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9년 08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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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48쪽 | 602g | 152*224*22mm |
ISBN13 | 9788952738967 |
ISBN10 | 8952738969 |
발행일 | 2019년 08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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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48쪽 | 602g | 152*224*22mm |
ISBN13 | 9788952738967 |
ISBN10 | 8952738969 |
프롤로그 CHAPTER 1 타인의 입장에 서기 CHAPTER 2 공감 해부학 CHAPTER 3 선을 행한다는 것 〈INTERLUDE〉 공감의 정치학 CHAPTER 4 친밀한 관계에서의 공감 〈INTERLUDE〉 공감은 도덕의 근간인가 CHAPTER 5 폭력과 잔인함 CHAPTER 6 이성의 시대 감사의 말 주 찾아보기 |
최근 유튜브를 통해 책을 접하는 경우가 늘었지만, 이 책은 특이하게도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신문의 신간 서적 소개란에 나오는 숱한 책들 가운데 이 책이 눈길을 끌었던 것은 아마 제목이 워낙 도발적이어서 그랬던 것 같네요. ‘공감’이라고 하는 선한 이미지의 단어에 따라붙은 ‘배신’이라니... 그렇게 책 소개를 읽기 시작한 저는, 그 소개 내용만으로도 상당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제껏 ‘공감’이란 것에 대해 우호적이었고 당연히 선(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공감’이 오히려 어리석음과 불공정과 폭력을 부추길 수도 있다니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저는 ‘공감’이 ‘도덕, 친절, 연민의 동의어’이자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행위’라고 여기고 있었으니까요.
책에서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감동적’이라고만 생각했던 일이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특정인 - 우리가 공감하는 그 누군가에 대한 특혜일 수도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공감’이 정치에 이용될 경우 어떤 끔찍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는지 설명하구요.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특히 우리나라의 최근 정치상황 때문이기도 합니다. 똑같은 부정행위를 저지르고 성범죄를 일으키더라도, 우리편이면 ‘사법적 판단이 나올 때까지 보류’, ‘피해호소인’ 같은 어이없는 주장을 내세우고, 공감이 가지 않는 상대편이면 가혹하게 몰아붙이는 작금의 사태를 보며 이젠 ‘공감’이 무조건적 선(善)이 아님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법을 바꾸고 근거를 왜곡해서라도 우리편을 비호하는 모습을 보며, 이제는 공감보다는 이성과 계약을 더 존중하도록 정신차려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네요. 여전히 대한민국 정치상황을 보면 암담하지만, 그래도 세상에는 ‘공감’을 의심하지 않았던 저같은 사람보다 훨씬 더 깨어있는 이들이 많으니 변화는 이루어질 거라고 믿어 보렵니다.
발달한 이성으로 도덕 판단의 기준이 확고해지고 야만은 사라졌다고 자부했던 사람들은 세계대전과 학살이 벌어지면서 절망했다. 이성으로 구축한 도덕은 야만적 행위를 막기는커녕 효율적인 야만인이 되도록 도왔다. 사람들은 공감 능력 부족을 야만의 원인으로 여겨왔다. 그런데 심리학자 폴 블룸은 공감이야말로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며 버려진 이성을 해결책으로 내세웠다. 공감은 선을 행하는데 동기를 부여하지만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사람은 종교나 철학적 세계관, 연민 등의 도덕 지침을 바탕으로도 행동한다고 한다.
공감은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곳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로 비유되지만 밝히는 범위가 너무 좁다. 우리와 가깝고, 비슷하고, 매력 있거나 취약해 보이거나 덜 무서워 보이는 사람에게 공감하기 쉽고 이는 편견과 다를 바 없다. 먼 곳에서 일어나는 재난보다 가까운 곳의 사건의 피해자에게 공감하기 쉽다. 사람은 특정 개개인에게 쉽게 공감하지만 통계 결과에는 공감하기 어렵다. 우리가 기후 변화에 무관심한 이유는 공감 때문이다. 잔혹한 법을 만들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공감 때문이다. 소수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정이 다수에게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성만이 숫자의 중요성을 알려준다.
깊은 공감은 사람을 무력하게 하고, 편향된 결과를 이끌고, 비이성적 잔인함을 유발한다. 공감은 인간을 행동하게 하지만 이성에 의지할 때만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과 판단을 할 수 있다. 공감보다는 자제력과 사고력을 발휘해 보편적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갖는 것이 낫다. 공감은 곧바로 도덕관념과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연민과 염려는 더 보편적이다. 우리는 상대의 고통을 공유하지 않고도 상대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 공감이 간접적 고통일 뿐이라면 우리는 쉽게 외면할 수 있다. 공감은 우리를 지나치게 관대한 부모로, 지나치게 집착하는 친구로 만들기 쉽다. 우리는 공감이 없을 때 더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사람은 타인의 행동은 심각하게, 자신의 행동은 가볍게 생각하는 성향이 있다. 가해자는 그들이 선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잔인한 행동을 저지른다. 자신이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악이 저질러진다. 내 도덕 잣대는 폭력이 옳은 일이라고 말한다. 한 사람에 대한 공감은 그 사람을 잔인하게 대한 사람들에게 분노하도록 자극한다. 화난 사람은 잘못을 저지를 상대가 고통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불의에는 분노하기 어렵다. 우리는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공정한 분석을 바탕으로 적절한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는 인류 전체를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지만 타인의 삶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이해하기에 도덕적인 진보를 보여줄 수 있다.
폴 블룸은 공감에 중독된 사람들의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는 비판을 하나하나 인용하며 공감은 인간을 야만에서 구해낼 도덕규범을 만들 수 없다며 반론을 펼친다. 예전에 공감 능력이 뛰어난 배우가 아프리카를 한 번 방문해 굶주리는 어린이들을 안고 통곡하는 장면이 텔레비전에 비쳤다. 바로 옆에는 상주하며 봉사하던 의사가 그 어린이들과 웃으며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울며 공감하는 사람과 웃으며 연민하는 사람, 어느 쪽이 더 도움이 될지 생각해 볼 일이다.
'공감의 배신', 우선 책 제목이 낯설다. 공감이 배신한다는 말인가, 공감이 무엇을, 누구를 배신한다 혹은 배신했다는 소리인가, 싶었는데, 저자는 책에서 '나는 공감에 반대한다.'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일단 그렇군, 저자는 공감을 싫어하고 공감하는 것을 거부하는군, 정도로 책을 시작했다.
사실 우리는 주변에서 공감이란 말을 흔히, 자주, 많이 듣는다. 이제는 언제부터인가 낯설지 않게 된 사이코패스란 단어끝에는 항상 공감능력부족이란 말이 따른다. 어쩌면 공감능력부족=사이코패스라는 등식으로 우리는 더욱 공감이란 말에 친숙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공감은 항상 부족해서 문제이지, 넘쳐서 문제인 적은 없는듯하다.
최근에 나는 계모에 의해 여행가방에 들어갔다 죽음에 이른 만9살짜리 소년의 이야기에 크게 공감했다. 그 소년의 신체적 고통, 정신적 절망감, 죽음 직전의 절대적 고독을 생각하며 공감하며, 동시에 계모에게 친부에게 분노했고, 계모가 눈 앞에 있다면 너도 여행가방에 들어가라, 여행가방에 쪼그리고 앉아 똥오줌을 싸고, 숨막히는 고통을 겪어라며 욕을 해댔을 것 같다. 아마도 내가 청소년 자녀 셋을 둔 애 엄마라서 더욱 그러한 것으로 생각된다.
문득 아니 소년의 아동학대 피해, 폭행 피해에 공감하면서, 나 또한 누군가를 폭행하고 학대하려는 욕망으로 들끓고 있지 아니한가. 공감이 폭력을 부르는 장면이었다. 아마도 그 계모는 계모대로 순탄치못한 성장과정에 그 죽은 아이의 동생들, 즉 친자식을 돌보는 데에 지쳤을 터이고, 그 아이만 아니라면 행복할텐데 라면서 나름의 이유를 댈 지도 모르겠다, 아차. 계모한테, 내가 아동학대 가해자인 계모한테 또 공감하려고 하지 않나. 저자가 공감에 반대한다는 게 이런 것이었구나...
공감의 배신이다. 이쪽으로 공감하려고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순간 저쪽이 소외된다. 저쪽도 공감해보려고 스포트라이트를 옮기는 순간 이쪽이 배제된다. 공감의 배신을 쪽- 보고나니, 나의 공감 또한 얼마나 내 맘대로였고, 일관되지 못하여 변덕이 죽 끓듯했는지 자각된다. 저자는 공감으로 인한 편협함과 공감이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반대편의 배제와 폭력에 대해 아주 쉽게 풀어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공감에 반대한다기보다는,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편이다. 내가 느끼는 대로 남이 느낄 수 있다니, 남이 느끼는 대로 내가 느낄 수 있다니, 그건 내가 그사람이 아니고, 그사람이 내가 아닌 이상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소위 '빙의'되지 않는 한 완전한 공감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공감은 어쩌면, 내가 공감하고 있다고, 그럼으로써 선을 베풀고 있다는 그 사람의 생각과 해석이 아닐까, 싶다. 공감함으로써 진정 남을 돕기보다, 공감함으로써 스스로의 품격을 높이는 장치는 아니었을까. 나와 상대편의 행동, 감정을 어떻게든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데 공감이 오용되는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상황에서 인간의 개별성을 이끌어 낸다면 공감은 수천가지로 뻗어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공감한다는 인간들끼리, 공감을 함으로써, 공감때문에-각자의 삶의 진득하고 거부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평소에도 감정이 동반된 공감을 믿지 않았던 나로서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단숨이 돌파했다.
하지만, '정확한 공감적 이해'를 직업의 천명으로 삼고 있는 상담가들이 이 책을 접한다면, 다른 말을 하지 않을까.
내가 생각해오던 공감과 저자의 공감, 상담가들의 공감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각기 다른 언어들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대구 말로 하자면, 가가 가가 아니야...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