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물이 막 끓기 시작한 2.5리터 냄비야.
늦기 전에 내가 가진 재료를 집어넣고 죽이든 밥이든 리소토든 무언가를 만들어야 돼.”
타고난 미각에, 요리 프로그램에 대한 열정이 있었건만 막상 요리유학을 가자고 하니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다큐멘터리 프로듀서질 외에 다른 재주라곤 털끝만치도 없는 내가, 제대로 할 줄 아는 요리
라곤 하나도 없는 내가, 심지어 넥타이나 구두끈조차 야무지게 매지 못하는 엉성한 손놀림을 가진 내가, 과연 이 두 손으로 프로들의 주방에서 자르고 익히고 지지고 볶을 수 있을까? 회사에는 뭐라고 이야기하고 떠나지? 적지 않은 유학자금은 어디서 어떻게 마련해야 하나? … “그래 좋아, 한번 저질러볼까? --- 「프롤로그」 중에서
그렇게 떠난 요리유학이건만 현실은 달랐다.
“야채는 줄리앙으로 썰어요.”
‘줄리앙? 미술 입시생들이 데생하는 그 줄리앙인가?’
“부케 가르니를 만들어요.”
‘결혼식 때 신부가 들 부케를 왜 만들라는 거지?’
프랑스 요리용어에 익숙지 않은 저자에게 요리학교의 용어는 해독불가능한 암호였다. 게다가 ‘르 코르동 블뢰 바이블’로 통하는 푸른색 바인더의 레시피 북에는 그저 요리이름과 재료목록만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다빈치 코드와 다를 바 없는 이 책을 해독하는 유일한 방법은 선생님의 시연수업뿐이었다.
레스토랑 밥을 십 년 넘게 먹었어도 요리학교에 입학하면 예외 없이 초급반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초급반 학생들은 실력차가 엄청난데, 실력에 따라 세 그룹으로 분류해볼 수 있다. 엘리트인 그룹A와 세미프로 수준의 그룹B, 그리고 그룹C.
그룹C의 실체는 양파 하나도 제대로 썰 줄 모르는 완전초보자들, 학생들이 즐겨 쓰는 표현으로 ‘주방의 얼간이들Kitchen Idiots’이다. ‘얼간이들’은 수적으로는 10퍼센트 안팎의 소수지만 … 손이 무엇을 조리하고 있는지 뇌가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A, B 그룹 멤버들의 동작을 필사적으로 엿보며, 오직 대열에서 낙오하지 않으려는 처절한 생존본능에 의존한 채 수업에 임한다. 인정하기 어려웠지만, 나는 마지막 그룹, 즉 얼간이 클럽의 멤버가 되었다(제길!). --- 「얼간이 클럽의 멤버가 되다」중에서
저자가 미국도 프랑스도 아닌 영국의 요리학교를 선택한 것은 비단 요리학교 자체만을 이수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런던은 가장 좋은 요리 프로그램을 만드는 곳이자 요리 프로그램을 통해서 세계적인 셰프들을 알린 곳이기도 하다. 초급반을 지나 중급반과 고급반으로 가면서 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서 저자의 시선은 영국의 요리프로그램과 스타 셰프들 그리고 런던의 레스토랑들로 향한다.
제이미는 학교급식을 소재로 한[스쿨 디너], 불우청소년 재활프로그램인 [피프틴Fifteen]등 공익성이 강한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이미지를 쇄신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건강한 음식, 요리의 윤리 등을 다룬 시리즈를 계속했고, 프로그램들은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
고든 램지의 리얼리티 쇼는 프로듀서의 눈으로 봤을 때 분명 훌륭한 점들이 많다. 그가 진행하는[헬스 키친][마스터 셰프] 등의 오디션 프로그램들은 요리사가 카메라 앞에서 음식을 만드는 낡은 방식을 깨뜨렸고, 요리가 노래나 스포츠처럼 엔터테인먼트로 성공하는 선례를 만들었다. 그러나 욕설과 경멸과 무시와 분노가 들끓는 요리 프로그램은 ‘오락용’으로는 자극적일지 모르나, 사람들이 음식에서 바라는 것, 음식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따뜻하고 아늑한 마음이다. 제이미의 ‘대박행진’의 이유이자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고든 램지에 비해 요리솜씨는 한참 뒤떨어질지 모르나 제이미는 적어도 음식의 본질만큼은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제이미 올리버에게는 있고 고든 램지에게는 없는 것」 중에서
피시 앤 칩스 밖에 알려진 것이 없는 영국 요리의 전통을 되살리겠다는 영국 출신 샘, 요리사가 되는 것은 전 세계를 여행할 수 있는 티켓을 얻는 일이라는 헝가리 출신 아틸라, 여자를 꼬시는 데 요리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말레이시아에서 온 아브라함.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은 르 코르동 블뢰에서 공부하며 얻은 또 하나의 행운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이 레스토랑에서 ‘판매’를 위해 만드는 음식이었다면, 친구들의 집에서 먹었던 음식은 그들에게 가장 친숙한 요리, 보다 심플한 음식이었다. 그리고 그 음식들이야말로 친구들의 삶 깊숙이 파고든 진정한 ‘소울 푸드’일 것이다. --- 「벽에 붙은 파리, 요리학교에 간 카메라」 중에서
또한 책에는 퀴진 과정뿐 아니라 파티세리 과정도 함께 공부한 저자가 깨달은 두 ‘부족’간의 신경전도 흥미롭게 쓰여 있다.
파티세리의 세계는 퀴진의 세계와 너무도 달랐다. 마치 중력법칙이 다르게 작용하는 은하계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파티세리에서 레시피는 바이블이자 꾸란(코란)이었다. ‘경전’과 토씨 하나라도 다르게 조리하면 걷잡을 수 없는 재앙이 찾아왔다.
퀴진 수업 때는 조리과정 초반에 실수를 해도 요령만 있으면 ‘식용 가능한’ 수준까지 회생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파티세리에서는 구회말 역전 같은 건 기대할 수 없었다. 타르트든 케이크든 반죽이 제대로 안 된 채 오븐에 들어가면 그걸로 끝이었다
…
녹아내리는 과일 무스 케이크를 바라보며 나는 인생의 두 가지 방식을 놓고 실존적 고민에 빠졌다. 인생은 퀴진인가, 파티세리인가? 내 멋대로 살아도 인생 후반전에 되살아날 가능성이 존재하는 열린 세계일까? 아니면 뿌린 대로 거둘 수밖에 없어 결국 정해진 법칙에 따라 결말이 나는 닫힌 세계일까? --- 「해병대 셰프의 테러리스트 명단에 오르다」중에서
[쿡쿡]은 다큐멘터리 피디인 저자의 500일간의 요리유학기이다. 하지만 10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며 꼭꼭 숨겨두었던 인생에 대한 물음과 삶에 대한 철학이 책 곳곳에 잘 스며들어 있다. 요리학교에서의 생활이 메인 재료라면 영국의 레스토랑, 요리 프로그램에 대한 생각, 포르투갈 여행 이야기,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 이야기, 한식에 대한 생각 등은 메인 재료의 맛을 풍성하게 하는 소스와 같다. 때문에 저자의 글 솜씨에 쿡쿡 거리며 웃다가 순간 숙연해져 울컥하는 일들을 반복하게 된다.
직장 10년차, 쭉 뻗은 고속도로가 아닌 새로운 길로 우회를 하려는 순간, 누구에게나 수많은 질문들이 머리를 스칠 것이다. 이걸 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 거지?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을 포기하고 내가 얻으려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배운 것은 프랑스 요리의 현란한 레시피나 테크닉이 아니었다. 내가 배운 것은 한 접시의 요리를 앞에 놓고 질문을 던지고 생각해보는 법이었고, 음식을 만드는 일과 요리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었다. 또한 그것은 타인의 요리, 다른 문화의 음식에 감탄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었고, 좋은 음식과 그것을 우리에게 준 자연에 감사하는 법이었다. --- 「에필로그」 중에서
최고의 한 접시를 꿈꾸며 오늘도 뜨거운 주방을 뛰어다니고 있을 요리사 친구들아,
우리들 인생의 메인 요리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나도 전 세계 시청자를 행복하게 해줄 최고의 음식 프로그램을 만들어볼게!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