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묵상은 내면의 말, 가족의 말, 친구의 말, 동료와 선후배의 말, 이웃의 말을 주님의 말씀처럼 듣는 훈련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듯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지요. 그러니 들으라, 묵상하라는 말씀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인지도 모릅니다. 묵상이야말로 하나님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총체적이고 근본적으로 회복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1. 나는 왜 묵상하는가?」중에서
흔히들 묵상은 곧 생각하기라고 여깁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묵상은 생각하기면서도, 생각하기가 아닙니다. 구약에는 묵상을 가리키는 단어로 ‘하가’ 말고도 ‘시아흐’가 있습니다.16 이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깊이 생각하다’, ‘마음으로 숙고하다’입니다. 이 단어에 상응하는 헬라어 ‘멜레타오’도 동일한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묵상은 생각하기가 맞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대담하게 “묵상은 곧 생각”이 아닌 “묵상은 곧 읽기”라고 강조하는 까닭은 반복해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읽지 않고 오래 숙고만 하는 것은 묵상이 아닙니다. 읽고 또 읽고, 그렇게 읽은 것을 마음에 두고 되풀이하는 과정이 성찰이자 묵상입니다.
---「2. 묵상을 재정의하라」중에서
본문을 천천히 여러 번 읽은 다음에는 적용점을 찾고 기도합니다. 적용과 기도는 각각 별개의 장에서 다룰 참입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뒷장에서 다룰 내용의 핵심을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아마 과격하고 급진적으로 들리겠지만 적용에 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적용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놀라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할 당신을 위해 7장에서 이 내용을 충분히 다루려 합니다. 여기서 요지만 간략히 설명하자면 “억지로 적용점을 찾지 말라”는 겁니다. 본문을 읽은 것만으로도 적용을 다 한 셈입니다. 본문에 푹 잠기면 저절로 적용이 나오거든요. 그러니 우러나게 해야지, 캐내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3. 초보자도 따라 하는 묵상 실전 매뉴얼」중에서
묵상 나눔을 하다 보면, 제가 보기에 터무니없는 해석을 하는 경우를 왕왕 보게 됩니다. 그럴 때 솔직히 고민스럽습니다. ‘고쳐 줄까? 아니면 내버려둘까?’ 대부분 그냥 들어 주는 쪽을 택합니다. 읽지 않는 것보다 읽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좀 틀린들 어떻습니까. 때마다 날마다 묵상한다면, 말씀이 점차 그를 성숙시킬 것이라 확신합니다. 인간의 무지와 연약함보다 말씀의 지혜와 능력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강하기에 조금 엇나가더라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묵상하는 자 안에서 역사하는 말씀의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4. 중급자를 위한 묵상 노하우」중에서
묵상하는 법도 알려 주고, 묵상하는 본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도 가르쳐야 합니다. 묵상 본문으로 새벽기도 설교를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언젠가 그 본문을 주일 오전 설교로, 또는 오후예배나 수요예배 설교로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억지로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목회자 자신의 측면에서 보면, 미래를 위한 투자입니다. 그리고 목회자에게 있어 성도에 대한 최고의 사랑 표현은 ‘말씀 사역’입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는 성실함과 기회를 잘 활용하는 지혜로 탁월한 사역자가 되기 바랍니다.
---「5. 목회자를 위한 묵상 전략」중에서
저는 한 구절 묵상법을 즐겨 사용합니다.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본문을 소리 내어 네댓 번 읽습니다. 그러면서 가닥과 줄기를 잡고 전체 이야기를 수렴할 만한 한두 단어에 집중합니다. 이유도 까닭도 없이 내 마음에 와닿는 한두 개 또는 서너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그러면 더 나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섭니다. 다음 구절을 읽기보다는 그 말씀을 오래오래 들여다봅니다.…많은 본문이 아니라 적은 본문, 아니 딱 한 절이면 됩니다. 말씀을 마음에 품고 읊조리면서 지친 일상에서 쉼을 얻고, 전쟁 같은 일상에서 승리하기를 바라고 바랍니다.
---「6. 발을 동동거리며 사는 직장인도 따라 하는 한 줄 묵상법」중에서
우리는 왜 적용하지 않고 읽는 것으로 만족하려 들까요? 적용하기 위해서는 자기 부인과 손해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기 싫은, 죽어도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축복하라는 말씀과 설교는 듣기에는 달콤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 행하는 것은 참으로 아픕니다. 가슴이 베이고, 칼날에 찔리는 통증을 견뎌야 하지요. 그러니 그냥 듣고 “아멘” 하는 것으로 끝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기만이지 묵상일 수 없습니다.
---「7. 묵상과 적용」중에서
묵상이 천천히 반복해서 낭독하는 것이고, 성경이 낭독에 안성맞춤으로 쓰인 책이라면, 예배에서는 어떻게 사용되어야 할까요? 예배에서도 묵상할 때와 마찬가지로 성경을 천천히 반복해 읽는 순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경건주의의 아버지라 일컫는 야콥 스페너는 교회의 타락과 위기를 개혁하기 위한 최우선적 과제를 말씀 회복에서 찾습니다. 모든 성도가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게 하자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공중예배 때 특별한 시간을 정해 여러 사람이 차례로 성경을 읽는 것”16입니다. 그 본문에 대해 누군가 해석을 더하거나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읽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하여 모든 성도가 모든 성경을 읽도록 하고 그 방편으로 예배 시간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10. 묵상과 예배」중에서
묵상을 진짜 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잠시 쉬어도 됩니다. 묵상하는 방법에 변화를 줄 수도 있겠지요. 자기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발견하고 몸에 익히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나를 지켜주는 공동체 안에서 두세 사람이 묵상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격려하고 도전하는 소모임을 만드는 것도 좋다고 했지요. 김남주 시인의 시구처럼 둘도 좋고 셋은 더 좋으니, 힘들 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쉬어 갑시다.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 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 주고” 그렇게 복 있는 사람의 길을 가는 거지요.
---「11. 묵상하기 싫을 때」중에서
인간은 서로 다르기도 하지만 언제나 틀릴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만의 이해를 가지고 성경을 읽는다면, 그것은 항상 틀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심각하게 말해 그것은 하나님을 우상 섬기듯 묵상하는 꼴입니다. 묵상인들은 자신의 묵상이 하나의 해석이자 하나의 읽기라는 점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옳은 것은 성경이지 내 해석이 아닙니다. 해석은 각기 다르고 틀릴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직시해야 내묵상을 우상화하는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12. 묵상은 자의적인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