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문학의 시작 《나목》, 만화로 되살아나다
소설가 박완서의 데뷔작 《나목》이 만화가 김금숙의 그래픽노블로 출간되었다. 김금숙 작가는 꼼꼼한 취재와 작품 탐구를 바탕으로 1950년대 서울 명동 거리와 미8군 PX, 계동 골목을 이미지로 재현했으며, 현대적 감각을 입힌 인물 캐릭터를 선보인다. 1970년 발표된 우리 문학의 숨은 걸작 《나목》을 새로운 세대의 독자들에게 환기하고, 전쟁의 이면을 예술가의 시각으로 보고자 하는 기획의도를 인정받아 만화영상진흥원 2019 다양성만화제작지원 사업에 선정되었으며, 그 결과물이 책으로 나왔다.
박완서는 1970년 〈여성동아〉 공모전에 장편소설 《나목》이 당선되어 등단한 이후 2011년 작고하기까지 수많은 작품을 통해 다양한 삶의 단면과 인간의 내면을 따스한 시선으로 그려냈다. 대중의 사랑을 폭넓게 받았으며, 특히 작가의 작가로 불릴 만큼 많은 후배 작가들의 존경을 받았다. 박완서의 소설은 지금도 미술, 연극, 만화 등 다양한 형식으로 재현되고 있다.
작가가 남다른 애정을 가졌던 작품으로 알려진 《나목》이 다른 장르로 재창작된 것은 첫 시도이다. 《나목》은 1950년대 전쟁으로 황폐한 수도 서울을 배경으로, 과거의 상처를 딛고 희망의 윤곽을 그리려는 젊은 세대의 고뇌를 치밀하게 그린 작품이다. 역사 상황과 개인의 실존이 어떻게 만나는가에 대한 문학적 탐구는 한국전쟁 70주년을 맞는 현재에도 여전히 주효하다. 또한 여성 주체성을 치열하게 탐구한 작가의식은 작품 발표 후 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되새기고 또 뛰어넘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만화가 김금숙은 소설 《나목》의 등장인물들이 말을 걸어왔다고 전한다. 《나목》에는 오빠가 죽은 것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느끼며 살아가는 주인공, 죽은 두 아들의 환영에 사로잡혀 사는 어머니, 진정한 예술가가 되기를 원하면서도 미군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살아가는 화가, 미군부대에 기대어 살아가는 다양한 주변인물 등 전쟁이라는 상황이 만들어 낸 인간 군상이 잘 그려져 있다. 특히 삶의 전선에서 외롭게 싸우며 끊임없이 예술가로서의 실존을 증명해 보이려 했던 화가의 고뇌는 만화가 자신에게 큰 영감을 불어넣었고, 작화에 착수한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 70주년, 새롭게 주목해야 할 역사와 문학
만화 《나목》은 모두 9화로 구성되어 있으며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덧붙여져 있다. 그중 프롤로그는 소설가 박완서가 박수근 화백 유작전 소식을 듣고 과거를 회상하는 에피소드이다. 소설 《나목》의 탄생을 보여주는 장면이자, 원작자에게 보내는 만화가의 ‘헌사’와도 같은 부분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원작에 묘사된 대로 1951년 서울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1.4후퇴로 밀려났던 유엔군이 3.8선을 회복한 그해, 서울에는 전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고 사람들은 공포와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틴다.
피난 대열에 끼지 않고 엄마와 함께 남은 스무 살 경아는 학업을 중단한 채 미군 PX에서 일하고 있다. PX에는 미군을 상대로 여러 가지 물품을 팔고 관계를 맺으며 생계를 이어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경아가 일하는 초상화 상점의 주인 최 사장은 미군에게 그림을 주문받아 파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가난한 화가들을 먹여 살린다는 자부심으로 가득 찬 장사꾼이다. 다이애나김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미군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잡화점 매니저이며, 황태수는 사다리도 제대로 못 올라타는 겁 많은 전기공이다. 모두는 전쟁 중에도 식구들을 먹이고 입히며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경아는 그곳에서 최 사장이 데려온 화가 옥희도와 만난다. 다른 화가들처럼 간판장이도 칠쟁이도 아닌, ‘그냥 화가’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옥희도에게 경아는 강한 끌림을 느낀다. 비록 남루한 현실에 찌들어 있지만 예술가로서 자신의 실존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화가 옥희도의 등장은 경아의 삶에 조용히 파동을 일으킨다.
경아의 마음속에 일어난 작은 불씨와 예술가로서의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픈 옥희도의 욕망을 확인한 어느 날, 두 사람은 비로소 둘 사이에 놓인 간극을 바라본다. 옥희도가 화가의 자리로 떠나버리고 난 뒤 경아의 헛헛한 마음을 파고든 것은 미군 맥스의 농간이었다. 경아는 답답한 현실을 벗고 스스로 시험대에 오르기 위해 맥스가 기다리는 호텔로 찾아가는데, 맥스와의 정사는 뜻밖에도 경아의 기억 저편 사라져 있던 두 오빠의 죽음을 불러낸다.
경아의 기억은 전쟁이 터진 1년 전 여름으로 달음질쳐간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기 직전 많은 사람들이 피난 대열에 합류한다. 소풍가듯 떠났던 두 오빠는 한강철교 폭파로 발이 묶여 되돌아오고, 인민군의 감시를 피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안채 다락방에 숨어 지내다가, 더 안전한 곳으로 여겨진 행랑채 벽장으로 옮긴 두 오빠는 그러나 폭격으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하루아침에 두 아들을 잃은 엄마는 그때부터 죽지 못해 사는 회색빛 삶을 살고 있다. 오빠들을 더 ‘안전한’ 곳으로 옮긴 죄책감은 경아가 평생 짊어져야 할 가혹한 짐이 된다.
만화의 마지막 9화에 오면, 《나목》의 화자 경아와 소설가 박완서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프롤로그에 이어 박수근 화백 유작전에 간 박완서는 오래 전 박수근의 작업실에서 보았던 작품 〈나무와 두 연인〉을 마주한다. 작가 박완서에 다름 아닌 소설의 화자 경아는 그림 속 벌거벗은 나무가 죽은 나무, 고목古木이 아닌 몸서리치며 봄을 기다리는 나목裸木이었음을 깨닫는다.
만화의 에필로그는 원작에 없는 에피소드로, 다이애나의 미군 애인에게 보내진 옥희도의 그림이 70여 년 뒤 시애틀의 한 시골 헛간에서 발견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상 어딘가에 남겨져 또 다른 영감을 창조해 내는 예술가의 흔적을 만화가의 상상력을 통해 만날 수 있다.
만화적 상상력으로 재발견한 두 예술가의 삶과 만남
만화 《나목》은 김금숙 작가 특유의 회화적인 화풍을 그대로 이어간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의 삶을 다룬 《풀》, 제주 4.3의 단면을 그린 《지슬》 등 전작의 맥을 이어 역사와 현실에 내몰린 인간의 내면이 흑백의 명징한 대비와 거침없는 붓질로 묘사된다. 최근 출판 만화에서 보기 드문 강렬한 그림체로, 작가의 독보적인 작품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한편 김금숙 작가는 한국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박수근 화백의 보석 같은 작품을 만화 속에 재현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원작소설 《나목》의 영감이 된 〈나무와 두 여인〉을 비롯, 〈노상의 여인들〉 〈모자母子〉 〈귀로歸路〉 〈아기 업은 소녀〉 등 대표작의 부분 혹은 전체를 모작하여 만화 속 ‘박수근 갤러리’로 되살렸다. 박완서와 박수근 두 예술가의 만남이라는 현대사의 흥미로운 소재를 단순한 가십으로 다루지 않고 두 인물의 삶과 예술 세계에 보다 깊이 있게 접근한 의도가 돋보인다.
이 책에는 박완서 작가의 맏딸 호원숙 작가의 서문이 실려 있다. 어머니가 소설 《나목》을 집필, 발표하며 늦깎이 작가로 데뷔하던 과정을 회상하며 작품에 대한 원작자의 남다른 애정을 묘사한 그는 “만화가가 원작자의 영혼 속에 들어갔다 오기라도 한 듯 작품 의도를 잘 살리면서도,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장면을 만들어냈다”고 평했다.
유럽, 남북미, 중동 등 전 세계 만화 시장에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김금숙 작가는 이번 작품 《나목》도 프랑스 출판사와 판권 계약을 마쳤다. 이는 국내 만화의 해외 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최근 출판 동향에 보다 활기를 불어넣을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한국 문학을 해외에 소개하고 대형 작가 박완서를 환기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나목裸木은 통렬한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며 내일을 향해 발돋움하는 청춘의 상징이며, 불우한 시대를 고독하게 건너간 예술가의 초상이다. 또한 태엽 감긴 장난감처럼 현실에 조종되는 삶을 살지라도 인간의 존엄한 실존을 놓지 않으려 사력을 다하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한국전쟁 70주년에 새롭게 주목해야 할 역사와 문학, 그리고 예술이 만화 《나목》에 깃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