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출판사의 카탈로그에서 아컴하우스+의 주소를 알아내서 러브크래프트의 책 중 입수 가능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내 저작에 관해 알고 있던 어거스트 덜레스에게서 친절한 답장이 돌아왔다. 그 편지에서 덜레스는 몇 가지 지적을 해주었고, 그 결과 『문학과 상상력』 미국판의 러브크래프트 관련 부분에 나는 몇 군데 수정을 가했다. (덜레스는 여전히 이 책이 러브크래프트에 대해서는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덜레스와 서신 왕래를 하던 중 그가 이런 얘기를 했다. “흐음, 당신이 러브크래프트에 관해서 그토록 비판적이라면, 직접 소설을 써보고, 얼마나 훌륭한 작품이 나오는지 확인해보면 어떻습니까…….” --- p.15
작가 자신이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고, 그 결과 독자들까지 소름 끼치게 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뭔가를 생각해내는 것은 지극히 힘든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방식의 실존주의를 다룬 어떤 책에서 현상학現象學을 다룬 장을 집필하고 있었을 때, 해결책이 떠올랐다 ? 마음 속의 괴물을 등장시키기로 하자……. 그 결과 나의 첫 번째 과학소설이 탄생했다. --- p.16
이쯤 되면 내가 왜 러브크래프트에게 그토록 친근감을 느끼는지, 본서가 왜 반은 장난스럽고, 반은 애정에서 비롯된 존경의 표시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은 나 자신도 러브크래프트적 전통의 후예라고 해도 무방하다. 나는 사람들보다는 책을 상대할 때가 더 마음이 편하고, 독서의 결과를 쏟아붓고 형이상학적 구조에 입각한 정교한 신화를 고안함으로써 작품에 진실미를 부여하는 작업에서 큰 기쁨을 느낀다. 따라서 본서에서도 기묘한 미지의 힘에 대한 러브크래프트의 깊은 관심과, 프랑스 혁명 이래 왜 인류는 그토록 다수의 ‘아웃사이더’를 갑자기 배출하기 시작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나 자신의 관심을 결합했다. --- pp.29-30
라이히는 불과 십 분 만에 나를 낙관적이고 정상적인 정신 상태로 되돌려놓았다.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때 나는 차토구아인들을 상대로 한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던 것이다. --- p.55
덜레스가 보낸 책들이 들어 있는 소포가 마침내 도착했던 탓이다. 「시간의 그림자」라는 소설을 펼쳐보자마자 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막 지하에 묻혀 있는 거대한 석재들에 관한 묘사와 맞닥뜨렸다. 그동안 반대편 안락의자에 앉아 다른 책을 뒤적이던 라이히는 놀란 듯한 신음 소리를 내더니 곧 큰 소리로 한 문장을 읽었다. “이 암흑 속에 사는 자는 뇨그타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바로 전날 저녁에 ‘압호스 석재’에 각인된 비명을 시험 삼아 번역해보았는데 “말들은 두 마리씩 뇨그타의 앞으로 대령될 것이다”라는 해석이 나왔던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라이히에게 「시간의 그림자」에 나오는 지하 도시들의 묘사를 읽어줄 차례였다. “반半 폴립 상狀의 장로 종족에 의해 건설된, 문이 없는 높은 건물들로 이루어진 위대한 현무암 도시들.”
러브크래프트가 모종의 기묘한 방법을 통해 우리의 발견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점에는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 p.88
한편 나는 과거의 인격과 그 전제들을 거부하고 새로운 정신의 대륙으로 진입하는 일에 완전히 몰두하고 있었던 탓에, 내가 여전히 몇 십 개에 이르는 일반적인 전제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를테면 나의 정체성이 변했다고 느끼면서도, 여전히 강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정체성은 매우 깊은
해저에 박혀 있는 닻으로부터 온다. 나는 여전히 나를 인류의 일원으로 간주한다. 여전히 나를 태양계의 주민인 동시에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진 우주의 일부로 간주한다. 시간과 공간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이나 죽은 뒤에 어디로 있는지에 관해 의문을 느낀 적은 없다. 나 자신의 죽음이라는 문제에 관해 생각해본 적조차 없었다. 그것은 ‘나중에 탐구해도 될’ 문제였으므로.
지금 정신기생체들은 이렇게 깊은 곳에 계류되어 있는 내 정체성으로 접근해서 뒤흔들고 있었다.
--- p.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