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주로 다룬 주제는 기독교 믿음(belief)이 합리적인가(rationality), 혹은 이치에 맞는가(sensibleness), 혹은 정당화되는가(justification)에 대한 물음이다. 물론 이 문제는 기독교가 시작되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아주 오랜 세월 중요한 물음이었으며, 18세기 계몽주의 이후에는 훨씬 더 뜨거운 문제가 되었다. 이 물음은 소위 새로운 무신론자들이 등장하면서 훨씬 더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이들이 던진 질문 가운데는 대답이 필요한 것이 일부 있다. 이들의 주장 가운데는 널리 종교적인 믿음, 그중에서도 특히 기독교 믿음이 비합리적이고, 사리에 맞게 주장하기가 불가능하며, 교육을 제대로 받고 생각이 바른 사람이라면 당연히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기독교 믿음이 비합리적이라는 이 주장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간파하기가 쉽지 않으며, 따라서 나는 이 주장이 말하려는 의미를 더 정확히 파악하는 것도 목표의 일부로 삼았다. 이 주장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파악하고 나면, (1) 종교적 믿음이 비합리적이라는 이런 비판 혹은 주장이 전혀 설득력이 없다는 것, (2) 하나님을 믿는 믿음, 그리고 정녕 기독교 신앙의 총체를 믿는 믿음 전체가 철저히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으며 정당화될 뿐 아니라, 사실은 지식이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라는 것, (3) 기독교 믿음이 합리적이지 않고 이치에 맞지 않다는 이런 반론이 어떤 설득력을 가지려면 기독교 믿음이 거짓이라는 가설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을 논증해 보겠다.
---「서문」중에서
희한하게도 상당히 많은 신학자가 칸트에 푹 빠져 칸트가 대체로 옳다고 생각한다. 칸트가 제시한 가르침의 주요 내용을 신학이 받아들여야 하며, 칸트가 본질상 옳다고 가정하며 신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말했듯이, 보통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칸트 추종자다. 그렇다면, 왜 칸트는 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거나 생각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을까? 하나님은 “사물 자체”에 속하시는데, 우리는 현상계에 관하여 생각할 수는 있어도 사물 자체의 세계에 관하여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그렇다면 칸트가 옳은가? 왜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관한
선험적 지식을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은 그런 지식을 가질 수 있는 인간을 창조하실 수 없었는가? 하나님이 그런 인간을 창조하시지 못할 이유를 딱히 알기 어렵다. 우리가 그런 종류의 피조물이지 않을까?
---「1장 “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고 생각할 수 있을까?”」중에서
아퀴나스/칼뱅 모델에 따르면, 이렇게 자연적인 하나님 지식에는 추론이나 논증(예를 들어, 유명한 자연 신학의 유신론 증명)이 아닌 훨씬 더 직접적인 방법으로 도달한다. 신의식을 표명하는 진술은 그 의식이 작동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즉각 추론하여 나오는 진술이 아니다. 밤하늘을 보다가 그 장엄함에 주목하고 하나님이라는 어떤 인격체가 틀림없이 존재한다고 결론짓는 게 아니다. 이런 식으로 논증한다면 아주 빈약한 논증이 될 것이다.…그런 믿음들은 이런 상황에서 생긴다. 상황으로부터 내리는 결론이 아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은 그가 손으로 지으신 것들을 선언한다(시 19편). 그러나 이런 것들이 어떤 논증의 전제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3장 “하나님에 관한 보증된 믿음”」중에서
중요한 것은, 반(反)신학적인(atheological) 반론(즉 유신론 믿음에 대한 반론)이 성공을 거두려면 유신론이 진리가 아님을 밝혀야지, 단순히 유신론의 합리성이나, 정당화나, 지적인 탁월함이나 합리적인 정당화 등에 반대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반신학자(atheologian)가 유신론 믿음을 공격하고 싶다면 반론을 악에 근거한 논증(argument from evil)이나, 유신론이 비일관적이라는 주장이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유신론 믿음이 허구라는 것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는 생각으로 제한해야 할 것이다.
---「3장 “하나님에 관한 보증된 믿음”」중에서
내 목표는 아퀴나스/칼뱅 모델을 확장하여 죄, 속죄, 구원을 믿는 완전한 기독교 믿음에 적용하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완전한 기독교 믿음을 견지하는 것이 어떻게 정당화되고, 합리적이며, 보증될 수 있는지 보여 주고 싶다. 그것도 “무지한 근본주의자”(ignorant fundamentalists)뿐 아니라, 나름대로 프로이트와 니체를 읽었으며 나름대로 흄과 맥키(나름대로 데닛과 도킨스)를 읽은, 교양 있고 의식 있으며 교육받은 21세기 사람들에게 말이다.…
---「4장 “확장된 아퀴나스/칼뱅 모델”」중에서
넓은 의미의 하나님 형상에 신의식이 들어 있었다. 확장된 아퀴나스/칼뱅 모델은 이런 특징을 유지하면서 더 많은 것을 덧붙인다. 첫째, 이 모델은 우리 인간이 타락하여 죄에 빠졌음을 덧붙이는데, 재앙이라 할 이 상태에서 우리는 구원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 구원은 우리가 자신의 노력으로 이룰 수 없다. 이 죄는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소외시키고, 하나님과의 사귐에 부적합한 존재로 만든다. 우리가 타락하여 죄에 빠지면서 우리는 감정과 인지 양면에서 어마어마한 결과에 봉착했다. 감정적인 결과를 보면, 우리의 감정?우리의 사랑과 증오?이 왜곡되고, 우리의 마음은 깊고 뿌리 깊은 악에 닻을 내리고 말았다. 우리는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대신에 모든 것보다 우리 자신을 사랑한다. 이런 식으로 좁은 의미의 하나님 형상은 거의 파괴되었다.
---「4장 “확장된 아퀴나스/칼뱅 모델”」중에서
우리가 믿는 것은 명제(propositions)다. 따라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적어도) 어떤 명제를 믿는다는 말이다. 무슨 명제를 믿는다는 말인가? 예를 들면, 이 세계가 인간이 번성할 수 있는 장소라거나, 심지어 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라는 인격체가 존재한다거나 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실제로, 이 모델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인격체가 존재함을 신앙으로 알지 않는다. 오히려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에 관한 견고하고 확실한 지식”(칼뱅),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요 나도 내 죄를 용서받았고, 하나님과 영원히 올바른 관계에 있게 되었으며, 구원을 받았다”는 견고하고 확실한 지식(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답 21)이다. 곧 우리 타락한 인간이 본질상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문제인 샬롬, 번영, 안녕, 행복, 지복,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할 하나님의 계획에 관한 견고하고 확실한 지식이다.…더 나아가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체계가 있음을 알 뿐 아니라(앞에서 보았지만, 마귀도 그런 체계를 믿고 떤다), 또한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이 체계가 내게 적용되고 유효하다는 사실이다.…신앙은 좋은 소식에 관한, 그 좋은 소식이 내게 적용된다는 것에 관한, 그 좋은 소식이 선포하는 은덕을 얻으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지식이다. 하지만 신앙(faith) 자체는 행동(action)이라기보다는 믿음(belief)의 문제, 무엇인가를 하는 것(doing)이라기보다는 무엇인가를 믿는 것(believing)이다.
---「5장 “신앙”」중에서
확장된 아퀴나스/칼뱅 모델에 따르면 흄은 (조롱을 제외하면) 옳은 부분도 있다. 복음의 주요 줄거리를 믿는 믿음을 그리스도인 안에 산출하는 것은 성령의 특별한 사역이지, 우리가 처음에 창조될 때 주어진 믿음 산출 능력과 과정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리스도인이 믿는 것 가운데는 (가령 한 인간이 죽었다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했다는 것처럼) 흄의 말대로 실제로 관습과 경험에 어긋나는 것도 일부 있다.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흄이 은연중에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로, 성령의 내적 자극이 있다면 그런 것을 믿는 것이 비합리적이라거나 이성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5장 “신앙”」중에서
하지만 신앙이 있는 사람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 주장을 믿을 뿐 아니라, (으레) 구원 계획 전체가 엄청나게 매력 있고, 기쁨을 주며, 감동적이고, 놀라게 되는 경탄의 원천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주께 그 큰 선하심으로 인해 깊이 감사하면서, 그의 희생적인 사랑에 역시 자신의 사랑으로 응답한다. 따라서 신자와 마귀의 차이는 적어도 일부는 감정(affections)의 영역에 있다. 즉 사랑과 증오, 매력과 역겨움, 욕망과 혐오 같은 감정 말이다.…따라서 신앙은 단지 어떤 명제를 믿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 명제가 설령 복음에서 아주 중요한 명제라 할지라도 말이다. 신앙은 믿음 이상의 것이다. 신앙을 산출하실 때 성령은 우리 안에 이런저런 명제가 진정 참이라 믿는 믿음을 산출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하신다. 아퀴나스가 다섯 쪽에서 네 번이나 되풀이하듯이,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만드신다.”
---「6장 “우리의 마음에 인치다”」중에서
널리 공유된 전통적인 하나님에 관한 견해는 하나님을 무감정적인(impassible) 분, 곧 욕구나 느낌이나 열정이 없고, 자신이 지으신 세계의 슬픈 상태와 자녀의 고통에도 슬픔을 느끼지 못하며, 마찬가지로 즐거움이나 기쁨이나 갈망이나 동경을 느끼지 못하는 분으로 보는 견해였다.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개략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 철학에서 비롯된 전통이 열정(passions)을?여러분이 능동적으로 행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않고?수동적인(passive) 것으로,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겪게 되는 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어떤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은 분노, 사랑, 즐거움 등에 종속되고 또한 겪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전혀 “겪지” 않으신다. 그는 행동하시지, 결코 단지 수동적이지 않으시다. 그리고 그 어떤 것에도 종속되지 않으신다.…나는 특히 이 지점에서 우리가 전통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곳이 바로 그리스 철학에 지나치게 주목하고 성경에 거의 주목하지 않은 곳 가운데 하나다. 나는 하나님도 고통을 느끼실 수 있고 실제로 고통을 느끼신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고통을 느끼시는 능력은, 하나님의 지식이 우리의 지식을 능가하는 것만큼이나,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능력을 능가한다.
---「6장 “우리의 마음에 인치다”」중에서
맥키는 유신론(혹은 다른 종교) 믿음이 종교적 경험을 통하여 혹은 종교적 경험이라는 방법으로 보증을 획득할 수 있으려면, 그 경험의 존재와 성격에서 하나님(혹은 “그 이상의 어떤 것”)의 존재에 대한 좋은 논증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만 한다고 단정한다. 맥키는 이런 주장을 논증하지 않고, 믿음이란 것(혹은 어쨌든 종교 혹은 유신론 믿음)이 혹시라도 경험으로부터 보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오로지 그런 경험의 존재와 속성에 암묵적으로 근거한 논증에 의해서라는 것을 그야말로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왜 그런 것을 생각할까?…내가 보기에, 맥키가 이렇게 단언하는 이유는 그가 내세우는 또 다른 것, 즉 유신론과 기독교 믿음은 과학 가설과 같거나 상당히 흡사하다는 것 때문이다. 가령 특수 상대성이나 양자 역학, 혹은 진화론 같은 것이라고 말이다. 그는 유신론 믿음이 종교적 경험의 방법으로 보증을 얻을 수 있는지 여부를 말하면서, (독특하게도) 이렇게 언급한다. “다른 곳처럼 여기서도 초자연주의 가설은 실패하고 만다. 적절하고 훨씬 더 실속 있는 자연주의적 대안이 있기 때문이다”.
---「7장 “반론들”」중에서
사람들은 종종 이 기획 내지 작업을 근대 경험 과학의 발전에서 본질을 이루는 부분이라 생각하며, 실제로 역사 비평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근대 과학이라는 망토로 감싸기를 좋아한다. 역사 비평의 매력은 단지 근대 과학의 특권을 공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뿐 아니라, 근대 과학의 분명한 인식 능력과 탁월함도 공유하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바로 과학 자체가 이 세계가 실제로 무엇인지 아는 데 이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역사 비평은 무엇보다도 이렇게 사람들이 널리 인정하는 여러 방법을 성경과 기독교의 기원을 연구하는 데 적용하려 한다.…그렇다면 성경을 과학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인가? 그것은 그리 분명하지 않다. 이 질문에는 하나 이상의 대답이 있다. 하지만 거의 모두가 동의하는 것으로 보이는 한 주제는, 이런 과학적인 작업을 수행할 때 (그것이 정확히 이해해서 무엇이든) 어떤 신학적인 주장이나 전제도 원용하거나 활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8장 “역사적 성경 비평이 파기자인가?”」중에서
다른 사람이 믿지 않음을 알지만 그 사람에게 내가 옳음을 증명할 수는 없는 것을 믿는다고 해서 내가 정말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일까?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물론 나도 내가 지적인 측면에서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일 수 있고 또 그래 왔을 수 있는 경우가 다양하게 존재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분명히 과거에 이런 악덕에 빠졌고, 미래에도 틀림없이 빠질 것이며, 지금도 그런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내가 이 문제를 심사숙고하고, 반론을 가능한 한 꼼꼼하게 살펴보고, 내가 유한한 존재이며 나아가 죄인이고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 없는 존재임이 확실할 뿐 아니라 도덕과 지식 면에서 내가 믿는 것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깨닫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지만 여전히 내가 보기에는 고려의 대상인 명제가 분명히 참인 것 같다고 가정해 보
자. 이럴 때도 내가 그 명제를 계속 믿는 것이 정말 부도덕할까?
---「9장 “다원주의가 파기자인가?”」중에서
악의 존재가 하나님의 존재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결론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 논증은 없다. 아울러 악에 근거한 증거론적 혹은 개연론적 논증 가운데 진지하게 고려할 만한 것도 없다. 이 정도면 됐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 일부 사람에게는 고통과 악이 어느 정도 문제가 된다. 구약성경에는 그런 사례가 가득하다.…수없이 많은 사람이 자신이 겪는 잔인한 고통 때문에 혹은 자신과 가까운 누군가의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 분노했다. 사람은 자신의 삶에 찾아온 고통과 악 때문에 하나님께 분개할 수 있고, 불신할 수 있으며, 거부하고 적대시할 수도 있다.…하지만 이런 상황이 으레 유신론 믿음의 파기자를 산출하지는 않는다. 예수나 시편의 시인이나 욥도 유신론 믿음을 포기하려 한 것 같지는 않다. 이 문제는 차원이 다르다. 유신론 믿음의 파기자라기보다는 영적인 혹은 목회적인 문제인 것이다.
---「10장 “악이 파기자인가?”」중에서
그렇다면 기독교 믿음은 참인가? 이것은 정말로 중요한 질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철학의 능력을 벗어난다. 나는 모든 사람이 혹은 거의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는 전제를 가진 어떤 논증도 완전한 기독교 믿음을 충분히 지지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지는 않다고 보며, 설령 내가 생각하는 믿음이 그런 종류의 전제가 없을 때보다는 있을 때 더 개연성이 있을지라도 마찬가지다. 철학의 이름으로가 아닌 나 자신의 생각을 말하자면, 나는 기독교 믿음이 진정 내가 보기에 참이라는 것, 그리고 지극히 중요한 진리라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10장 “악이 파기자인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