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의 진실이 가능한지 아닌지, 또는 그것이 처음부터 배척되어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지속적인 불확실성,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실재와 일치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지속적인 회의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인정해서는 안 될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결정적 특성이다. 다큐멘터리 형식들의 특징은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흔히 잠재적이면서도 신경을 갉아먹는 불확실성, 그리고 아울러 이런 질문이다: 이것은 정말 진실인가?
증언에 대한 구조적인 의심은 우리까지도 자폐자로 만든다. 특정한 경우에 증언이 쓸데없다면, 이것은 특정한 사건을 가능한 한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증언에 의존하는 다큐멘터리 형식들만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훨씬 더 깊이 있다. 왜냐하면 증언들은 세계에 대해서 단순히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에서 비로소 복구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개별적인 경험의 유아론을 넘어서고자 한다면, 우리는 증언을 포기할 수 없다.
브레히트의 여파로 다큐멘터리 영화 이론에서는 수십 년 동안, 직접적인 것보다는 반영의 거리가, 증거-효과(Evidenz-effekt)보다는 소외 효과가, 동일함보다는 차이와 지연이 선호되었다. 그것들이 의식의 형성을 촉진시킨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이 규범적인 호소는 그 자체가 또다시 독단적인 도식이 되었다. 근대적 아방가르드의 시대에 자신의 구성 방식과 생산 방식을 성찰적으로 공개함으로써, 스스로 만들었던 ‘기만의 맥락’에서 벗어나는 것이 비판적인 입장 표명으로 여겨졌다면. 이런 수단들 대부분은 변화된 정치 사회적 환경 속에서 효력을 잃었다.
아마도, 온갖 음울한 예언들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경험은 그럼에도 가능할 것이지만, 그러나 의도하지 않은 채로 가능할 것이다. 정치적 경험의 가능성은, 미학-윤리학 논문들이나 예상 가능한 폭력의 의례들 속에서가 아니라, 수단과 목적의 악순환으로부터 해방될 때에만 빛을 발한다. 그것은 아마 거의 모든 행동에 내재하는 예측 불가능함 속에 잠복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실재와 가상 사이에 있는 그림자 왕국의 영역에서 결정화되고, 역사적 순간들의 긴장을 갑자기 정지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 우리가 그것을 가장 덜 기대할 때, 우연이나 실수에 의해서 의도치 않게 일어날 것이다. 우리가 신문을 읽거나 교통 체증 속에 갇혀 있는 동안에. 그리고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최루 가스 연막이 지평선에 서서히 스며들 때일지.
의식하지 못한 채로 우리는 픽션의 문제 주위를 맴돌았고, 이 문제에 다른 측면에서 접근했다. 변함없는 질문은 이것이다: 픽션은 현실을 창조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또한 그것은 이런 것으로서의 다큐멘터리 형식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질문은 현실이 적합하게, 객관적으로, 진실 되게, 또는 사실적으로 그려지는지 아닌지를 묻는 고전적 다큐멘터리의 문제 제기를 훨씬 넘어서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이러한 재현의 출발점을 문제로 삼는다.
“삶이여, 있는 그대로 영원하라!” 1920년대에 나온 지가 베르토프의 의기양양한 외침은 다큐멘터리 영화의 가장 유명한 구호들 중 하나다. 삶을 있는 그대로, 덧붙이거나 변조하지 않고 이렇게 그리는 것은 많은 다큐멘터리 작가들의 오랜 꿈이다. (...) 베르토프의 환호성 속의 ‘있는 그대로’라는 짧은, 무해한 듯한 이 추가 문구는, 이 문장의 핵심 진술을 뒤흔들고, 다시 들여다보면, 그 진술을 정반대로 뒤집어놓는 극히 역동적인 첨언임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더 엄밀히 생각할 때, 삶을 있는 그대로 다큐멘터리로 포착한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삶은 그렇게 ‘있는 그대로’ 그림 속에 들어갈 수 없다. 삶이 이미지가 되는 순간, 그것은 삶 자체이기를 포기하고 스스로의 타자가 된다. 그것은 진짜이면서도 섬뜩하고, 원본이면서도 복제이고, 현실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스스로의 도펠갱어이다. 있는 그대로의 다큐멘터리의 삶은 다른 모든 것이 될 수는 있어도 삶 자체만은 될 수 없다.
세계화의 조건 아래서 다큐멘터리 형식들의 전반적인 변화의 공식은 사유화의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 형식은 경제적 측면에서 국가 공론장들을 민영화하라는 압력을 받고, 내용적 측면에서 사적이고, 내밀하고, 공적이지 않고, 관음적인 구경거리를 요구하는 수요의 압력을 받는다. 이 이중의 사유화의 결과는 이른바 사적 공론장-민영 방송이 방영하는 관음적인 다큐·멜로드라마들에서 명료하게 응축되는-의 발생이다. 사적 공론장이란-적어도 고전적인 공론장 개념에 의하면-본래 용어상 모순이다. 그러나 공론장의 새로운 형태들은 바로 이 모순을 특징으로 한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 더 이상 서로를 배제하는 양극을 이루지 않고 함께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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