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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업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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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답고 사나운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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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11월 22일
쪽수, 무게, 크기 544쪽 | 610g | 140*210*28mm
ISBN13 9788965709343
ISBN10 8965709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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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무척 사랑한 사람이 있었단다. 한때 그는 내 삶의 가장 큰 기쁨이자 또 슬픔이었지. 그 기쁨과 슬픔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 그것을 얻든 잃든 오롯이 나 혼자 감당해야 했단다. 그러나 또 다른 얻음과 잃음은 나 혼자만의 기쁨과 슬픔보다 훨씬 깊고 중하며, 살아 있는 한 거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었지. 그것은 바로 가문의 영예와 책임이었어.”
가문의 영예와 책임.
낯선 글자는 하나도 없었지만 마치 처음 듣는 말인 듯 생소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치 커다란 장도리가 가슴 한복판을 사정없이 내리친 듯 커다란 울림이 오래도록 퍼져 나갔다.
고모의 눈 속에는 투명한 눈물이 빛났지만, 그 눈빛 아래서 서릿발 같은 결연함과 단호함이 빛났다.
--- p.57

소기의 눈빛은 그의 검광보다 더 날카로웠다.
나는 그를 제대로 보려고 애썼지만 갑자기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3년 만의 첫 만남이 하필 이런 식이라니… …. 지금 그는 나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을까? 왕비? 아내? 아니면 그저 장기짝… …? 이런 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뜻에 내 생사가 달려 있을 따름이었다.
네 개의 눈동자가 얽히는 순간, 차마 다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말이 침묵이 되어 돌아왔다.
하란잠은 서슬이 퍼런 비수를 내 목에 가져다 댔다.
소기 뒤에 있는 궁수는 진즉에 활시위를 팽팽히 당기고 있었다.
“왕비… ….” 은갑을 입은 장군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으나, 그마저도 소기가 손을 들어 막았다.
--- p.176

“당신, 고개 돌려요!” 부끄러움에 머리가 하얘질 지경이었지만, 아무리 힘을 줘도 그에게 붙들린 두 손을 빼낼 수가 없었다.
그가 한 손으로 나를 끌어안더니 다른 손으로 고약을 집어 들었다.
“계속 바동거리면 옷을 다 벗기고 약을 바를 수밖에 없소.”
그는 스스로 내뱉은 말은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 분명했기에 나는 더 이상 바동거리지 못하고 입술만 꽉 깨물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고약을 덜어내 내 어깨와 손목 상처에 꼼꼼히 발랐다. 상처는 이미 아물어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이 내 살결을 오가며 가만가만 고약을 펴 바르니 자꾸만 간질간질한 느낌이 이는데… … 어째서인지 소기가 웃음을 머금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녀들이 약을 바를 때는 이처럼 귀찮게 굴지 않았다. 이제 보니 소기가 일부러 나를 놀리는 것이었다.
그를 쏘아보면서도 기가 차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몹시 의미심장하게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토록 사나우니… … 잘됐군. 무장의 아내가 될 운명이었겠소.”
--- p.203

시든 꽃은 미인처럼 박명(薄命)했다.
팔자를 잘못 타고났고, 길을 잘못 택했고, 사람을 잘못 만났다.
팔자를 잘못 타고나도 운명에 순응하고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며 일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다. 가장 가엾은 것은 두 가지 경우다. 하나는 품은 뜻은 높지만 타고난 팔자가 더없이 기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걸음마다 가시밭길이 펼쳐져 뚫고 나가지 못하면 그 자리에 갇혀 죽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 p.238

“이런 장수의 재목을 썩혀야 하다니, 당신이 여인인 것이 애석할 따름이오.”
“만약 여인이 아니었다면 어찌 당신과 만날 수 있었겠어요?” 나는 뒤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당신이 이처럼 허장성세를 꾸미는데 당연히 미심쩍겠지요. 건녕왕이 신중하게 우리 군을 정탐한 지 여러 날이 지났으니 이제 곧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낼 거예요.”
--- p.375

“소년 시절의 꿈은 이미 이루고도 남았다. 겨우 집금오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번왕의 지위도 그의 웅대한 포부를 잡아맬 수는 없을 것이다.
타는 듯한 그의 눈빛에 나는 잠시 불안을 느꼈으나 이내 미소를 머금고 탄식했다. “광렬황후(光烈皇后, 광무제의 두 번째 황후, 음려화)도 광무황제를 따를 수 있었으니 그 인생이 헛되지 않았지요. 그 옛날, 미녀를 데리고 천하를 평정한 영웅의 삶은 얼마나 통쾌했겠어요?”
소기가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이번 원정에 당신이 함께해주니, 이 사실을 광무황제가 안다면 그 또한 나를 시기할 것이오!”
눈앞에는 도도한 강물이 흐르고 드넓은 천지가 펼쳐져 있었으나, 그의 눈에 담긴 호기는 이 장엄하고 화려한 강산조차 숨을 죽이게 만들었다.
--- p.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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