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과 1942년 사이의 겨울, 도시는 나치 병력에 포위되면서 식량 공급이 전면 차단되었다. 게다가 기온마저 영하 30도로 곤두박질쳤다. 민간인 사망자 수는 매달 10만 명에 다다랐다. 일부는 체온 저하로, 대개는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가죽장화와 책 제본용 아교로 쑨 수프를 얻기 위해 줄 선 사람들, 길가에(어차피 집도 똑같이 추웠으니) 모여 웅크린 채 급조한 수신 장치로 라디오 레닌그라드의 방송을 듣는 사람들을 담은 사진과 그림들이 박물관에 걸려 있었다. 한 생존자의 딸은 더 이상 프로그램을 제작할 기운도 없을 만큼 쇠약해진 방송국 직원들이 똑딱거리는 메트로놈 소리를 내보냈다는 일화를 들려줬다. “도시의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였어요. 아직 살아있었던 거예요.”
--- p.16
“그때 기분이 어땠는지 짐작도 못할 거예요. 당신이 지옥 한가운데 있는데, 주변의 예술이란 것들은 텅 빈 미소를 지으며 여기가 천국이라고 속삭이죠. 그때 불현듯 ‘아니야, 우리는 고통 받고 있어, 그것도 아주 심하게 고통 받고 있다고!’라고 외치는 음악을 만난 거예요. 당신의 말을 들어주고 당신을 대변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너무 기뻐서 울고 싶어지는 거예요.”
--- pp.50~51
조증 비약과 내가 앞서 언급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4번에 대한 설명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하나 있다. 사납게 뿜어내는 튜바의 주제가 그보다 앞선 호른의 ‘구슬픈 동화’ 선율을 비슷하게 재연했듯, 회전목마풍의 행진곡과 열에 들뜬 현악 푸가도 특유의 동일한 음률 패턴, 즉 도입부 주제에서 들었던 최초의 패턴에 기초하고 있다. 이 비범한 악장에 등장하는 일견 불연속적인 요소들 중 다수가 주요 악상 중의 하나 또는 둘 다와 연결되어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폴로니어스가 절규하는 햄릿을 보며 말했듯 ‘이것은 광기일지언정 그 안에는 질서가 있다.’ 실제로 자기 삶을 헤쳐 나갈 때 그랬던 것처럼,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에서도 파도처럼 밀려오는 눈부신 착상들에게 자신을 그냥 내맡기지 않았다. 그는 심연을 가로지르는 밧줄을 쳐놓듯 이 주제들 사이를 연결한다.
--- pp.75~76
“내가 알기로 임상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거기에 사로잡혀서 더 나아가지 못할 수가 있어요. 작곡가가, 그리고 음악이 할 수 있는 건 몹시 극단적이고 고통스런 곳으로부터 빠져나오도록 일종의 사다리를 대주는 일이에요. 그 사다리의 효과 중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깊은 감정, 때로는 아주 아픈 감정 속으로 모험을 떠나도록 도와주는 거죠. 이 과정은 사람들에게 어떤 요소를 제공해요. (...) 말하자면 스스로의 감정들을 객관화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들을 관찰하고 변화를 시도할 수 있죠. 아니면 최소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걸 깨닫거나요. 고통으로부터 정말로 아름다운, 창조적인 뭔가가 나타나고, 거기에 어떤 의미가 부여되는 모습을 볼 수가 있게 돼요. 만약 누가 인간의 본성에 대해 딱 한 가지 특성만 들라고 한다면, 나는 이 말을 떠올릴 거예요. 의미만 있다면 그 모든 것들을 다 견딜 수 있다고요.”
--- pp.103~104
필요하다면 여러 해 동안 음악은 무시무시한 바다 위의 구명 뗏목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실제 구원의 순간은 살아있는 타인이 우리를 보고 이해하고 아직 우리가 구조받을 가치가 있다는 신호를 보내줄 때에야 비로소 다가오는 것이다. 음악은 내게 구원 자체를 주지는 못했으나, 거기에 아주 가까이 데려다 놓아주었다.
--- p.173
‘방해도 위로도 받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을 수 있는 공간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자신 역시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 이 사실은 그 말들이 반향할 수 있음을 뜻한다’고 오바흐는 말한다. 내가 정신 치료라는 제어된 환경 속에서 그 반향하는 말들을 찾은 것도 가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과 감정이 담긴 ‘소리’를 발견하고, 그 소리들이 위대한 작곡가에 의해 경이롭고 아름다운 것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듣는 일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반향을 가져왔다. ‘말들은 짓이겨진다 / 어려운 때가 오면, 금이 가고 때로는 부서진다’고 T. S. 엘리엇은 썼다. 언어는 그렇다. 그러나 (내 경험에 따르면) 음악은 그렇지 않다.
--- pp.195~196
이 공동체는 강요하지 않는다.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 합창처럼 ‘만인이 형제가 되리라’ 외치지도, 의심하는 자에게 ‘이 동맹에서 울며 떠나라’ 명하지도 않는다. 쇼스타코비치는 함께하는 기쁨의 순간은 물론이고, 혹독한 고립의 순간에도 우리를 만나준다.
--- p.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