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9년 10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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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36쪽 | 304g | 126*186*19mm |
ISBN13 | 9791185811994 |
ISBN10 | 1185811990 |
발행일 | 2019년 10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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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36쪽 | 304g | 126*186*19mm |
ISBN13 | 9791185811994 |
ISBN10 | 1185811990 |
저자의 말-거인과 난쟁이 1 착취의 진보 상대적 잉여가치 / 잉여가치를 늘리는 또 하나의 천재적 방법 / 경쟁의 강제법칙 / 추가 잉여가치 / 마르크스가 일일이 계산하는 이유 / 노동생산력 증대와 노동 단축은 별개 / 추가 잉여가치는 어디서 왔는가 / 강화된 노동 / 잉여노동은 기계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 착취의 진보 / 더 문명화하고 더 세련된 착취 2 ‘함께’의 착취 생산력을 높이는 두 가지 방법 / 작업방식과 기계의 변화 / ‘함께’의 효과 ①―평균노동의 실현 / ‘함께’의 효과 ②―생산수단의 절약 / ‘함께’의 효과 ③―추가 생산력의 창출 / 24개의 손을 가진 인간, 거인 노동자의 생산력 / 협업과 인간의 ‘유적 능력’ / 지휘자로서 자본가 / 위험한 진실 / 부르주아지가 원하지 않는 진실 / ‘함께’에 대한 배신 / 거인 노동자의 몫은 어디에? / 왕의 사업과 자본가의 사업 3 손이 된 인간-매뉴팩처의 노동자들 매뉴팩처, 손으로 하는 일 / 매뉴팩처의 두 가지 기본 형태 / 부분노동자, 손이 된 인간 / 500개의 망치―생산성 증대의 비밀 / 살아 있는 메커니즘 / 노동의 등급화와 자본가가 얻는 이득 4 사회적 분업과 매뉴팩처 분업 그리고 자본주의 매뉴팩처 시대의 학자 애덤 스미스 / ‘사회적 분업’의 두 가지 발생 형태 / 사회적 분업과 매뉴팩처의 분업 / 분업의 형태는 시대마다 다르다 / 자본의 부속물이 된 노동자 / 매뉴팩처 시대에 탄생한 학문 ①―산업보건학 / 매뉴팩처 시대에 탄생한 학문 ②―정치경제학 / 잉여가치 생산의 논리적 순서에 대한 오해 / 공장 밖을 서성이는 그림자 부록노트 I -도시와 농촌의 분리 II -마르크스의 인도론 III -아그리파의 우화 IV -과학적 관리법과 빨간 페터 |
‘북클럽 자본시리즈’ 제7권 [거인으로 일하고 난쟁이로 지불받다]는 마르크스 [자본] 1권의 제4편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 대해서 쓴 글 중 10장에서 12장까지의 읽기이다. 10장의 제목은 ‘상대적 잉여가치의 개념’이고, 11장은 ‘협업’ 그리고 12장은 ‘분업과 매뉴팩처’이다. 자본이 잉여가치를 늘리기 위해서는 노동일이나 노동인구를 늘려야했으나 한계에 이르자 새로운 길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상대적 잉여가치를 늘리는 방법이었다. 앞 권인 6권에서 절대적 잉여가치에 대해 설명한 저자 고병권은 7권과 8권에서 상대적 잉여가치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근대정치학은 두 종류의 인간을 상정한다. 집합적 통일체로의 인간과 그 구성원인 개별인간이 그것이다. 주권자라 불리는 집합적 통일체로서의 인간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로 거인에 비유된다. 반면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군주나 정부의 돌봄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나약한 존재로 흔히 난쟁이로 비유되곤 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자본가에 고용될 때도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노동자는 독립된 개인의 자격으로 고용되지만 작업이 시작되면 결합된 노동력을 이루어 거대한 시스템을 구성한다. 그러나 임금을 받을 때는 전체 시스템의 한 부분인 개인으로 다시 돌아온다. 상대적 잉여가치란 바로 이런 구조 속에서 생겨난다고 말한다.
생산물의 가치(w)=생산수단의 가치(c)+노동력의 가치(v)+잉여가치(m)이다. 그리고 노동일은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합이다. 잉여가치란 잉여노동이 대상화 된 것이며, 잉여가치율은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비율 즉 m/v이다. 따라서 잉여가치를 늘리기 위해서는 노동일을 늘리거나 고용을 늘려야 한다. (필요노동은 정해져 있기에 늘어난 시간만큼 잉여노동이 되거나, 고용의 증가로 잉여노동의 합이 커진다) 그러나 시간과 인구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자본은 새로운 길을 찾아냈는데 그것은 노동력의 가치하락을 통한 필요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이었다. 이처럼 노동일을 연장하거나 고용을 증가시키지 않고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의 비율을 바꿈으로써 얻어지는 잉여가치를 바로 상대적 잉여가치라 부른다. 이는 자본가가 그것을 염두에 두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 작업방식이나 노동수단을 혁신함으로써 경쟁업체보다 생산성을 높인다는 생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혁신은 생산량 증가로 자본가의 눈앞에 직접적인 이익을 준다. 마르크스는 생산량 증가분이 주는 잉여가치를 추가 잉여가치라 부른다. 상대적 잉여가치가 전체 가치 생산물중 자본가와 노동자가 가져가는 몫의 비율을 바꾼 것이라면, 추가 잉여가치는 자본가들 사이에서 이익의 재분배가 일어난 것이다. 흔히 자본가들은 잉여가치율대신 이윤율(m)을 따진다. 이윤율(m=w-k)은 생산물의 가치(w)에서 비용가격(k=c+v)을 뺀 것이다. 그럼에도 마르크스가 잉여가치를 따지는 것은 비용과 이윤만을 가지고 따질 때 노동과의 관계는 사라지고 이윤이 자본 스스로의 운동으로 창조된 것이라는 환상을 품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다시 말해 자본가가 원하는 것은 가치가 아니라 잉여가치이고 노동이 아니라 잉여노동이란 것을 이해한다면 이윤이나 이윤율을 사용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또 마르크스는 이런 노동생산력 증대를 강화된 노동으로 이해했다. 절대적 잉여가치는 연장된 노동의 형태를 취하고 상대적 잉여가치는 강화된 노동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자본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복리가 아니라 이윤만을 목적으로 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노동생산력을 증대함으로써 노동력가치의 상대적 비중을 줄이는 방법, 즉 상대적 잉여가치를 올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작업방식의 변화와 기계의 변화가 그것인데 저자는 작업방식의 변화가 이 책 7권의 주제라면 기계의 변화는 8권의 주제라고 말한다. 작업방식의 변화란 일정규모 이상의 노동자가 모여 ‘함께’ 일하는 것, 다시 말해 협업하는 것을 말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협업함으로써 자본가가 얻는 효과는 세 가지로 평균노동의 실현, 생산수단의 절약, 그리고 추가생산력의 창출이 그것이다. 이렇게 ‘함께’ 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마르크스는 전체노동자 혹은 결합노동자라 했고 저자는 거인노동자라 부른다. 그리고 거인의 노동력에 대한 임금은 개별 노동자들에게 지불되지 않고 자본가의 차지가 된다. 노동자 추가생산력의 크기는 거인노동자가 얼마나 온전한 형태로 출현 하는가 즉 노동자들이 얼마나 유기적으로 결합하느냐에 좌우된다. 마르크스는 이를 위해 자본가의 지휘가 필요하며 이 지휘는 최대한의 노동을 짜내 노동생산력을 증대코자 하기 때문에 착취이며 억압을 띨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공장의 자본가는 지휘자이자 진압봉을 든 경찰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협업은 언제나 자본주의적 생산약식의 기본 형태이며, 따라서 자본주의적 협업은 전통적 협업의 발전 형태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초기 자본주의의 생산방식은 매뉴팩처이다. 매뉴팩처는 생산과정에 기계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사람의 손이 주요한 노동수단이었다. 마르크스는 매뉴팩처가 두 가지 형태로 발생한다고 보았는데 하나는 서로 독립된 수공업 부문의 노동자를 하나의 작업장에 모으는 이종적 매뉴팩처이고, 다른 하나는 동일한 업종의 여러 수공업자를 한데 모은 유기적 매뉴팩처이다. 그리고 어떤 매뉴팩처가 되었든 간에 노동은 기본적으로 분업에 기초한 협업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분업은 노동자들의 노동이 부분노동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들을 부분노동자라 부른다. 그 결과 노동자는 독립성을 잃게 되고 그만큼 유능한 매뉴팩처 노동자, 즉 숙련공이 된다. 이는 노동자가 전체 생산 메커니즘의 한 기관으로 전락하여 기계가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한 가지 일밖에 하지 못하는 분업은 노동의 종류뿐만 아니라 등급의 분화를 촉진하고 노동의 가치하락에 기여하게 된다. 당시의 정치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이러한 매뉴팩처를 두고 사회적 분업이며 자연발생적인 분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사회적 분업이 독립된 다수 생산자를 전제로 한다면, 매뉴팩처 분업은 자본가에게 철저하게 예속된 부분노동자들 간의 협업이라며 매뉴팩처 분업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특유의 창조물이라고 강조하며 자본가들의 이중성을 비판한다. 결론적으로 매뉴팩처는 자본의 원리 내지 목적을 실현하는 방법 중 하나인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방법이라는 것이다. 착취사회에서는 진보도 이렇게 착취의 진보가 되고 만다.
부분노동자들이 숙련되어 갈수록 이들의 저항도 거세진다. 거인노동자는 언제든 믿음직한 일꾼에서 무서운 투사로 돌변하기도 한다. 공장은 자본가가 전적으로 지배하는 공간임에도 매뉴팩처 생산형태에서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자본가들은 또 다시 고민한다. 그때 작업장 밖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있다. 저자가 다음 권에서 다루는 상대적 잉여가치를 증대시키기 위한 두 번째 방법 기계이다. 기계는 어떤 식으로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릴까? 다음 권을 읽어야겠다.
<가내수공업에서 매뉴팩처 공장으로 노동자들은 일터를 옮겨갔다> (출처: 나무위키)
홉스는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만인의 주권을 한 사람(국왕)에게 위임하여 통치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만인은 각자를 위해서 투쟁적일 뿐이니 '정치전문가'인 국왕에게 주권을 일임하고 감시하는 역할로 물러나는 것이 국가를 위해 바람직하다며 초기 형태의 '사회계약론'을 주장했더랬다. 그런데 '매뉴팩처 시대'가 도래하면서 '거대공장'이 만들어지고 가내수공업에 머물러 있던 노동자를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듯 흡수하여, 마치 '한 사람의 거인'처럼 노동자들을 일사분란하게 일하도록 만들었다. 애덤 스미스가 지적했듯이 '분업'을 통해서 생산을 극대화 할 수 있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따로' 일을 하는 난쟁이 노동자가 아닌 '일사분란'하게 공동의 작업을 해내는 '거인 노동자'를 만들어낸 것이다.
일의 효율적인 면에서 '거인 노동자'의 탄생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대량 생산체제를 구축해서 소비자에게 더 많이, 더 싸게 '상품'을 공급할 수 있으니 대단한 효율인 셈이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자본가의 눈'으로 바라볼 때 그렇다. 노동자의 처지로 '거인 노동자'를 보았을 땐, '동일한 시간'을 일하며 생산량을 극대화하는 효율성을 낳았는데도 '임금'은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아무런 이득도 없는 '노동 방식'이었던 셈이다. 노동자는 별다른 생산효율성을 얻지 못하고 자본가의 배만 불려주는 이런 방식의 착취는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자본가들은 '이윤창출'을 위한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또 다른 잉여노동'을 찾아냈다. 이전의 '천재성'이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늘리는데 혈안이 되었다면, 이번의 '천재성'은 노동자의 '노동시간'은 건드리지도 않고 '잉여가치'를 창출해내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말하자면, 노동자의 노동시간은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으로 나눌 수 있다. '필요노동시간'은 노동자가 받는 임금만큼의 생산을 한 시간이고, '잉여노동시간'은 노동자가 받는 임금을 초과한 만큼의 생산을 한 시간이다. 이를 더 쉽게 표현하면, '필요노동시간'은 자본가가 본전을 챙긴 노동시간이고, '잉여노동시간'은 자본가가 착취로 챙긴 노동시간이란 말이다.
그래서 자본가는 '잉여노동시간'을 최대한으로 늘리기 위해서 노동자들의 건강이나 복지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하루 16시간이고, 20시간이고, 필요하다면 연장근무를 통해서 40시간까지도 '합법적 노동시간'으로 만들어서 '잉여노동'을 늘려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체 노동시간'을 늘리지 않고도 '필요노동시간'은 줄이고, '잉여노동시간'을 늘리는 천재적인 발상을 해낸 것이다. 바로 일사분란하게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거인 노동자'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노동의 전부'가 아닌 '부분 노동'을 시키려 한다. 왜냐면 '분업'을 해야만 노동생산성이 훨씬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인 노동자들은 '전체의 공정'으로 나누어서 각자의 분업을 특화해서 할 뿐이다. 하나의 바늘을 만들기 위해 '철사를 자르는 사람'은 자르는 작업만, '구멍을 뚫는 사람'은 뚫는 작업만, '뾰족하게 가는 사람'은 가는 작업만 하게 된다. 이렇게 한 가지 작업에만 오랜 시간 하다보면 '신체가 특수하게 변해 버린 사람'이 된다. 쉽게 말해, '가위질을 잘 하는 노동자', '망치질을 잘하는 노동자', '숫돌을 잘 돌리는 노동자'로 점점 변하고 만다. 자신이 맡은 공정은 누구보다 잘하는 '전문가'가 되지만 다른 공정의 작업을 할 수가 없는 '불구'가 되고 마는 것이다.
단순 반복을 위한 작업에 특화된 '신체변형 노동자'가 되어 버린 뒤에는 노동의 보람이나 즐거움 따위는 느낄 수 없게 된다. 한마디로 '노동의 가치'가 현저히 떨어져 버리고 만다. 커다란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노동자의 삶은 어떻게 될까. 하루가 다르게 피폐해지고 빠른 속도로 건강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더구나 힘들게 노동한 대가인 '임금' 또한 형편없다. 빈곤에 빠진 노동자계층은 어느새 자본가들이 마련해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안달이 난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니, '안달'이 아니라 '생존'일 것이다. 지금 일하고 있는 노동자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고도 열심히 일하겠다고 다짐을 하는 열악한 환경에 처해버린 노동환경이 자본가의 거대한 공장 '매뉴팩처'를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여기에 자본가들이 돈을 버는 길은 '상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원하는 것은 '비싼 상품'이 아니라 '많은 이윤'인 탓에 상품을 '고가'에 파는 것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자본가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고부가가치', 다른 말로 '고잉여가치'였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값싼 상품을 마구 만들어내는 '값싼 노동력'이 뒷받침이 되어야 했으며, 더 많고 더 넓은 시장의 확대가 중요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기계'를 도입하는 것이 노동자들의 일손을 덜어주고, 안락한 노동환경을 보장해주지 않았다. 자본가들은 '새로운 기계'를 도입하면서도 '노동강도'는 절대 낮출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아무리 힘든 노동자들을 생각하며 '혁신적인 기계'를 내놓는다고 해도 자본가들은 이런 기대를 허물어뜨리고 '고잉여가치'를 위해서 박차를 가할 뿐이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은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지취자 역할'만 맡는다. 이를 테면, 양계장 주인은 암탉의 달걀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방법을 고려하며 24시간 '백열등'을 켜놓는 것 대신에 '적색 LED등'으로 교체하는 것에 머뭇거리지 않지만, 늘어난 달걀 생산량만큼 지치고 힘들 암탉의 건강증진을 위한 고민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왜냐면 양계장 주인은 달걀을 직접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백열등'일 때보다 '적색 LED등'으로 교체하면 한 달에 약 8000만 원의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결과를 보면 더욱더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자본가는 거인 노동자의 협업을 지휘하면서 '함께' 노동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우리가 CEO라고 부르는 이들의 평균 연봉은 일반 노동자들의 약 40배나 된단다. 삼성전자의 경우에는 그 격차가 200배가 넘었고, 미국의 기업은 무려 270배 이상일 정도였다고 한다. 노동자간의 임금 차이는 그에 비하면 '새 발의 피'보다 훨씬 적었던 것을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업에서 일을 한 사람은 누구일까? 노동자일까? 아님 CEO일까? 물론 CEO도 기업을 운영하는 일을 한다. 그런데 기업을 운영하는 일이 '전체 이득의 대부분'을 가져도 될 정도의 가치가 있는 걸까? 과연 CEO의 몫은 정당한 걸까? 혹시 '거인 노동자의 몫'을 공평하게 나누어주지 않고 독차지한 것은 아닐까? 마르크스는 이를 두고 '거인으로 일하고 난쟁이로 지불받는다'고 표현했다.
《거인으로 일하고 난쟁이로 지불 받다》
강연 및 독서 후기
[북클럽 ‘자본’ 시리즈] 제7권
고병권 지음 | [천년의상상]
마르크스 - 거인의 출현을 알아보다
19세기 자연주의 소설의 효시가 된 작가 에밀 졸라는 《목로주점》에서 유럽 모더니티의 도시 파리에 거주하는 하층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인구 이동의 양상은 농촌 지역의 인력이 도시로 몰려드는 현상이었다. 소설의 주인공 제르베즈는 시골에서 미혼모로 두 아이를 낳아 연인 랑티에와 파리로 상경한 여인이다. 랑티에는 바람을 피우고 제르베즈를 버린다. 아이들과 남게 된 제르베즈는 세탁부가 되어 열심히 일하며 아이를 키우기 시작하지만, 도시는 홀로된 젊은 여인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함석공 쿠포의 끈질긴 구애로 결혼을 하게된 제르베즈는 이웃집 청년 구제의 짝사랑이기도 하다. 소설의 내용은 여기서 그만 얘기하고, 소설의 배경이 되는 현실이 흥미롭다. 에밀 졸라가 이 소설에서 묘사한 시대는 공장의 기계화가 진행되기 시작한 정황을 담았다. 공장에는 ‘거대한 기계’가 도입되어 노동자들은 해고당하기도 하며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하던 상황이었다. 공장의 생산 과정에 기계가 도입되어 발생하는 노동자의 소외 현상을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다. 기계의 도입에 따른 노동자의 대량 해고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노동자들이 기계의 출현에 위협을 느끼던 분위기를 고스란히 살펴볼 수 있는 것다. 소설의 어느 장면에서는 숙련공 구제가 기계와 경쟁을 벌여 승리하는 대목이 나온다. 내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인간의 ‘승리’가 아니라 ‘근소한 차이’였다는 점이다. 잠깐 동안의 대결에서 인간이 기계보다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피곤을 모르는 기계 앞에 언제나 월등한 결과물을 생산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인간이 승리한 경쟁이었지만 석연치 않은 승리였던 것이다.
상품 생산과정의 분업화로 ‘달인’이 된 이들 숙련공들은 기계의 도입으로 해고당하면 무용한 존재로 전락한다. 이번 책 《거인으로 일하고 난쟁이로 지불 받다》의 저자 고병권 선생의 표현에 따르면 한 가지 일에 익숙해진 숙련노동자들은 직장을 떠나면 ‘존재적 변형’을 경험하게 된다. 무기력하고 소외된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한편 소설 《목로주점》에서는 극심한 가난 속에서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우울증에 다름없는 무기력증에 빠져버린 제르베르를 비롯한 주인공들은 돈을 버는 대로 모두 맛있는 음식과 술로 배를 채우며 삶을 소진하고 그렇게 살다가 사라지는 존재로 그려진다. 사회의 부품과도 같은 존재로서 살아가는 도시 하층민의 삶은 자본가가 지배하는 삶의 양식으로부터 누구도 자유롭지 못했다. 작가 에밀 졸라는 이러한 도시 하층민의 일상과 이들이 처한 암울한 상황을 세심하게 소설에 담아냈. 바로 이 시대상이 아마도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주목하고 있는 현실과 부합할 것 같다.
【자본가의 갈망과 절대적/상대적 잉여 가치에 대해】
이번 일곱 번 째 도서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노동일’과 관련되어 있다. 노동일은 지난 6권을 떠올려보면, ‘하루 노동시간’을 의미하며, ‘필요노동시간’ + ‘잉여노동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시간, 곧 노동일을 연장하여 더 많은 잉여수익을 얻으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 노동자에겐 물리적, 생물학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노동자는 하루 24시간 이상 일할 수 없으며, 생명을 가진 존재이기에 휴식과 수면, 영양 섭취, 화장실 이용 등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활동으로 실제 노동일은 더욱 짧아질 수밖에 없다. 자본가의 욕망 추구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자본가가 노동일(혹은 잉여노동)을 연장하여 잉여가치를 얻으려는 노력은 곧바로 제약에 부딪히게 된다.
이런 제약 조건 속에서 자본가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잉여노동을 늘리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은 필요노동 시간을 줄여 잉여노동시간 분을 많이 확보하는 길이 있다. 여기서 필요노동시간을 줄인다는 말은 ‘노동력의 가치’를 줄인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이 가능한 경우는 여러 산업 부분에서 ‘생산성 혁신’을 통해 동일한 노동시간에도 더 많은 상품들을 만들어 내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면 노동시간을 강제로 늘려 얻는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대신,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려 실질적인 필요노동 시간의 여분을 줄임으로써 추가적인 잉여분을 자본가가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이러한 잉여분의 가치를 ‘상대적 잉여가치’라고 마르크스는 언급했다. 여기서 중요한 조건은 ‘여러 산업 분야에서 생산력이 크게 증가해야’한다는 전제다. 그래야 생활수단의 가치(예: 노동자들의 생활 필수품 가격)가 떨어지게 되어 노동력의 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개념의 구체적 사례로 마르크스는 특별잉여가치(혹은 추가잉여가치)를 제시한다. 마르크스가 제시하는 특별잉여가치는 ‘특정 기업의 노동생산력이 평균에 비해 월등히 높을 경우 해당 자본가가 추가로 얻는 잉여가치’를 의미한다. 마르크스가 가정하고 있는 자본가는 사업을 통해 사회에 이익이 되는 활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의 사업은 본질적으로 공익의 목적이란 없거나 2차적인 목적일 뿐이다. 자본가에겐 우선 이윤이 생겨야 계속 사업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가는 자신의 이익을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이란 전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물론 자본가들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사업을 해나가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문제 중 하나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임금격차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의 책 《죽음의 밥상》에서 피터 싱어는 우리의 먹거리의 윤리학을 이야기한다. 여기에 더하여 기업의 윤리를 짧게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월마트의 사례를 들고 있다. 2003년 현재, 월마트의 CEO인 리스콧의 연봉은 기본급 보너스, 스톡 옵션을 포함하여 1740만 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지금은 10년이 지났지만, 현재 환율로 계산해보면 200억이 넘는 연봉을 받은 것이다. 당시 월마트에서 일하는 풀타임 정규직 조합원의 연봉이 1만 8천달러 수준이었다고 하니, 연봉 격차는 960배를 넘고 있다. 이 책의 1부와 2부 끝에서 각각 언급하는 월마트의 사례를 통해 싱어는 월마트의 저렴한 상품 가격이 ‘다른 누군가에게 비용을 전가한 결과일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하기도 한다. 우리의 경우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대기업에 부품 혹은 물품을 공급하는 중소기업의 공급업자들은 대기업의 비용절감 전략의 대상이 된다. 월마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말하는 갑의 횡포는 월마트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특히 월마트는 노조를 배제했었고, 4인 가족의 조합원이 이 연봉으로는 빈곤선 이하의 기준이었다. 2005년 기록에서 월마트 종업원 자녀의 거의 절반이 건강보험에도 들어있지 않거나 국가 의료보조를 받는다고 했다. 이를 버지니아 유뱅크스의 저작 《자동화된 불평등》에 소개된 현실을 떠올려보자면, 국가의 금전적 지원을 받는 수혜 대상자에겐 사생활의 노출과 엄격한 규정의 준수를 강요 받는 상황으로 이들에게 되돌아오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피터 싱어는 자신의 저서에서 월마트에서 음식을 사 먹는 일도 상당한 ‘윤리적 문제’를 내포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강화된 노동과 착취의 진보, 그리고 거인 노동자의 탄생】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 노동자의 노동일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특히 노동법이 제정되기 전의 19세기에는 나이 어린 노동자들을 포함하여 15시간 이상 노동을 해야 했다고 한다. 마르크스가 《자본》을 출간한 1800년대 후반에는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10시간 정도 언급했다고 한다. 현재 우리는 8시간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니 좀더 줄은 셈이다. 이처럼 생물학적 존재로서 노동자들은 노동일을 연장하는데 한계가 있다. 대신 자본가들은 노동의 강도를 높여 노동 생산력을 높이고자 한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채플린은 컨베이어 벨트 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나온다. 채플린은 연장을 들고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나사를 조이며 이 작업을 무한 반복하고 있다. 그는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 컨베이어 벨트의 속력이 빨라진다. 노동의 강도가 빨라지는 것이다.
영화에선 한 개인 노동자로서 노동강도가 증가하여 노동 생산력을 증가하는 상황을 보여주었지만, 여러 노동자들이 ‘함께’ 일함으로써 추가 생산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하나의 완성된 상품을 만들어내는데 더 많은 사람들을 투입하면 노동의 세분화가 이루어진다. 개별 노동자가 모여 하나의 상품을 만드는데 ‘거대한 노동자’가 되어 상품 생산에 추가적인 효율을 발휘하게 된다. 추가 생산력을 통해 추가적인 잉여를 만들어내지만, 이 추가 잉여가 노동자들에게 지불되는 일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번 책에서 눈 여겨 보아야할 지점은 마르크스가 주목했던 바로 이런 지점들이 아닐까. 이번 책의 제목인 ‘거인으로 일하고 난쟁이로 지불받다’는 표현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서 드러나고 있다.
개별 노동자가 거대한 ‘전체 노동자’의 일부로서 부품화되는 것이다. 업무의 세분화에 있어서 끝판왕은 소련식 테크노크라시의 사례일 것 같다. 미국의 역사학자 로렌 그레이엄은 자신의 저서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에서 스탈린의 집권 이후 우리가 ‘인문학’이라고 부르는 교양 교육이 사라져버렸다고 진단한다. 그레이엄 교수가 만난 소련 엔지니어 중에는 ‘제지 공장용 볼 베어링’ 전공으로 학위를 받은 이가 있었다. 그러니까 같은(특정) 기계의 동력 파트나 다른 부품에는 세분화된 다른 학위가 주어지는 것이다. 저자가 인용한 기록에는 이런 내용도 보인다.
“경공업 위원회는 기계 종류별로 압축기를 담당하는 엔지니어링 전공을 만들었다. 중공업 위원회는 유성 페인트와 비유성 페인트를 다루는 엔지니어를 위한 별도 과정이 필요하다고 고집했다. 농업 위원회는 개별 농작물을 담당하는 농학자, 개별 동물을 다루는 수의사를 키워냈다.”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124면
또 다른 기록도 보인다.
“소련 엔지니어링 교육에서 전공 분야가 급증했던 것은 전통 엔지니어링 분야를 끊임없이 세분했기 때문이었다. 즉 기계공학은 관련 전공 수십 개로 나뉘게 되어, 심지어 농기계, 공작기계, 주조 설비, 자동차, 트랙터, 비행기 엔진 등 세부 전공이 생겨났다. 금속공학에서는 구리와 합금을 다루는 전문가를 따로 양성했고, (…) 엔지니어링 파편화는 이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124면
서양의 과학사가들이 평가하듯 구 소련의 지나치게 세분화한 전공 및 엔지니어 양성은 전체의 일부로서만 기능하는 인력을 양성했다. 중앙 정부에서 어떤 일이나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구성원들은 아무런 의문이나 개선의 여지 없이 자신이 맡은 업무만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모습들은 과도한 전체주의 혹은 독재체제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출간된 《북클럽 자본》제7권의 중심 화두는 노동자들이 모여 협업을 하면서 도출되는 ‘전체 노동자’ 혹은 ‘거인 노동자’의 존재가 될 것이다. 이 다수의 노동자들이 모인 ‘거인 노동자’는 단순히 개별 노동자들의 수가 더해진 산술적인 결과만이 아니라 무언가 놀라운 일들을 더하여 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별적인 인간은 ‘사회적 인간’, 다시 말하면 인격이 축소된 ‘평균적인 노동자’로서 파악되는 인간으로 특정된다. 책의 후반에서는 매뉴팩처의 분업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이어간다. 채플린의 영화처럼 개별 노동자는 전체 공정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그저 눈 앞의 일만을 전체 공정의 리듬에 맞춰 처리해내야 한다. 따라서 평생 한 가지 기능을 해내는 ‘숙련노동자’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 이 매뉴팩처 분업 시기부터라고 한다. 이런 여건에 우리 몸이 맞추어져 신체의 변형이 일어나고 직업병이 발생하는 것도 바로 이 시기부터라고 볼 수 있다. 개별 노동자는 거인 노동자의 일부로서 주어진 기능만을 담당할 뿐, 여기에 새로운 생각이나 의견을 가질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결국 이 상황은 노동자들의 존재, 노동자들의 몸이 자본가의 부속물이 되어버린다는 점을 마르크스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특히 마르크스는 이런 양상이 노동생산력의 혁신으로 자본가는 추가 잉여를 더 얻게 된다는 점과 맞물려 있음을 중요하게 지적한다. 앞서 언급했지만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하고, 현상을 파악하는 모습이 바로 마르크스가 많은 후대사람들에게 여전히 놀라움을 안겨주는 이유가 될 것이다. 《자본》을 썼던 마르크스가 어떻게 사회를 바라보았는지 책을 읽으면서 점점 알게 되고, 동시에 놀라움도 더해간다. 사회 현상에 대한 명민한 관찰이 몇 군데 저서에 드러나는 경우는 많지만, 책 전반을 통해 자신이 파악한 현상 이면의 양상,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책을 통해 이렇게 유기적이고 치밀하게 담아 놓을 수 있었을까 놀라게 된다. 마르크스의 사상에 동의하는지의 여부는 부차적인 문제다.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을 진지하게 파악해보지 않고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단순히 지적으로 게으른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오늘날 《자본》을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지를 새롭게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