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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이 내려오다

천국이 내려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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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12월 02일
쪽수, 무게, 크기 248쪽 | 306g | 130*200*17mm
ISBN13 9788934999744
ISBN10 8934999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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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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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물에 머리를 세 번 담갔다 뺐다. 그들은 나의 모습을 보고 자신들이 믿는 신이 인정받은 기분이었는지 나를 둘러싸고 즐거워했다. 강물은 부드러웠고 적당히 시원했다. 강 밖으로 나오려는데 어떤 할머니가 다가와 주름진 손에 강물을 담아 내 머리에 세 번 흘려주었다. 할머니는 나지막한 기도도 빼놓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도 나에게 축복을 빌어 주며 말했다. “이제 너의 모든 죄가 씻겨 나갔어.”
--- p.18

품에선 새끼 고양이가 고르렁거리며 안겨있었고, 소녀는 옆에서 밤하늘에 뜬 별들을 바라보며 익숙한 멜로디의 동요를 흥얼거렸다. 그리고 이 섬의 주인인 고양이들 모두 우리 주변에서 각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우릴 가만히 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우리가 고양이였다면 이들처럼 예뻐 보였을까?” 소녀는 “지금 우리도 예쁠 거 같아. 밤은 깜깜하니깐 모든 걸 가려주잖아”라고 말했다.
--- p.87

카페로 글을 쓰러 가는 도중이나 자전거를 타고 산책을 할 때 갑자기 문장이 다가왔다. 그건 머리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불어오는 바람이나 마음속에 나도 모르게 잊어버린 채 있던 것들이다. 그때 즉시 쓰기 시작한다. 마치 한숨을 내쉬는 것처럼 시원하게 써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카페나 공원, 도시 여기저기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앉거나 서서 아니면 드러누워 자신들의 방식으로 뭔가를 만들어 내는 모습이 이 도시 전체를 도서관이나 작업실처럼 보이게 했다.
--- p.135

다음 날 아침부터 나는 부지런히 집주인이 표시해준 장소들을 다녔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오래된 아파트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밥 딜런’이 살았던 전설의 장소였고, 또 지저분하고 낡은 카페여도 내게는 ‘비트 제너레이션’ 시인들이 매일 모여 자신들의 생각을 나눴던 곳이었기에 혼자 감탄했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며 어쩌면 그들이 앉았을지도 모르는 의자를 찾아 카페 안을 어슬렁거렸다. 나는 모든 의자에 앉아 보기도 하고 테이블을 쓰다듬기도 했다. 다른 누가 본다면 변태 같은 짓이라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들이 여기에 있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 p.155

“죽은 거 후회해?” 28살에 죽었을 때와 변함없는 얼굴을 가진 그를 보며 물었다. “누구나 죽어. 나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지만 살아 있었으면 더 괴로웠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더 이상 하고 싶은 일도 없었어.” 그는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대답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미련도, 기대도 없다면 오히려 아름다운 모습으로 죽는 게 더 현명한 방법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162

온몸이 꽁꽁 얼어붙어 감각이 없었다. 자려고 얼굴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때 기차가 요란한 기적 소리를 냈다. 아무것도 없는 시베리아 벌판에 끝도 없이 울려 퍼지는 그 소리는 까마득하게 들렸다. 우주선을 타고 광활한 우주 탐험을 하다 괘도를 이탈해서 지구로부터 점점 멀어져 결국 우주 미아가 된 막막한 기분이 어떤 건지 막연하게 알거 같았다. 모스크바에 도착할 때까지 매일 밤 한밤중에 울리는 기적소리를 기다렸다.
--- p.182

몸까지 다 담그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한바탕 크게 웃어 젖혔다. 이가 부딪히는 소리에 골이 흔들리고 몸의 세포와 신경이 모두 깨어나는 것 같았다. (중략) 알몸인 채로 언 호수 바닥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있으니 주변 사람들이 반야로 달리라고 외쳤다. 꽁꽁 언 몸에 뜨거운 물이 닿으니 몸이 간질거렸다. 반야 안에 가득 찬 뜨거운 수증기가 금세 몸을 녹여주었다. 그제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건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다. 꽁꽁 언 주민들이 하나둘씩 반야로 들어와 곧 반야 안은 벌거벗은 남자들로 꽉 찼다.
--- p.202

오로라를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무런 징후 없는 까만 하늘에 오로라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작고 희미한 빛으로 시작해 물에 떨어져 번지는 한 방울 잉크처럼 점점 머리 위에서 퍼져가다 하늘하늘한 엄마의 여름 치맛자락처럼 아주 느리게 펄럭이며 낮게 공중에서 부유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하게 와인 잔이 살짝 부딪히는 것 같은 소리가 언 공기 중에서 들렸다. 오로라를 보면서 나는 크게 숨도 쉬지 않았고 걸음도 조심스럽게 걸었다. 조금만 소리를 내면 주변의 모든 것이 깨져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 p.210

파랑 태양은 호수의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졌지만 여전히 호수는 붉은색이었고 태양이 사라진 하늘은 짙은 파란색이었다. 피츠제럴드는 낮도, 그렇다고 밤도 아닌 이런 중간의 시간을 ‘개와 늑대의 시간’ 그리고 ‘블루 아워Blue Hour’라고 썼다. 아마 이런 하늘을 보고 그런 표현을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뱃사공이 팬티만 입고 강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내게도 들어오라 손짓했다. 나는 그의 부름에 홀린 것처럼 붉은 호수로 뛰어들었다. 물은 포근했고 발에 물풀들이 스쳤다. 기분이 오묘했다. 어떤 기분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만약 내가 죽는다면 여기로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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