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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문학과지성 시인선-532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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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09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412쪽 | 212g | 128*205*18mm
ISBN13 9788932035765
ISBN10 8932035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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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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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자란 소녀를 입양하는 것은 어떨까. 머리가 부서진 인형이 말을 한다. 검은 레이스가 펄럭거린다. 입을 벌리지 않고 말을 할 수 있다. 글쎄. 팔이 부러진 인형이 팔짱을 끼다 말고 중얼거린다. 찢어진 퍼프소매 사이로 철사 끈이 뻗어 나와 있다. 소녀란 다 자랄 수가 없는데. 자란 것이 없고 자랄 것이 없어서 소녀라고 부르지 않나. 머리가 부서지고 팔이 부러진 인형끼리 말을 한다. 내가 본 소녀들은. 버려진 상자 안에서 심각한 복화술이 이어진다. 그때 우리는 상자 밖에서 온전한 구체를 움직일 수 있었지만. 말을 할 때마다 머리통과 팔뚝에서 플라스틱 조각이 떨어진다. 소녀들은 우리를 입양하면 이름을 붙여주곤 했었지. 기억나지? 이름이란 기억해야 이름인데. 머리가 부서진 인형의 눈썹이 조금씩 떨린다. 젠장. 반밖에 안 남은 머리통으로 뭘 기억하라는 거지. 상자 밖으로 뻗어 나간 철사 끈을 누군가가 밟고 지나간다. 왼쪽으로 굽은 인형의 팔이 너덜너덜하다. 내가 한 팔로 너를 안을 수 있다면. 조금씩 부서지면서 옆으로 갈 수 있다면. 소녀들이 골목에 모여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을 한다. 울음을 참듯이 배에 힘을 주면 가능하지. 누군가가 기록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조용한 대화라니. 소녀들은 자라기를 멈출 때마다 이곳에 와서 인형처럼 말을 한다. 서로의 머리통을 만져주고 부러진 팔에 흰 붕대를 감아준다. 그런데 네 이름이 뭐였지. 소녀들이 상자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산산조각이 난 구체 관절을 붙여본다. 자꾸만 떨어지는구나. 애초부터 우리는 자신을 입양해야만 했어. 태어나면서부터 그럴 기회가 없었지. 거울이 깨진 진열장 앞에서 소녀들은 말이 고인 깊숙한 내부를 들여다본다.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대화를 한다.
--- 「빈 노트」중에서

슬픔을 시작할 수가 없다
너의 몸을 안지 않고서는
차갑고 투명한 살을
천천히, 그리고 오랫동안
쓸어보지 않고서는

1년 동안
너는 바닷속에서 물처럼 흘러가고 있다
너는 심연 속에서 살처럼 흩어지고 있다
발이 없어서 우는 사람

오래전부터 바다는 잠을 자고 있어서
죽음을 깨우지 못한대
너는 묘지도 없이 잠속에서 이를 갈며 떨고 있다
너는 죽음을 시작할 수가 없다

산 자들은 항상 죽은 자 주위로 모여든다고 하는데
우리는 슬픔도 없이 모여 있다
진정한 애도는 몸이 없이 시작되지 않는다

모든 비밀은 바닷속에 잠겨 있다
바다에서 죽지 않는 손이 올라온다
그 손을 잡아끌어 올려야 한다
--- 「슬픔을 시작할 수가 없다」중에서

어둠이 검은 물질로 만들어졌다고 상상한 이후부터 시간의 꿈을 담고 싶어졌습니다. 병에 담으면 될까요? 긴 시간을 건너왔으니 따뜻했던 밤으로 돌아가고 싶어져서

그는 매일 밤 술을 마시고
병을 모으고
병을 세우고

여기에 오는 모든 사람은 찰랑찰랑한 어둠을 만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병의 입구를 꽉 움켜쥔 채 잠이 들고

나는 이불 밖으로 빠져나가는 무관한 것들을 자꾸만 쓸어 담고

너니까, 너라서, 너 때문에 지옥에 있었지. 우리의 싸움이 검고 어두워질 때 너라는 사실 하나로 모든 시간은 꿈이 되었지. 전도서를 펼치면 허무,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나는 그 문장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다시 지웠습니다. 구약성경은 어떤 종말보다 잔혹해서 병에 담고 싶어지는데

그는 매일 밤 펜을 버리고
문장을 버리고
자신을 버리고

아무것도 쓰지 마. 무관한 것들을 쓰지 마. 돌아올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쓰지 마. 이제는 쓰지 마.

아름다운 것들은 기록되면 파괴되지.
사라질 수가 없지.

그는 연애편지를 이렇게 건네네요.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영원히 느끼고 싶다면 그저 손이라는 물질을 잡고

병의 입구를 열고
--- 「병 속의 편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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