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9년 10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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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08쪽 | 338g | 134*195*16mm |
ISBN13 | 9791159922688 |
ISBN10 | 1159922683 |
발행일 | 2019년 10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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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08쪽 | 338g | 134*195*16mm |
ISBN13 | 9791159922688 |
ISBN10 | 1159922683 |
흐려지지 않기 위해서 쓰레기소각장에서의 일주일 한 사람에게서 켜진 두 개의 이름 순수는 뒤에서 나를 부르고 수직과 수평 곰팡이에게 필요한 시간 어둠이라는 색깔 물로 그린 자화상이 있다면 그 자리는 그대로 두는 게 더 낫겠군요 겨울 숲에 날아든 새를 위해 사랑은 유머 일번지 나선형의 사랑 / 밤과 비 나선형의 사랑 / 대화의 굴곡 함께하지 않는 사랑을 기다리는 것은 아프다(1971) 햇빛세입자 시 ― 밤 부엽토 잘 지내나요 풀베개가 되기 위한 새싹들의 전진 아침 퇴고 겨울잠 주무시는 선생님께 아직 지붕은 만들고 있거든요 소용돌이 속에서 잘 읽고 있어요 책 속에서 헤어진 사람들 보풀 떼고 입는 옷 아몬드 모양의 눈 나의 애독자에게 여기, 이야기가 많이 들어 있다 시끄러움을 자처한다는 것 따뜻한 초조함 책상 일기 여러분 / 2018년 12월 10일, 서울과학기술대 시창작연습2 특강 원고 시 ― 사랑의 파도 위의 레겐탁 내가 훔친 인디언 보조개 한 개 식물 부음 타이쿤 형식으로 안식월 부동산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일 나를 재워준 사람 슬픔이라는 생활 마음과 보자기 헐거운, 지난한, 그럼에도 한 뼘 나무의 두 마디 간격 꽃집에서 흑백 일기 지킨 약속보다 어긴 약속이 더 많다 시 ― 타오르는 겨울 |
친구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이다. 왜 이 책을 추천했냐 물어보니, 생뚱맞게도 그 역시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며 이참에 읽어볼 계획이라 말한다. 그저 언젠가 들렀던 전시회에서 이 책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왠지 눈길을 끌어 사진을 찍어두었었는데, 이참에 읽을까 싶다며 멋쩍게 웃는다.
그렇게 조금은 갸우뚱 해지는 이유로 나 역시 이 책을 만났다. 하긴 어떤 책은 그렇게 예기치않은 순간 엉뚱한 인연으로 닿기도 한다.
햇빛세입자 그리고 훈데르트바서
햇빛이 세를 들어 사는 걸까? 아니 찬란한 햇빛이 쏟아지는 곳에 내가 세를 들었다는 말인가? 훈데르트바서..왠지 사람이름처럼 느껴지기는 하는데, 어느 나라 사람일까? 아니 어쩌면 사람 이름이 아닐 수도 있겠다. 표지에 적힌 제목과 뜻 모를 이름을 한참 들여다보며 무슨 뜻일지 추측해보기도 했다.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화가이자 건축가였다. 저자는 1928년 태어나 2000년 세상을 떠난 그 그리고 그의 작품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한다.
나는 훈데르트바서에 푹 빠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p.13
자꾸만 그의 얼굴과 작품, 그가 설계한 건물이 아른거렸다. 사로잡혔다는 말을 처음으로 몸소 실감했다. 나는 아른거린다는 느낌이 아름다움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사랑을 예감했다. 계속 생각난다는 것, 아른거리는 신호가 나에게로 쏟아지는 것은 사랑의 암호이기도 하기 때문에...(후략) p.17
책의 중간 책의 제목이기도 한 <햇빛세입자>의 글에 이어 훈데르트바서의 <나무세입자>를 적어두기도 했다. 아마도 훈데르트바서를 향한 그의 마음을 적고 싶었나 보다.
나무가 자랄 곳을 처치하고 그 자리에 건물을 세우는 것이니, 원래 있던 나무에 다시 자라날 공간을 줘야 한다는 것은 훈데르트바서의 주장이었다. ‘나무 세입자’로도 잘 알려진 그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그것을 실현했다. p.51
햇빛세입자
1. 창문을 본떠 집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세입자는 아무런 소리 없이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줍니다.
2. 햇빛세입자는 그림자를 소개해줍니다.
(중략)
4. 햇빛세입자는 가끔, 인간이 무분별하게 세워놓은 건물로 길을 잃기도 합니다. 햇빛이 들지 않는 집은 우울합니다. 기본적으로 우울하기 때문에 치명적이지는 않습니다. 자주 눈을 비비게 될지도 모릅니다.
5. 아침에 가장 영리한 시계가 되어줍니다.
(중략)
8. 햇빛세입자는 외부와 내부를 잇는 최초의 통로가 됩니다. 일시적으로 열리는 시간이 있으므로, 그 시간을 즐길 것을 권장합니다.
9. 날씨를 간접적으로 중계하는 수다쟁이가 되기도 합니다. 햇빛세입자는 돌연 사라져버리기도 하고, 뜬금없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놀라지는 마세요. 인기척을 내지 않습니다.
10. 햇빛세입자가 드나드는 자리에서부터 집은 유연해집니다. 암막 커튼으로 입장을 막았다면, 지금 당장 열어 젖히세요. 집에도 기분이 있다면 햇빛이 드는 자리에서 턱을 괴고 싶어 하니 그 게으름을 햇빛 속에 놓아주세요. pp.73-74
시인이기도 한 저자의 글은 조용조용히 마음에 닫는다. 저자가 들으면 멋쩍게 헛웃음을 지을지도 모르겠지만 책을 읽는 내내 단단히 땅을 딛고 서 있는 느낌보다는 어딘가 부유하는 기분이었다. 왠지 서글픈, 하지만 막연히 슬프다고 하기에는 부드러운 느낌이 공기를 감싸는 시간을 만난다.
*기억에 남는 문장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평적인 마음에도 수직의 비가 내릴 수 있다. 그것이 때로는 땅을 촉촉하게 만들 것이며, 널따란 수평의 대지 위에 나무처럼 자라 나의 생태계를 풍성하게 해줄 수도 있다는 것을 너무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누군가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내 잔잔한 수평 위로 구슬을 던지는 것만 같았다. 그것을 가만히 붙잡아두기 위해서 물 아래 오리들의 바쁜 갈퀴처럼 힘을 더해야만 했다. 그 안간힘이란 것은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므로, 어쩌면 나는 나 스스로 잘 견디고, 단단한 사람처럼 보이길 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p.33
사랑은 두 사람만 아는 유머 같아요. 그러니까 수백 명의 사람들 속에 있어도, 그 둘만 아는 유머를 알아보고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을 수 있는 거요. p.58
일기를 오랫동안 써왔다. 일기에 집착하는 이유는, 일기 쓰기가 내가 어떤 하루를 보냈는가에 대한 기록으로서 시간에 대한 존중이자 예의를 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면 시간을 허투루 보낸 것 같아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반성하지 않으면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문제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없었다. p.86
요즘엔 아침에만 볼 수 있는 풍경에 사로잡혀 있다. 어제와의 실랑이를 끝마치고 다시 새로운 시간에 접속하게 되는 그 접합 부근에서 나는 과거와 미래 사이 가장 풍부한 현재가 된다. 아침은 내게 그런 것을 준다. 원래 그런 것을 주려고 했지만 나는 이제야 받게 되었다. pp.86-87
나는 퇴고할 때마다 늘 마지막 문장을 지워서 보고는 한다. 그것을 어젯밤에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제는 채워서 이루고 싶은 게 있었고 오늘은 비우면서 이루고 싶은 게 있으니까. 어제는 허전해 보였을 것이다. 오늘은 마땅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p.87
시를 쓰다 보면 종종 마지막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모르겠어서 헤매는 경우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마지막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이다. 흰 종이 위의 검은 언어가 전하는 것은 마지막이겠으나 그 의미로 계속 숨 쉬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마지막, 문을 닫으면 다시 문이 열리는 세계가 그려지는 마지막을 언제나 꿈꿔왔다. p.94
예전이 그립다고 상정하는 것 속에는 그때만의 ‘무모함’이 담겨 있기도 하다. p.110
시간이 약이야, 라는 말을 좋아하진 않는데 나는 그 말을 자주 사람들에게 처방한다. 대신에 “그 시간을 같이 해줄게” “함께 있어줄게”라는 말을 덧붙인다. 너 혼자서 견디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필요할 때 그 시간이 첩첩산중으로 다가올 때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뜻이다. pp.175-176
헤매지 말라고 느슨하게 묶어준 것도, 흐르지 않도록 꽉 묶어준 것도 다르지 않은 것이겠다. 그렇게 펼치면 보자기의 양끝에는 다시는 펼 수 없는 주름이 져 있고, 나는 그 아름다운 무늬를 좋아한다. 그런 무늬를 누군가에게 만들어준 적은 없는 것 같아서, 아주 가끔 잘 포개어놓은 몇 장의 보자기를 보기만 한다. p.179
이별은 많은 약속을 철회하는 일이다 두 사람의 약속이 한 사람의 약속이 되는 순간이고, 그렇게 약속을 갈라 나눠 가진 채 미제로 남기는 것이다. 폐허에 세워진 시계탑 앞을 서성이거나, 함께 쓰던 물건을 흘러가는 시간에게 쥐어주거나, 약속을 지켰던 장면이 상영되는 극장 안에 홀로 앉아보는 일이다. p.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