코는 프랑스의 미식 문화가 ‘미각의 즐거움’을 강조한다고 말한다. 특히 현지 식자재를 활용하고, 음식과 어울리는 와인을 구비하고, 식탁에서 충분히 음식 냄새를 맡고 맛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 이들의 미식 문화에서 필수적이고도 중요한 요소라고 짚어냈다. 시장을 가더라도 혼자 있을 때 좀 더 구석구석을 누비며 물건들을 꼼꼼히 살펴볼 수가 있다. 누가 옆에 있으면잡담을 나누느라 소스 향을 맡아보고 시식하고 크림의 신선도를 확인할 여유가 없다. 혼자 하는 식사는 음식을 음미하며 천천히 즐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
--- p.43~44
어떻게 보면 파리의 모든 것이 낭만적 인생을 담은 박물관 같다. 수 세기 동안 파리의 방, 교회, 바, 레스토랑은 혼자만의 시간을 찬미한 이들에게 잠시 공간을 내어주는 쉼터 역할을 해왔다. 그런 이유에서 수많은 예술가의 집이 대중에게 공개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주 광장에 위치한 빅토르 위고의 집과 파리 16구에 있는 발자크의 집처럼 작가는 공개할 공간이 많지 않다. 작가의 유품은 대개 마르셀 푸르스트의 경우처럼 작업실을 재현한 후 개인이 사용했던 물품을 부활시켜 전시한다.
--- p.120
흐메트 공원은 천천히 거닐고 있으면 움베르토 에코가 말하는 궁극의 초현실적 느낌이 드는 곳이다. 관광객들의 긴 행렬, 졸졸거리는 연못 소리, 황금 테두리로 장식되어 깔끔하게 손질된 잔디밭, 술탄처럼 의상을 입고 잡담을 나누는 아이들, 행인을 붙잡고 카펫을 팔고 있는 젊은 남자들, 카메라 화면을 상하로 움직이며 사진을 보는 여자들, 블루 모스크에 입장하기 전에 헐벗은 어깨와 다리를 가릴 수 있는 머리스카프와 의상을 무료로 대여해주는 부스. 이 모든 정경 위로 갑자기 무에진의 울부짖는 소리가 아지랑이처럼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무에진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그 전의 무에진이 그러했고 또 그 전의 무에진이 그러했듯이, 여름날 오후 신앙인들에게 기도를 올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 p.185~186
파묵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어두운 공간을 헤매다 보면 절로 향수에 젖어 들게 된다. 어쩌면 조금 슬픈 감정 같기도 하다. 모든 유물과 오브제는 사상가 롤랑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에서 했던 말을 떠오르게 한다. 사진에 찍힌 것을 보고 그는 “그것은 죽은 것이고, 죽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낭만주의 박물관에 있는 쇼팽의 손을 본뜬 주물처럼 정작 그 사람이 없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박물관의 오브제들은 행복한 순간을 추억하기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닫힌 창문 뒤에 남겨진 인생의 잔해를 떠올리며 울적한 기분에 휩싸였다. 퓌순과 케말이 실제 인물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었다. 케말은 우리가 지키고 싶어하는 것과 결국 잃게 되는 것에 관한 생각의 대리인인 셈이다. 순수 박물관에 있으면 나이가 들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고독에 의해 버려지는 느낌이 너무나 쉽게 상상된다.
--- p.196~197
산타 크로체 성당에는 미켈란젤로가 묻혀 있다. 그는 인생에서 많은 시간을 홀로 보냈다. 툭하면 혼자 있는 탓에 누군가는 그를 오만하다고 비난하고, 누군가는 특이하다고 수군거렸다고 같은 피렌체 출신의 화가이자 저술가 아스카니오 콘디비는 말했다. 하지만 콘디비는 그렇지 않다고 믿었다. 작품 활동이 미켈란젤로를 고독으로 이끌었을 뿐이다. “작품은 그에게 기쁨과 충만함을 준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그를 만족시켜 줄 수 없을뿐더러 명상을 방해해서 그를 지치게 할 뿐이었다”고 콘비디는 말한다. 미켈란젤로는 밤늦게까지 작업하는 일이 빈번했는데 가끔은 모자 위에 초를 부착해서 실내를 밝히곤 했다. 또한 다비드상을 조각할 때는 작업 과정을 남이 보지 못하도록 대리석 주변에 목조 틀을 세우기도 했다. “미켈란젤로가 고독을 좋아한다고 이상하게 생각해선 안 된다. 그는 예술에 푹 빠져 있을 뿐이다.” 조르조 바사리는 브루넬레스키, 다빈치, 도나텔로와 같은 당대의 위대한 예술가 동료와 그들의 광범위한 작품에 관해 기록했던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에서 이렇게 밝혔다.
--- p.215~216
나는 오랫동안 나의 도시에 무신경했고, 어느 순간에는 관심의 스위치를 완전히 꺼버렸다. 거리를 다닐 때도 선글라스와 이어폰을 끼고, 재즈 보컬의 대명사 빌리 홀리데이와 팝아트의 거장 로이 리히텐슈타인이 걸었다는 길도 무덤덤하게 지나다녔다. 퍼레이드 행사라도 하면 이방인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너무 천천히 걷는다는 생각에 귀찮기만 했다. 나는 미국에서도 방문객이 가장 많은 도시1에 살고 세계 각지의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일부러 걸음을 멈추는 고층 건물에서 일하는 데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곳을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파리에서 돌아오고 나니 한 가지가 분명해졌다. 가수 라이자 미넬리가 1986년에 자이언츠스타디움에서 노래했던 것처럼 맨해튼을 다시 좋아하기 위해서는 이 도시를 외국의 도시인 양 대해야겠다는 깨달음이었다. 내게는 리포터의 눈과 습관으로 일상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자세가 필요했다.
--- p.269~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