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9년 10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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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68쪽 | 670g | 152*225*30mm |
ISBN13 | 9788996416623 |
ISBN10 | 8996416622 |
발행일 | 2019년 10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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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68쪽 | 670g | 152*225*30mm |
ISBN13 | 9788996416623 |
ISBN10 | 8996416622 |
1부 스스로 동여맨 조선과의 인연 안중근,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Korea’라는 이름에 가슴이 뛰어 헐버트가 가훈, ‘원칙이 승리보다 중요하다!’ 육영공원에서 싹튼 한국사랑 조선 최초의 언론 외교관 훈민정음을 부활시킨 한글 전용의 선구자 최초의 교과서이자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 2부 교육자요 언론인이자 선교사 크리스천의 이상형 YMCA를 탄생시킨 계몽주의자 ‘명성황후시해사건’에 분노하며 일본을 국제사회에 고발 근대 교육의 초석을 놓다 “한국인들이여! 당신들의 살길은 교육뿐” 언론인이자 언론 독립운동가 한국 간섭을 중지할 것을 국제사회에 호소 3부 한국학의 개척자 경이적 저술가 한글 사랑의 표상 헐버트와 주시경의 동행 최초의 한국어 학자 한국 문학을 자연으로 노래하다 아리랑에 최초로 음계를 붙이다 한국의 문화유산을 국제사회에 소개 불세출의 역사학자 근대 역사학의 출발점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 회한과 긍지의 교훈서 [대한제국의 종말The Passing of Korea] 4부 헐버트의 숙명, 한국 독립운동 50년 대장정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역사의 양심 을사늑약 저지를 위한 고종 황제의 대미 특사 민권 운동가 일본의 ‘경천사 십층석탑’ 약탈을 국제사회에 고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5부 미국에서도 38년의 독립운동을 이어가 단신 독립운동을 선언 유서를 남기고 한국 땅을 다시 밟아 “나는 죽을 때까지 한국을 위해 싸울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을 굴복시키다 ‘3.1혁명’을 천부적 권리로 승화시켜 식어가는 한국 독립운동 열기를 되살려 고종은 무능한 군주였나? 6부 일본이 탈취해간 고종 황제 내탕금 고종 황제의 세 번째 소명을 받다 예치금을 도둑맞는 고종 내탕금은 꼭 돌려받아야 7부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40년 만의 귀환 헐버트의 울림 헐버트 정신 이어가기 |
요즘 미스터션샤인에 푹 빠져 있다. 방영 당시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했던 드라마다. 탄탄한 각본과 보석 같은 배우들의 연기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빠져들게 한다.
어젯밤에는 13회를 봤다. 요셉이라는 선교사가 나왔다. 주인공인 이병헌이 연기하는 주한 미 공사대리 최유진 대위는 노비 출신으로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미국으로 건너가 미군이 된 후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를 살려주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준 이가 요셉이라는 선교사다. 조선으로 돌아온 최유진 대위는 여전히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은인인 요셉 선교사에게 편지를 보낸다. 속히 만날 날을 기대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요셉 선교사가 살해당한다. 요셉 선교사는 고종 황제의 특사로 청나라에 밀서를 전하려다 이를 미리 눈치챈 친일파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놀랐다.
마침, 이 책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라!」를 다 읽은 차였기 때문이다.
“헐버트는 총칼로 일본과 싸운 군사적 영웅은 아니다. 세력을 이끄는 결사체의 지도자도 아니다. 그러나 헐버트는 1895년 을미사면 직후 고종 침전에서 불침번을 선 이래 필봉으로, 민권운동으로, 밀사 활동으로, 언론 회견과 기고로, 집회와 강연으로 반세기에 걸쳐 일본 침략주의에 맞서 싸운 한국 독립운동의 횃불이자, 어떤 결사체 못지않은 대일항쟁의 화력이었다.” (p.363)
미스터션샤인의 각본을 쓴 김은숙 작가는 분명 헐버트라는 독립운동가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몰랐다. 전혀 몰랐다.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다고 자부하는 나도 헐버트라는 이름조차 몰랐다. 책을 읽는 내내 부끄러웠다.
조선을 사랑한 사람
“헌사에 이은 머리말에서 ‘이 책은 악의에 찬 외세에 의해 시달림만 받을 뿐 올바른 평가를 받아 본 적이 없는 한 국가와 민족에 대해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쓴 사랑의 열매(a labor of love).’라고 하였다.” (p.224)
헐버트는 누구보다 조선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 직후, <대한제국의 종말>이라는 책을 국외에서 출간한다. 국외 출간의 이유는 “한민족의 역사,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을사늑약의 억울함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p.222) 그는 어떻게든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가 겪는 불의함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혼자서 동분서주했다. 책을 출간하고 강연을 다니고 기고를 했다. 일본의 침탈에 분노하여 분연히 일어선 조선인이야 ‘내 나라니까’라는 이유를 댈 수도 있다. 하지만 헐버트는 이방인이다. 고종의 청으로 학교를 만들어 신식교육을 하러 온 교사였다. 교사 생활만 하고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왜 조선을 위해 힘쓰지 않느냐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그는 조선을 너무 사랑했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전심을 다 하고 모든 것을 내어놓는 것 말고는 헐버트의 생애를 이해할 수 없다.
그의 조선 사랑은 조선인과 조선 문화 조선의 글자인 한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헐버트는 학생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자신의 조선어 공부는 의무라고 여겼다.” (p.50)
“조선 사대부들은 한자를 많이 안다는 우월감에 취해 한글 쓰기를 거부하였다. 실학의 대가로 지칭되는 박지원, 정약용도 한글 서적을 한 권도 남기지 않았다.” (p.72)
한국의 영어학원에서 일하는 원어민 강사가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영어만 써도 불편한 게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100여 년 전 헐버트는 그러지 않았다. 한글 공부를 당연시했다. 스스로 한글을 깨우치는 데 힘썼다. 또한, 최초로 <훈민정음> 서문을 영어로 번역해 발표했다. 나아가 한국어와 태평양 국가 언어·대만 토착어와의 유사성을 비교 연구하여 발표하고 한글 소설·희곡도 직접 쓰기에 이르렀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제외하고 헐버트의 조선과 조선의 글, 조선의 문화에 대한 헌신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포레스트 검프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 검프는 미국의 굵직한 역사에 매번 등장한다. 우연히 발을 들여놓게 된 사건이 매번 역사적인 사건이 된 것이다.
“한철호 교수는 ‘서재필이 단시일 내에 한글과 영문으로 <독립신문>을 창간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헐버트의 삼문출판사 시설을 이용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p.134)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주시경은 삼문출판사에서 밤에까지 일하며 학비를 보탰다.” (p.160)
헐버트가 운영했던 삼문출판사를 통해 역사적인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 비록 주권은 일본 제국주의에 침탈당했지만, 우리 글로 된 신문을 창간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밑거름이 된 것이다. 또한, 삼문출판사에서 학비를 벌어 공부한 주시경은 역사적인 국어학자가 되었다.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주시경을 국어학자가 만들어 내기 위해 출판사를 운영한 건 아니겠지만 결국 헐버트의 출판사를 통해 역사의 한 페이지가 완성된 것이다.
신앙을 행동으로 옮긴 사람
“1905년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미국의 선교본부는 한국에 파송한 선교사들에게 정치와 종교는 불리해야 한다는 원칙을 시달하였다. (중략) 헐버트는 미국 선교본부에 친일 성향의 선교사들을 비난하는 서신을 보내 ‘개신교의 침묵은 한국인들을 고통에 빠트리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p.234)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에서도 자주 나오는 장면인데, 구한말 열강은 조선의 편이 아무도 없었다. 그저 이권을 챙기기에 급급했다. 손쉬운 먹잇감을 가운데 두고 게걸스러운 침을 흘리며 서로 눈치만 볼 뿐이었다. 특히, 미국은 일본을 통해 중국 대륙으로의 진출을 꿈꿨다. 일본의 조선 침탈은 어쩌면 제 손에 피 묻히지 않고 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선교를 위해 조선에 와 있던 선교사들과 미국 본토의 선교본부는 동상이몽이었을 테다.
헐버트는 참지 않는다. 자신의 신앙과 그에 기반 한 정의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교육도 그러했다. ‘선교본부에서 명령했으니 따라야지.’가 아니었다. 친일 성향의 선교사들을 비난하는 서신을 보내고 ‘개신교의 침묵’을 비판했다.
비판과 회개 없이 양적 성장에만 함몰되어 온 지금의 한국교회에 울리는 경종이 크다.
일본에는 악몽이었던 사람
“을사늑약을 전후한 한미일 관계를 오랫동안 연구한 일본 조치대학교 나가타 교수는 ‘일본은 한국인 독립운동가들과는 달리 헐버트의 반일운동에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헐버트의 특이한 한국을 향한 열정은 일본인들에게는 악몽이었고, 한국인들에게는 희망이었다.’라고 헐버트를 평가했다.” (p.317)
일본은 개방 이후 막후에서 외교에 온 힘을 쏟았다. 드넓은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구미 열강의 청나라와 러시아에 대한 견제 야욕이 일본의 욕심과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헐버트의 꾸준한 기고와 서신, 강연에도 미국 본토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어쩌면 귀찮은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 일본 제국주의는 거칠 것이 없었다. 야금야금 조선을 먹어 들어가며 대륙진출을 꿈꿨다.
다만, 헐버트만은 일본도 어찌할 수 없었다. 이미 국외에 알려진 인사를 드라마에서처럼 쉽게 처단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에는 악몽이었던 만큼 조선에는 희망이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람
“헐버트는 조선 말기 1886년에 내한하여 63년을 한민족과 함께했지만, 그의 유품은 많지 않다. 변변한 사진도 없다. (중략) 그가 남긴 저술이 그의 일생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p.12)
수많은 기고와 강연을 한 사람의 유품이 남지 않았다는 것도 의문이다. 사진조차 몇 장 없다니. 안타깝다.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을 하지 못한 탓이 크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의열단 단장 김원봉 선생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한 실정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 중 상당수는 선친의 위대한 업적을 입 밖에 꺼내지 못한 채 죄인처럼 궁핍한 삶을 살았고, 반민족행위자들의 후손 중 상당수는 부와 명예를 누리며 아직도 기세등등해 살고 있다. 외국인 독립유공자에 대한 인식과 연구는 더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저자인 김동진 선생은 학창시절 헐버트의 저서 ‘<대한제국의 종말(The Passing of Korea)>을 읽고 헐버트의 한국사랑, 학문적 기품, 가치관적 삶에 매료된 김동진은 국제 금융기관에 근무하면서도 끊임없이 헐버트를 탐구하였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헐버트라는 존재를 알게 되어 읽고 공부하지 않는 이상 제대로 알 길이 없다. 김동진 선생은 ‘1999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를 발족하고,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를 이끌며 헐버트 기념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헐버트 알리기에 앞장서 왔다. 1999년 이래 매년 추모식 거행, 후손 초청, 학술회의 개최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한 사람의 헌신적인 노력 없이는 될 수 없는 일이다.
해방 70년이 훌쩍 지나 이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한국은 제대로 된 역사를 세우고 국가를 위해 희생한 유공자들에 대해 재평가를 해야 한다. 무엇보다 아직도 역사의 그늘 아래 감춰져 빛을 보지 못하고 있을 수많은 독립유공자를 찾아내어 제대로 된 감사와 예우를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선진국의 자세다.
더불어 어린 학생들의 교과 과정에도 반드시 헐버트와 같은 외국인 독립유공자들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코로나 팬더믹 시대를 겪으며 역사상 어느 때보다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는 현실이다. 아프리카 어느 국가, 남미의 어느 국가, 동유럽의 어느 국가에서 일어나는 불의와 비리·침탈과 전쟁에 대해서 눈감지 않을 가치관을 가르쳐야 한다.
헐버트가 조선을 위해 한 숭고한 ‘사랑의 생애’는 그런 교육에 더욱 적절할 것이다.
“헐버트의 죽음에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헐버트가 장기간 여행의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내한 7일 만에 서거하여 전혀 증언을 남기지 못한 점이다.” (p.418)
해방 후, 이승만은 헐버트를 초청한다. 이미 고령이던 헐버트의 건강을 걱정한 가족들은 만류했지만,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80이 넘은 나이로 태평양을 횡단하는 뱃길은 무리였다. 내한 7일 만에 서거한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굳이 왜 초청을 했나? 라는 의문은 쓸데없다. 헐버트는 해방된 조선의 산과 들, 땅과 공기,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을 것이다. 평생을 사랑하고 아낀 조선을 자신의 생애 끝자락에 온몸으로 새겨 넣고 싶었을 것이다.
좋은 책을 통해 훌륭한 독립유공자를 만나 뵙게 되었다. 할 수 있는 한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고 7살 딸아이에게도 알려 줄 것이다. 나도 절대 잊지 않고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 것이다.
헐버트 선생님, 마음을 다해 감사드립니다.
계신 곳에서 영면하십시오.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김동진 지음 ∥ 참좋은친구 ∥2019.10.21.
올해가 광복 75주년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진정한 광복의 의미가 약화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일제 치하에서 생활했던 식민지 조선의 백성들은 대부분 이 땅을 떠나셨다. 해방 이후에 태어난 세대는 식민지의 고통도 체감하지 못했다. 해방의 기쁨과 의미도 잘 알지 못한다. 오히려 친일과 반일의 대립적인 구조를 조장하는 정치권만이 8.15 광복절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어느 곳에서 광복절 노래를 부르며 기념식을 하는가. 정부 기관에서 하는 연례행사가 전부다. 아쉬움과 부끄러움으로 헐버트를 만났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미국인, Homer B. Hulbert를 공부하며 설움과 긍지와 아쉬움과 책임감이 복합적으로 솟아오른다.
역사의 격동기에 스스로 민족의 미래를 개척하지 못하고 주변 상황에 어두웠던 조선은 결국 열강의 침략을 받게 되었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많은 조선의 선각자와 지식인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제에 저항했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외국인도 있다. 그가 바로 헐버트이다. 그는 갑신정변 뒤 1886년 23살의 나이로 조선 최초의 근대식 관립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교사가 되기 위해 조선 땅을 밟았다. 그가 1907년 일제의 박해로 한국을 떠났지만 미국에서 38년간 한국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1949년 40년 만에 한국 땅을 다시 밟았지만 도착한지 1주일 만에 1949년 8월 5일 서거하고 말았다. 그는 평소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한 대로 마포나루 외국인 묘역 양화진에 잠들어 있다.
헐버트가 식민지 조선에 보여준 사랑과 박애정신은 세월이 지난 지금에 더욱 빛나고 있다. 우리 한국인은 헐버트를 더 많이 공부하고 그의 조선에 대한 헌신과 봉사 그리고 독립운동을 재조명해야 한다. 그는 훈민정음을 부활시킨 한글 전용의 선구자였으며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일지》를 출간했다. 조선인들도 꼭 알아야 할 보편적 지식을 담은 최초의 근대서적이었다. 또한 그는 YMCA를 탄생시킨 계몽주의자였으며, ‘명성황후시해사건’에 분노하며 일본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근대교육의 기초를 놓은 교육자였다. 그는 언론인으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국제사회에 호소한 언론 독립 운동가였다. 한글 맞춤법을 정비하고 공론화한 한글학자였다. 그는 한국 속담 123개를 한국어로, 영어로 발표한 한글학자였다. 고종황제는 헤이그 만국평화회 특사로 헐버트를 임명하였다. 이외에도 헐버트의 식민지 조선을 위한 노력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한국인이 헐버트의 이름을 잊고 살아갈 때도 그를 잊지 않고 연구하고 발굴하는 선각자가 있었다. 이 책의 저자인 김동진 님과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의 노력이 있었다. 자료를 발굴하고 책으로 엮으면서 그의 진면목을 알리는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헐버트 정신을 이어가는 일이다. 그의 후손들과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필요하면 국가 차원에서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진심어린 고마움을 전하는 일이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의 지속적인 노력과 우리의 작은 힘이 보태지기를 바란다.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참좋은친구
지은이 김동진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 호머 헐버트 (1863-1949) -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라난 나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을 위해 희생하고 비참과 억울함을 벗기기 위해서 노력한 대한외국인이다. 멋지고, 멋지다. 내가 알고 있는 짧은지식의 호머 헐버트를 설명하기에는 항상 누구에게 설명하기에 부족했다. 안중근도 인정한 대한외국인 (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 뤼순감옥에서(1909년 12월 2일) ) 이다. 내가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다. 한국을 위해서 조선을 위해서 이렇게 힘을 쓴 사람이 또 누가 있을가 어떠한 대가가 있어서 이렇게 남의 나라에 힘을 쏟고 묻히고 싶었을까 하는 생각을 다시한번 생각해 한다.
한글을 초특급으로 익히고 조선사람들이 한글을 무시한고 있음을 간파한다. 한글의 우수성을 우리보다 외국인이 먼저 깨달을 것이다. 그는 한글을 최초로 국제사회에 소개했고 역사상 최초로 한국의 뿌리를 찾은 사람이다. (한글, 만주문자, 티베트문자, 산크리스트문자 비교한 작성표가 있다. )
헐버트의 만남중 주시경과의 만남은 한글사의 조선의 비친 서광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독립신문의 서재필에게 주시경을 추천한것이 헐버트라고 추정한다고 한다. 내가 특히 눈에 띄는것은 띄어쓰기와 점찍기이다. 헐버트가 있기 전에도 사용한 흔적은 물론 있지만 정착하게 만든것은 맞는듯 한다.
"아펜젤러와 헐버트의 책임 아래(조선그리스도화보)를 언문으로 발행하였으며, 띄어쓰기를 실시했다. 우리는 한글 신문의 개척자 역활에 긍지를 느낀다" 라고 썼다. 독립신문 영문판은 헐버트가 편집자였기에 이 기사는 헐버트가 작성하였다고 여긴다. p163-164
헤이그 만국평화화의 특사 헐버트 1906년 대한제국 황제는 그에게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앞서 제반 분제의 사전 조율을 위한 특별권한을 부여하다. 그후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1907년에 특사로 임명하였다. 고종은 헐버트의 믿을 보여주는 특사증이 아닌가 싶다. 을미사변이 일어났을때도 고종의 곁을 지켜주었다고 하니 고종의 믿음과 신뢰가 높을수 받에 없다. 거기 개인 내탕금까지 맡겼다고 하니 어떻게 헐버트가 조선을 사랑하지 않았을까
" 역사에 꼭 기록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을 증언하겠다. 고종 황제는 결코 일본에 항복하지 않았다. 굴종하여 신성한 국체를 더럽히지도 않았다. 휜 적은 있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미국에 협조를 구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호소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유럽 열강에 밀서를 보냈으나 강제 퇴위당하여 전달되지 못했다. 그는 고립무원의 군주였다. 한민족 모두에게 호소한다. 황제가 보이신 불멸의 충의를 고이 간직하자." - 1942년 위싱턴 한인자유대회에서 연설내용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