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0년 02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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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20쪽 | 200g | 127*210*20mm |
ISBN13 | 9791196714222 |
ISBN10 | 1196714223 |
발행일 | 2020년 02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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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20쪽 | 200g | 127*210*20mm |
ISBN13 | 9791196714222 |
ISBN10 | 1196714223 |
1부 순진의 시련 착한 여자의 역습 돼지들에게 돼지의 본질 돼지의 변신 하늘에서 내려온 여우 비극의 시작 여우와 진주의 러브스토리 앵무새들 권위란 2 최소한의 자존심 자격 ㅊ 2부 내 영혼의 수몰지구 굳은 빵에 버터 바르듯 햇빛 속의 여인 서울의 방 대화 상대 알겠니? 황혼 바람 부는 날 한국영화를 위하여 Korean Air 서른아홉 세기말, 제기랄 옛날 시인 3부 축구장에서 생각한 육체와 정신 공은 기다리는 곳에서 오지 않는다 정의는 축구장에만 있다 남북축구대회에 나타난 반공의 딸 닮은 꼴 인생보다 진실한 게임 축구는 내게 나는 왜 수비수가 되었나 인간의 두 부류 4부 달리는 폐허 위에서 노트르담의 오르간 베르사유의 가을 ICI REPOSE 여기 쉬다 베니스의 유령 발자크의 집을 다녀와 런던의 실비아 플라스 외국어로 고백하기 지중해의 노을 5부 짐승의 시간, 인간의 시간 시대의 우울 대학시절 사진을 달라는 기자에게 산과 바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권력의 얼굴 짐승의 시간 44년 전의 오늘 이장 (移葬) 육체와 영혼에 대한 어떤 문답 눈 감고 헤엄치기 시인의 말 |
시란 게, 언어를 갈고닦아 영롱한 빛을 내게 하고, 의미를 욱이고 채워 탁하면 억하고 알아먹어야 함에도 능력이 되지 않아 멀리 했습니다. 그러나 어쩌다 이해가 될 듯한 시를 만나면 너무 반가운 나머지 따라 하고 싶어지고 말을 붙여 보고 싶어 집니다. 그래서 시인에게 반가움을 표시하고, 응원을 하고 싶어서 주접일지도 모를 글을 씁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렇게 이해해 주시면 감사할 일입니다.
레이몬드 카바를 읽고 목욕을 하고
나는 다시 나의 의자에 앉아
눈 덮인 겨울나무 가지 위에
부지런히 눈을 터는 새를 본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은 멀리서 빛나고
당신을 위해
나는 이 시를 억지로 완성하지 않으리 (대화 상대, 마지막 두 연, 43쪽)
내가
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시간은
수많은 시집과 시인들의 이름 속에서
내가 너와 나눈 말들이
고스란히 차곡차곡 다른 틈 주지 않아
일 년에 한 번 쓸까 말까 한
현학의 비단옷을 두른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시를 읽었을 때야.
그런 시인을 만났을 때야
그 찰나 말이야.
후보 선수인 내게 공은
어떻게든 만지고픈 무엇이었다.
공은 그가 기다리는 곳에서 오지 않았다.
그가 보지 못한 뒤에서 날아온 공이 그를 쓰러뜨렸고
내가 기대하지 않던 친구의 도움이 나를 살렸다.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공이 오고가며 게임이 완성
된다. (공은 기다리는 곳에서 오지 않는다 중에서 65쪽)
다행이네
널 쓰러뜨린 공이 아니어서.
월드컵 골 모음 비디오를 보고 나는 알았다
같은 골은 하나도 없다
비슷하지만 다른 인생을 다루는
진짜 작가라면 같은 문장을 두 번 쓰지 않는다(닮은 꼴. 69쪽)
그랬구나
그래서 네게서는
지루함이 없었던 거야
늘 틀면
중계되는 축구경기였건만
늘 지루하지 않아
보는 축구처럼 말이야
국민학교 피구선수였던 나는, 상대를 정확히 맞춰 때리는 재주가 없음을 일찍이 간파하고 용감한 수비수가 되었다.
그러나 운동장 밖에는 더 큰 세상이 있어, 치명적인 공이 바로 내 앞에 떨어지기까지 누가 적이고 누가 진짜 친구인지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왜 수비수가 되었나 중에서, 72쪽)
네가 하는 피구경기를
누군가는 한 조각의 진실이 살아 움직이는 아름다움으로 감격하고, 너의 플레이는 발랄한 총천연색 사진처럼 앨범 속에 넣어두고, 생생한 풍경처럼, 마약처럼 고통을 이겨내게 한다.
넌 영원한 수비수야. 넌 영원한 우리들의 주전이야.
밖에서 더 잘 보이게 만들어진 어항 속의 물고기처럼
눈을 감고 헤엄치는 나의 언어들은-
요리사 마음대로 요리하기 쉬운, 도마 위에 오는 생선
솜씨 없이 무딘 칼에도 무방비일지언정
내 시에 향수와 방부제를 뿌리지는 않겠다.
자신의 약점을 보이지 않는 시를 나는 믿지 않는다. (눈 감고 헤엄치기 중에서, 106쪽)
자신의 약점을 보이지 않는 사람을 나는 믿지 않는다.
최영미 시집 (돼지들에게)를 읽으면서 돼지는 누구며, 진주는 누군지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시인의 궤적이 널리 알려지긴 했지만, 그가 한 마리의 돼지와 하나의 진주알만 생각하고 시를 썼다면 시에 공감을 하지 않았을 것을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자주 가는 무주의 한 마을에서 돼지를 키우는 형님 내외의 농장을 보면 돼지는 한 마리씩 키우지 않습니다. 농가의 구조가 바뀐 지 오래되어 집마다 한두 마리씩 키우던 돼지들은 모두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농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오명을 씌울 만큼 그 돼지들은 사납지 않지요. 나는 무주의 형님에게 늘 권합니다. 가진 농장의 땅도 넓은데, 돼지를 방목해보는 게 어떠냐고. 씨알도 먹히지 않습니다. 만약 돼지가 욕심의 대명사라면 돼지에게 잘못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의 욕망이 돼지에게 덧 씐 것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농장엔 돼지들이 밀집되어 있고 6개월을 채워 순서대로 농장을 떠납니다. 그 옆 넓은 농장엔 사과 묘목이 최근 다시 심어졌습니다. 틈이라곤 없는 농장에서 형님 내외는 사시사철 아침저녁 끊임없이 일만 하십니다. 다행인 것은 돼지의 두 수는 늘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돼지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수많은 진주를 꿰어 자기 목에 걸어달라고 하는 돼지들의 아우성이 넘치고, 돼지가 여우가 된다 해도 그 시작은 사람의 욕망에서 시작한 것이어서 사람이 끝을 내야 할 것이지 돼지와 여우에게 기댈 일은 아닙니다. 돼지를 키우는 사람들이 가득한 한 시인은 영원한 수비수로서 둥그런 아픔을 가슴으로 껴안으며 살 운명일지도 모릅니다. 비록 조그만 손이라도 포개고, 마음 한 구석으로 응원을 하면서 시인에게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최영미 시집, 돼지들에게. 이미출판사
시란 게, 언어를 갈고닦아 영롱한 빛을 내게 하고, 의미를 욱이고 채워 탁하면 억하고 알아먹어야 함에도 능력이 되지 않아 멀리 했습니다. 그러나 어쩌다 이해가 될 듯한 시를 만나면 너무 반가운 나머지 따라 하고 싶어지고 말을 붙여 보고 싶어 집니다. 그래서 시인에게 반가움을 표시하고, 응원을 하고 싶어서 주접일지도 모를 글을 씁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렇게 이해해 주시면 감사할 일입니다.
우리가 사랑했던 영혼이
우리가 미워했던 육체를 이기리라(쪽 표시 없는 9쪽)
우리가 사랑했던 육체는
우리가 미워했던 영혼을 고치지 못한다.
누가 누구를 정리했다고? 지금 뒤에서 수근대는, 앞에서 염탐하는 당신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끝나지 않았어. 이건 리허설이야.(착한 여자의 역습, 마지막 연. 13쪽)
모든 이야기는 시작과 끝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속성이 있다. 그런데.... 그게 착각이야. 인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물질로 이뤄진 네가 없어질 때까지.... 아니 네가 없어진 그 뒤로도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다. 너 모르지? 모르니 그딴 얘기하는 거야. 모든 이야기는 시작과 끝이 어쩌고 저쩌고 말이야.
나는 피 흘리며 싸웠다.
띠로 싸우고 때로 타협했다
두 개를 달라면 하나만 주고
속인 빈 가짜 진주목걸이로 그를 속였다.
그래도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다.(돼지들에게 중. 18쪽)
진주를 달라는 돼지들은 말한다.
이건 네가 준 적이 있어서야. 왜 난 안 돼
돼지를 죽이지도 않고, 진주를 주지도 않고,
타협 않고, 지치지도 않고
그렇게 살려면
어떡해야 하지
그는 자신이 돼지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스스로 훌륭한 양의 모범이라고 믿고 있다
신분이 높고 고상한 돼지일수록 이런 착각을 잘한다
(돼지의 본질 첫 연. 19쪽)
그래
그렇지
돼지는 돼지일 뿐이라는
그 단순함만 알면
내가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길 수 있을지도 몰라
늘고 병든 몸에
새록새록 돋아나는
그 힘 말이야.
그는 원래 평범한 돼지였다
감방에서 한 이십 년 썩은 뒤에
그는 여우가 되었다(돼지의 변신, 첫 연, 20쪽)
여우는 원래 돼지였대.
그래
그래!
나도 언젠가부터 그렇게 느꼈어
슬퍼하지 마.
네가 있었다는 걸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달라졌을까
네 고민이 줄어들었을까
위로가 되었을까
그래서 미안해.
겸손한 문체로 익명의 다수를 향해 다정한 편지를
띄우지만
당신처럼 오만한 인간을 나는 알지 못하지
당신보다 차가운 심장을 나는 보지 못했어
계산된 ‘따뜻’에 농락당했던 바보가 탄식한다
늦었지만
순진을 벗게 해 줘서 고마워
선생님. (하늘에서 내려온 여우 중, 마지막 두 연, 23쪽)
공군 초임 파일럿은
최초의 다섯 번 전투 임무를 마치기 전에
반 이상이 죽었대.
육군 초임 소위도
참전 후 거의 최초 전투에서 많이 죽는대.
넌
파일럿도 소위도 아닌데
훈련받지도 않았는데
살아냈어.
난 그게 너무
고마워.
지금은 아니야.
나는 내가 완전히 잊혀진 뒤에 죽겠어.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자들에게
무덤에서 일어나 일일이 대꾸하고 싶지 않으니까. (최소한의 자존심, 31쪽)
그래, 그러면 좋겠어.
이렇게 살아 있는 네 앞에서
웃으면 좋겠어.
네가 누운 무덤에서 나 혼자
눈물 흘리며 뒤늦은 위로하긴
정말
싫어.
나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좀도둑도 살인자를 고발할 수 있고
살인자도 살인자를 고발할 수 있어 (자격, 마지막 두 연, 32쪽)
자격 없는 자들은 그 입 다물라!
그랬으면 벌써
정말 벌써
세상은 조용했을 거야.
그렇게 조용한 세상은
무덤 속일 거야.
제사장들만 신나서 춤추는 공동묘지.
난 아직
죽지 않았어
그것 몰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