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는 내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았다. 그러나 설산에 대한 동경으로 찾은 히말라야에는 ‘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로 솟아오른 은빛 설산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보석처럼 빛나는 그들에게 깊이 매료되었다.
산을 좋아하는 여자에게 결혼은 산과의 이별을 뜻하기도 한다. 일에 쫓기고, 가정을 돌보고, 자녀를 양육하느라 환승이별을 하는 것이다. 나 역시 결혼과 동시에 자유로운 청춘의 시간이 끝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불안에 대한 반항으로 히말라야 횡단을 선택했다.
히말라야로 신혼여행을 간다고 하자 친구들은 나를 미쳤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결혼선물로 야한 속옷이 아닌 등산 장비를 준비한 건 처음이라며 트레킹에 필요한 물품과 에너지 겔을 보내왔다.
포터 딥은 무딘 바늘을 들고 등산화를, 인드라는 손가락이 다 터진 장갑을 꿰매느라 진땀을 뺀다. 나는 재빨리 방으로 달려가 등산화 수선용 본드를 딥에게 건넸다. 인드라는 자신이 꿰맬 수 있다며 나의 호의를 사양하지만, 나는 거의 뺏다시피 하여 장갑을 가져와 꿰맨다. 그런 나를 본 띠르떼는 가랑이가 찢어진 바지가 창피했는지 얼른 감추지만, 이번에도 나는 바지를 강탈해와 바느질을 한다. 다행히 나의 바느질 솜씨는 재봉틀 못지않게 괜찮은 편이라서 모두 만족해한다.
정오가 되자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온다. 바람에 춤추듯 잘 말라가는 빨래와 함께 암비카는 마당에 누워 달콤한 낮잠을 즐기고, 다른 포터들은 해바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우리와 함께 팡페마에 다녀온 허줄아마 꾸꾸르도 고단했는지 낮잠을 자느라 움직이지 않는다.
포터들은 추위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옷가지 하나 없는 남루한 차림이다. 트레커들이 신고 있는 튼튼한 등산화는 꿈도 못 꾼다. 그들에게 신발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늘 슬리퍼가 대신한다. 등산양말 한 켤레는커녕 얇은 양말마저도 없는 이들이 많다. 먹는 것 또한 넉넉지 않다. 알량한 돈 몇 푼으로 무거운 짐을 지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포터 일에 기대어 생계를 이어가는 것을 알기에 늘 그들과 함께 했다.
쭈레와 나는 러셀을 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타오는 포터들의 뒤를 봐주며 짐을 고쳐 메는 포터들을 돕는다. 우리는 부실한 중국제 얇은 천운동화를 신은 포터들의 신발이 젖지 않도록 촘촘히 눈을 다지며 길을 낸다. 허리까지 빠질 정도로 깊게 눈이 쌓여 있는 이곳에서의 러셀은 듬성듬성 길을 내는 것보다 몇 배로 힘이 들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하지만 나의 작은 노력으로 포터들의 수고로움을 덜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신기하게도 힘이 솟는다.
경사가 급한 탓에 포터들은 선 채로 휴식을 취한다. 가네쉬에게 약간의 간식을 건네자 그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동료들을 부른다. 혼자 먹어도 턱없이 부족한 양을 나눠먹는 것이다. 외떨어진 오지에 와서 힘든 길을 함께 걷는 처지다 보니 그들은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
삶은 도전의 연속이다. 엄마 뱃속을 나오는 것부터 걸음마를 배우고, 입학을 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고, 결혼을 하고…. 모든 것에는 처음이 존재하고, 그것은 도전이다. 도전에는 두려움이 따른다. 하지만 막상 해보면 별것이 아닌 일도 있고, 하다 보면 두려움이 줄어드는 경우도 있다. 두려움의 반대말은 용기다. 용기는 사용할수록 강해지며, 용기를 낼 수 있게 하는 것은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나는 용기를 가지고 두려움에서 도망치지 않는 사람만이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포터들은 닷새 분의 식량을 짊어지고도 지친 기색 없이 거친 바위산을 다람쥐처럼 오른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묘하게도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이런 고통이 좋다. 몸은 숨이 차 죽겠으니 그만 걸으라고 신호를 보내는데, 기분은 걸을수록 좋아진다. 아마도 달리기 애호가들이 느낀다는 러너스 하이와 비슷한 도취감이 아닐까 싶다.
링반데룽이다! ‘환상방황’으로 불리는 링반데룽은 악천후 속에 방향감각을 잃고 계속 같은 지점을 맴도는 것이다. 두 시간 가까이 어둠 속을 헤맨 쭈레의 모습은 모골이 송연하다. 눈 속에 주저앉은 그는 탈진 직전이고, 정신이 반쯤 나간 것처럼 보인다.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막막한 상황에서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쭈레에게 바룬체 베이스캠프의 방향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힘겹게 손을 들어 어둠 속을 가리킨다. 그가 가리킨 곳은 사방이 크레바스로 둘러싸인 빙하 끝 낭떠러지였다.
우리가 그곳에서 잔다면 그들은 거적때기 하나 없이 맨몸으로 밤을 보내야 한다. 그들을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우리는 침낭이 있으니 밖에서 자기로 하고 스태프들을 키친 텐트 속에 들어가도록 했다. 그래봤자 겨우 바람만 막은 채 밤을 보내야 하는 처지였다. 모두들 지쳐있었지만, 특히 람의 상태가 좋지 않다. 그는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양말을 벗어던진 채 초점 없는 눈으로 앉아있다. 흘러내리는 콧물을 닦아주는 나의 손짓에도 반응이 없다. 저체온증이다. 그의 체온을 올리기 위해 스태프들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모두들 그를 부둥켜안는다.
나 역시 침낭을 덮고 얼어붙은 몸을 녹이려 애쓴다. 추위에 곱은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고, 발가락은 아무리 옴죽거려도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곳에서 해가 뜰 때까지 배고픔과 추위, 암흑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견뎌내야 한다. 아니, 우리의 목숨은 히말라야 여신의 손에 달려 있다.
어느새 하늘에는 밝은 달빛 아래 하나둘 떠오른 별들이 예쁘게 수놓아져 있다. 밤하늘의 숱한 별들을 바라보자 울컥 설움이 복받치며 울음이 터져 나온다. 불안함과 두려움, 죄책감.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한 데 뒤섞여 나를 짓누른다.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앙탄하며 히말라야가 떠나가라 울기 시작했다. 스태프들은 내 마음을 이해하는 듯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그들 역시 집에 있는 가족을 그리며 숨죽여 울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에이전시 사장에게 끔찍한 밤을 보내게 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속에 원망이나 복수심은 남아있지 않다. 아무도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이 그저 감사할 뿐이다. 문득 히말라야의 신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준 이유는 복수가 아닌 용서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하기로 했다. 용서하기로 했다. 그러자 마음은 행복으로 가득 찼다.
로체 위로 꽃구름 한 송이가 피어올랐다. 여러 가지 빛깔을 띤 꽃구름은 우리와 닮았다. 생김도, 성격도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우리는 하나였다. 쉴 새 없이 몰아치던 눈보라도, 모질었던 추위도, 육신이 사그라지는 고통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했다.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일수록 더욱 똘똘 뭉쳐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마치 꽃구름 한 송이처럼.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