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사원에서 요리사로, 글 쓰는 셰프에서 칼럼니스트로!
삶과 음식을 버무리는 작가 정동현이 기록한
고되고 뜨거우며 짜고 달았던 인생의 맛!
읽어서 군침 도는 글도 좋지만, 슬픔이 고이는 글도 좋다고 생각한다.
정동현은 두 가지를 같이 한다.
- 박찬일(요리사, 칼럼니스트)
인생에도 ‘맛’이 있다면 우리 삶은 어떤 맛일까. 책《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이 그리워졌다》의 저자 정동현은 당구장집 아들로 자라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 유통회사에 입사했다. 꼬박꼬박 월급을 받았고, 반년마다 성과급도 나오는 계획이란 걸 세울 수 있는 삶이었다. 하지만 서른을 앞둔 어느 날 별안간 사표를 던지고 영국 요리학교로 맨몸으로 떠난다. 그가 처음 칼을 잡은 것은 군대에서다. 행정병에서 취사병으로 차출된 그는 막막했던 군 시절을 칼이 있어 견딜 만한 시간이라 떠올린다. 그리고 그 시간은 작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요리학교를 졸업하고는 수년 간 호주 멜버른에서 요리사로 일했다. ‘뒤늦은’ 요리 열정을 불사르며 전쟁터 같은 주방에서 눈 뜨면 일했고 눈 감으면 요리하는 꿈을 꿨다. 그렇게 꿈같은 시간을 통과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그만두었던 회사에 재입사했고 더 이상 직업으로 요리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동안 다져온 삶들은 글이 되었고, 때로는 군침 돌게 때로는 사무치게 만드는 ‘맛깔나는’ 음식 칼럼을 쓰며 여전히 음식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 책은 삶의 마디마디에 자리했던 음식에 대한 이야기다. 한 그릇을 먹기 위해, 만들기 위해 견디고 버텨야 했던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왜 우리가 인스턴트 라면 하나에 눈물을 흘리고 가슴이 북받쳐 오르는지 작은 실마리를 찾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다. 책을 덮고 나면 허기진 배를 채울 음식보다 시절을 함께 지나온 그리운 누군가가 떠오를 것이다. 많은 것이 그리워질 것이다.
삶의 모든 마디에는 저마다의 고유한 맛이 자리한다!
“사람들을 낯선 곳까지 오게 하고 밤을 지새우게 하는 것은 그리움이다. 그들이 먹는 것은 단지 고기뿐만 아니라 불꽃이고 그 불꽃이 이끌어낸 것은 감춰져 있던 기억이다.”
-본문 중에서
어떤 노래는 지나온 한 시절을 생생히 떠오르게 한다. 어떤 냄새는 함께했던 그리운 누군가를 생각나게 한다. 맛에도 그런 순간이 있다. 살기 위해, 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을 먹지만, 우리가 먹는 건 음식만이 아니다. 그 공간의 공기, 내음, 분위기 그리고 함께한 사람들까지 맛에는 수많은 순간과 장면이 담겨 있다. 같은 음식을 두고 제각기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는 돈가스에서 학창시절 친구를, 첫 데이트를 했던 연인을 떠올리지만, 책 속에서 작가는 이제야 이해하는 아버지의 못다 한 속내를 떠올린다. 우리가 먹어온 음식만큼 지나온 시간만큼 저마다의 고유한 추억도 켜켜이 쌓여간다.
어른이 될수록 맛의 형태는 다양해진다. 쓴맛, 단맛, 매운맛, 짠맛을 넘어 때로는 사무치고, 서럽고, 따뜻하고, 그립고 아련한 맛도 생겨난다. 책 속에서 작가는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그릇을 비우고 마는 ‘우리’를 바라본다. 맛을 느끼긴 한 건지, 맛을 음미하길 바라는 마음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져야 하는지 생각에 잠기지만, 이내 깨닫는다. 그들처럼 몸에 음식을 밀어 넣는 자신은 또 뭐가 다른 삶을 사는지 말이다. 영혼 없이 연신 국수를 삶고 테이블을 치우는 피로한 종업원과,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동안 배를 채우려 옆 사람과 말 한마디 못하는 작가의 처지는 칼국수 한 그릇 앞에서 닮은꼴이 된다. 그래도 결국 우리를 일으키는 건 음식이다. 학교 기숙사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아파하는 스무 살의 작가를 위로한 건 방을 함께 쓰던 형이 사다 준 비닐봉지에 담긴 죽 한 그릇이다. 꿈도 허락하지 않는 밤을 통과하던 이름 없는 아시아 노동자를 아들로 돌아오게 만드는 건, 체계도 레시피도 없지만 아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편애로 이룩한 엄마의 부침개 한 장이다. 책 속에서 작가는 우리에게 묻는다.
“분주함 속에 다시 찾아온 오늘, 기어코 찾아올 내일, 그사이 내가 먹는 것이 나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하며 한 숟가락을 목구멍으로 넘긴다. 문득 궁금해진다. 같은 하늘을 지고 사는, 저 멀리, 혹은 가까이에서 숨 쉬는 당신, 당신이 씹어 삼키는 그 작디작은 한 숟가락에 담긴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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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공자처럼 생겨서 생전 손마디 굵어질 일은 해보지 않았으며, 2층 자기 방에서 엄마가 깎아다 주던 과일 먹으며 공부한 줄 알았다. 물론 그는 입을 다물고 있었고, 모든 것은 내 상상이었다. 물가 살벌한 영국에 유학 갔다 왔다니, 집에서 팍팍 밀어주는 도련님인 줄 아는 게 당연하지 않았을까. 알고 보면, 그는 슬픔을 아는 소년이었다. 결핍에 몸서리쳐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비밀스러운 지하 출입구를 아는 친구였다. 그는 그 얘기를 순전히 음식을 빌려서 시작한다. 어묵과 식빵과 유니짜장과 비빔국수와 대패 삼겹살 같은, “당신이 정말 이런 걸 먹었어”라고 묻게 되는 그런 생존의 음식들로서. 바닥의 음식으로 그는 삶을 다져왔고, 다시 그것이 글이 되었다. 그래서 차지고 진득하다. 오랫동안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게 만드는 기술을 가진 이들이 있다. 지루하지 않게, 더러는 침 고이는 상상력을 충동질하면서, 때로는 공감의 전율 같은 걸 불러오는 솜씨로. 그가 그런 사람이었구나, 글로도 그게 가능하구나. 읽어서 군침 도는 글도 좋지만, 슬픔이 고이는 글도 좋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두 가지를 같이 하고 있다.
나는 정동현을 좀 안다고 생각했는데 읽고 보니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좋은 글은 사람에 대해 사무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다음에 만나면 꼭 한마디 해줄 것이다.
“뭐 그렇게 힘들게 살았어. 대포 한잔해.”
_박찬일 요리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