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무척추동물 11종을 발견하고, 남극 고유종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
남극에서 수행되는 수중조사는 주로 종 다양성과 생태계 군집 구조의 현상과 변화를 연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되며, 직접 잠수를 통해 표본을 채집 또는 사진 및 영상 촬영을 한 후 분석하는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생물다양성 연구 분야에서 후발주자에 속하지만, 남극에서만큼은 신종 무척추동물(요각류 4종, 섬모충류 7종) 11종을 세계 최초로 발견한 데 이어 다수의 신종 후보 종(완보동물 1종, 다모류 다수, 요각류 다수)을 확보하는 등 성과를 이루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남극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신종들이 있다. 남극 신종에는 ‘남극 대륙’을 뜻하는 antarctica, antarcticus가 이름에 종종 들어가는데, 우리나라 연구팀이 발견한 종에는 세종기지나 장보고기지의 이름을 붙여 ‘티그리오푸스 킹세종엔시스’와 같이 ‘세종엔시스’, ‘장보고엔시스’를 붙여 학계에 보고하기도 한다.
남극 바닷속 연구는 환경적·과학적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체 중의 극히 일부만을 보고 거대 생태계를 해석해야 하는 과학적 모순에 부딪히기도 한다. 이에 두 지은이는 “아주 잠깐 ‘점’ 수준의 좁은 공간을 관찰하고 마치 남극 바다를 모두 경험한 것 같은 착각과 자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 “자연에 대한 겸손으로 채워나가야 한다”(6쪽)는 점을 자주 깨닫고 있다고 말한다.
추위와 불편을 감수하면서 잠수복과 산소통에 의지한 채 이들이 다시 남극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이유는 남극 순환류에 의한 고립과 극한 환경에 적응하며 진화해 온 신종이나 남극에서만 볼 수 있는 고유종이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칫 아무런 존재감도 없이 사라질 생물의 존재를 인류에 알리는 것은 과학자로서의 사명감을 느끼는 일이지만 기후 변화가 몰고 온 수온 상승과 외래종 유입이라는 이중고 앞에 놓인 상황을 지켜보는 일은 안타깝기만 하다.
극한의 환경에서도 살아남은 무척추동물의 강인한 생명력
남극은 생물이 살아가기 힘든 극한의 환경이지만, 이곳에는 펭귄이나 고래, 크릴 말고도 다양한 생물이 살고 있다. 남극 바닷속은 서식구조(암반의 생김새와 경사 등)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수심별로 다양한 무척추동물이 살아가는 수중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주요 종으로 해면(해면동물), 연산호(자포동물), 빗해파리(빗해파리), 이끼벌레(태형동물), 끈벌레(유형동물), 고둥류 및 조개류(연체동물), 조개사돈(완족동물), 갯지렁이(환형동물), 바다거미류 및 옆새우류(절지동물), 성게류 및 불가사리류(극피동물), 멍게류(척삭동물) 등을 들 수 있다.
수심이 비교적 얕은 곳(15m 내외)에서는 대형 갈조류부터 삿갓조개, 옆새우류가 서식하고, 좀 더 깊은 곳(25m 내외)에서는 멍게류와 바다거미, 성게류가 서식하며, 수심 35~50m 정도 되는 곳에서는 산호류가 군락을 이룬 채 강인한 생명력을 유지하며 서식한다. 이러한 생태계 군집 구조는 남극 바닷속 생물들이 남극이라는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온 머나먼 여정의 결과물로서, 앞으로 변화할 환경 변화에 맞서 다시 어떤 풍경을 그려낼 지 그 추이가 주목된다.
지구상에 하찮은 존재는 없다, 모두가 자연 생태계의 주인공
지구상의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남극 바닷속 무척추동물들은 자신에게 닥친 문제들 앞에서 저마다 다양한 진화적 해결책을 발휘하며 생존해 왔다. 또한 자신이 생물 다양성의 일원인 동시에 다른 생물과 공존함으로써 수중 생태계의 질서 유지에 큰 역할을 해왔다.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해면은 천적을 피하기 위해 점액이나 가시 같은 특유의 보호책을 가지고 있다. 껍질 없이 연체부만 있는 갯민숭이는 아름다운 생김새 때문에 많은 물고기의 포식대상이 되지만, 독소나 섭이저해물질을 뿜어 물고기로 하여금 삼켰다가도 바로 뱉어 버리게 하는 재주가 있다. 폐나 아가미가 없는 남극바다거미는 독특하게도 모든 다리 끝까지 소화관이 뻗어 있고, 소화관이 움직이면서 다리의 미세한 구멍을 통해 온몸에 산소가 공급된다고 알려져 있다. 한편, 멍게는 군락을 이루어 서식하면서 부착기와 멍게들 사이에 다양한 생물이 살 수 있는 공감을 마련해 줌으로써 남극 수중 생태계에서 생물 다양성을 높이는 구조적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이에 두 지은이는 “지구상에는, 특히 남극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생물이 무수히 많다. 게다가 하찮게 여겨지는 하등동물도 각자 고유한 생존 전략이 있으며 오히려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러니 이들 모두가 다 자연 생태계의 주인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159쪽)”라고 말한다.
기후 변화와 환경 오염으로 위기에 놓인 남극과 남극의 생물들
“인구 50만의 도시. 50%가 고령층이며 최근 20년 동안 태어난 신생아 수가 가구당 0.2명밖에 되지 않는다면? 사라질 위기에 처한 이 도시는 우리나라 얘기 같지만, 남극 장보고기지 앞 연안에 사는 남극가리비의 현재 상황이다. 남극에서 환경 변화, 남획 등으로 개체 수가 급감하고 있는 종은 수도 없이 많다(4쪽).”
남극은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초래한 기후 변화의 영향을 피해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지도 한참 되었다. 남극 대륙 주변의 빙붕은 남극 대륙의 빙하가 해수에 의해 녹지 않도록 막아주는 파수꾼 역할을 해왔다. 최근 지구온난화로 북극이 따뜻해지면서 엘니뇨 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함에 따라 남극의 빙붕이 급속도로 감소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빙붕의 감소는 곧 남극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빙하의 감소로 이어질 것을 예측케 하며, 이어서 남극을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는 수많은 생물을 절멸 위기에 처하게 함을 알리는 신호가 된다. 빙하가 녹으면 ‘남빙양의 쌀’이라 불리는 크릴의 주 먹이인 규조류의 광합성이 활발해짐에 따라 크릴의 질이 나빠진다. 뿐만 아니라 빙하가 녹으며 나오는 미세 토사로 인해 질식해 떼죽음을 당하기도 한다. 크릴의 감소가 고래나 펭귄과 같이 먹이 사슬 혹은 먹이 연쇄로 엮인 생태계 전반에 미치게 될 영향은 불 보듯 자명하다.
여기에 최근에는 해양 오염도 가세하고 있다. 납, 카드뮴, 망간 같은 중금속뿐만 아니라 쓰레기에서 비롯된 나노 플라스틱까지 남극의 해양 생태계에 위협을 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남극 바다에서 이러한 오염물을 측정하는 대표 생물지표 종이 남극삿갓조개인데, 남극삿갓조개를 주요 먹이원으로 하는 남방큰재갈매기와 같은 새들한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충분히 예상이 가능하다. 이로써 인간 유래의 재앙이 종국에 영향을 미치게 될 대상이 누구인지도 쉽게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두 지은이가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경이롭고 놀라운 남극 생물들에 대해 알게 되고 나아가 이들과 우리가 공존할 수 있도록 자연 환경을 보전하려는 인식이 커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극생물학자의 연구노트’ 시리즈
자연생태와 생물탐구 도서를 꾸준히 출간해 온 지오북(GEOBOOK)에서는 ‘남극생물학자의 연구노트’ 시리즈(총9권)를 2019년부터 출간해 오고 있다. 우리나라 유일의 극지 연구 전문기관인 극지연구소에서 극지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기획한 이 시리즈는 남극 생물학자들이 연구 활동을 하면서 겪은 경험이나 연구 관찰 기록, 아이디어를 적어 놓은 노트와 현장 사진을 풍성하게 담고 있다. 제1권으로 김정훈 박사의 『사소하지만 중요한 남극동물의 사생활 -킹조지섬 편』이 펭귄을 포함한 다양한 남극 동물의 일상을 연구한 내용을 담아 2019년에 출간되었다. 2020년에는 제2권 『사소하지만 중요한 남극 바닷속 무척추동물 -킹조지섬 편』(김상희 박사, 김사흥 박사 지음)을 1월 중에 출간하며, 제3권은 『사소하지만 중요한 남극의 작은 식물 이야기』(김지희 박사 지음)로 1월 말 출간할 예정이다. 앞으로도 매년 2권씩 남극의 해양과 육상 생물 탐사를 통해 경험하는 다양한 주제의 남극생물학자의 이야기가 출간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