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最古문명 홍산문화와 동이족
요하문명은 중국의 하북성·내몽골·요녕성 일대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동이족 문화를 뜻하는데 세계 4대문명이라는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1,000년 정도 빠르다. 요하문명에서 중요한 것은 홍산문화인데, 1908년 일본의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가 내몽골 적봉 일대에서 많은 신석기 유물과 동이족 무덤인 돌로 쌓은 적석총을 발견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중국의 장박천은 홍산문화를 중국 고대 오제五帝의 첫 인물이자 중화민족의 시조라는 황제黃帝의 후손들인 황제족의 문화라고 주장했다.
장박천은 특히 홍산문화의 주도세력은 황제의 손자인 전욱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의 소병기가 1994년 장박천의 설을 지지하면서 현재 거의 모든 중국학자들은 홍산문화를 황제족의 문화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황제의 아들 소호가 동이족이라는 점에서 황제는 동이족일 개연성이 높다. 사마천은 『사기』를 중국 민족인 한족, 즉 하화족의 시조인 황제집단과 동이족의 시조인 치우집단의 싸움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황제의 아들 소호少昊는 동이족이다. 소호는 태호太昊의 도를 이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인데, 중국의 부사년은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에서 “태호 복희가 동방의 부족이라는 것은 고대로부터 공인되어온 일이다”라고 말했고, 1920년대~40년대 중국학계를 풍미했던 고사변파의 양관도 「중국상고사도론中國上古史導論」에서 태호를 동이족이라고 말했다. 또한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도 “신라 사람들이 자칭 소호 금천金天씨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金이라 한다”고 하였고, 같은 기록은 「김유신비문」에도 “헌원황제의 후예요 소호의 자손이라고 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모두 황제의 아들 소호가 동이족이라는 뜻이다. 황제의 아들인 소호가 동이족이 명백하기 때문에 사마천이 황제를 하화족의 시조로 삼는 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었다. 1983년 요녕성 건평현 대릉하 상류의 우하량에서 거대한 제사유적과 적석총 무덤군 등이 발견되었다. 우하량 유적의 구릉에서는 제사 유적과 신전 및 신상 등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동이족의 신성 숭배 성향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제단·신전·무덤이 완비된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강력한 고대국가가 등장했음을 말해준다. 홍산문화의 이전 문화인 흥륭와문화에서 보이는 빗살무늬토기, 적석총, 비파형 동검 등은 한족들의 문명인 황하문명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시베리아 남단→몽골초원→만주→한반도→일본열도’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북방계통 문화와 연결되는 동이족 문화이다. 이 지역의 유적 중에서 특이한 것은 하늘에 제사 지내던 제천 유적들인데, 그 형태가 둥근 원형과 네모난 방형으로 되어 있다.
고대인들에게 원형은 하늘의 형상이고, 방형은 지구의 형상이다. 원형과 방형 제단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인간까지 더하면 우리 민족 고유의 천지인 사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는 또한 이 지역의 우리 선조들이 자신들을 하늘의 자손, 즉 천손으로 보았음을 말해준다. 홍산문화에서는 곰, 새, 돼지 등 다양한 동물 모양의 옥기가 출토되어 곰, 새, 돼지 토템족들의 공존을 암시한다. 특히 곰과 새는 고조선과 동이족 국가 은나라의 주요 토템이다.
옥기는 계급의 발생과 제정일치 시대를 말해주는데 이 역시 초기 고조선 사회의 모습과 같다. 홍산문화에 대해서 남한 강단사학계는 연구 자체를 외면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찬구, 정경희, 복기대, 우실하 교수 등이 홍산문화는 동이족 문화임을 밝히고 있다. 요하문명의 흥륭와문화에서 발견된 옥귀걸이와 같은 것이 강원도 고성 문암리에서도 발견되었다. 또한 홍산문화를 만든 사람들이 사용한 석관묘는 고조선과 동일한 묘제다.
반면 중국은 토광묘가 유행했다. 홍산문화는 소하연문화를 거쳐 초기 청동기 문화인 하가점 하층문화로 연결되는데 이 시기에 고조선이 출현한다. 소병기는 고대 국가발달과정을 고국古國→방국方國→제국帝國으로 분류했는데, 홍산문화 시기에 ‘고국古國’ 단계가 시작되었고, 하가점 하층문화 시기에 ‘방국方國’으로 발전했다고 보았다. 이 시기 이 일대에 존재했던 방국方國으로 분류할 수 있는 정치세력은 고조선밖에 없다는 점에서도 하가점 하층문화는 고조선 문화이다.
고구려의 초기 중심지와 건국연대에 대해
고구려 동천왕은 재위 16년(242) 후한의 요동 서안평을 공격했는데, 남한 강단사학계는 요동을 압록강 대안의 단동이라고 주장하지만 중국의 『요사遼史』는 지금의 내몽골 파림좌기라고 말하고 있다. 이곳은 요나라 수도인 상경 임황부 자리로서 지금도 거대한 고구려 토성 흔적이 남아 있다. 이처럼 내몽골 깊숙한 곳에 고구려 토성이 남은 이유는 초기 고구려의 중심지와 관련이 있다.
현재 고주몽이 세운 고구려의 첫 도읍지에 대해 『위서魏書』는 홀승골성이라고 썼는데, 이곳을 흔히 요녕성 환인현 오녀산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고구려의 많은 유적들이 그렇듯이 정확한 연구나 유적발굴을 통해 비정한 것이 아니다. 2대 유리왕은 재위 22년(서기 3) 국내성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쌓았는데, 이 국내성을 길림성 집안이라고 비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들 지역에서는 서기전 1세기~서기 1세기 무렵의 유물들이 출토되지 않는다. 이 지역들이 고구려의 초기 도읍지라면 고구려가 개국 초부터 중국의 한나라와 싸웠다는 여러 사료들을 이해하기가 어렵게 된다.
『삼국사기』 고구려 모본왕 2년(서기 49)조는 “모본왕이 장수를 보내 북평·어양·상곡·태원을 습격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기사는 중국의 『후한서』 광무제 건무 2년49에도 “요동 바깥의 맥인貊人이 우북평·어양·상곡·태원을 침범했다”고 나온다. 모본왕이 공격한 북평은 현재 하북성 만성현, 어양은 북경시 밀운현, 상곡은 하북성 회래현 남쪽, 태원은 산서성 태원시로 비정한다. 고구려의 초기 도읍지가 오녀산성이나 길림성 집안이라면 고구려가 이 지역들까지 공격하기에는 너무 멀고, 실익도 찾기 힘들다.
더구나 고구려는 이 지역을 습격한 후 곧바로 퇴각한 것이 아니라 『삼국사기』 고구려 태조대왕 3년(서기 55조)에 “요서에 10개 성을 쌓아 한나라 군사들에 대비했다”는 기록처럼 성까지 쌓아 지켰다. 일본과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은 이 기록에 대해 “어떤 착오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후한서』에 모두 나오는 이 기사를 ‘착오’로 돌릴 수는 없다. 당나라 두우杜佑(735~812)가 편찬한 『통전通典』은 “진晉나라 때 평주를 설치한 지역에 북위 때 고구려가 도읍을 삼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진나라 평주에 고구려 도읍이 있었다는 뜻이다. 두우의 『통전』은 “평주는 지금 노룡현에서 다스린다. 은나라 때 고죽국이었고, 춘추 때 산융, 비자 두 나라의 땅이었다. 지금 노룡현에 고죽성이 있는데 백이·숙제의 나라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진나라 평주는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으로서 『한서』 「지리지」 등에는 낙랑군 조선현이 있던 곳이라고 말하는 지역이다. 『수서隋書』 「배구裴矩열전」 에는 배구가 수隋(581~619) 양제에게, “고구려 땅은 본래 고죽국 땅이었습니다. 주나라 때 기자를 이곳에 봉했으며, 한나라가 삼군三郡(한사군을 뜻함)으로 나누었으며, 진나라도 통합했는데, 지금은 신하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고 나온다.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에 한나라 삼군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곳이 고구려 수도라는 것이다. 고구려의 초기 도읍지는 지금의 요녕성 환인이나 길림성 집안보다 훨씬 서쪽에서 찾아야 한다. 한편 북한학계는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끌어올려 보고 있다. 고구려가 서기전 277년에 고주몽에 의해 건국되어 서기 668년에 멸망했다고 보는 것으로 서기전 37년이라는 『삼국사기』의 건국연대보다 240년 정도 앞서 본다.
북한은 고구려를 둘로 나누어 본다. 하나는 고구려 전사前史로서 고조선의 후국 구려국을 설정했다. 구려는 서기전 15세기 중엽 고조선이 전, 후조선 왕조가 교체될 때 고조선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인 왕국이 되었다. 서기전 10세기 중엽부터 노예 소유자적 제도 대신 봉건제도가 점차 확대되기 시작해서 서기전 3세기 초에 새로운 봉건세력의 대표이자 해모수와 유화의 아들인 주몽이 서기전 277년에 건국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편찬자가 고구려 건국연대를 늦췄다는 것인데, 몇 가지 근거가 있다.
하나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끝의 “논하여 말하다”에서 “고구려는 진秦·한漢 이후 중국의 동북 모퉁이에 끼어 있었다”고 말한 부분이다. 춘추전국시기의 진나라는 서기전 905년~서기전 221년이고 통일제국 진나라는 서기전 221~서기전 207년이다. 한 제국은 서한西漢(전한)은 서기전 202~서기 9년까지인데, 『삼국사기』의 위 구절은 고구려가 서기전 3세기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다른 하나는 광개토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을 추모왕의 17세손으로 쓰고 있는데, 『삼국사기』는 12세손으로 축소해서 쓰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들을 토대로 고구려의 건국연대가 축소되었다고 보고 있다.
임나일본부 분국설을 생각한다
『일본서기』는 신라·고구려·백제·가야가 모두 야마토왜의 식민지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가을 9월 고구려인, 백제인, 임나인, 신라인이 같이 내조했다. 다케우치노스쿠네武內宿·에게 명하여 여러 한인들을 거느리고 연못을 만들게 했다. 그래서 그 못을 한인지韓人池(한인의 연못)라고 한다(··일본서기·· ·응신기· 7년)” 고구려·백제·임나·신라 사신이 동시에 야마토왜에 조공을 바쳤다는 응신應神(오진) 7년은 서기 276년인데, 120년을 끌어올리면 396년이 된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영락 6년이고, 백제 아신왕 5년이고, 신라 내물왕 42년이다.
·광개토대왕비문·은 이해 광개토대왕이 백제 정벌에 나서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제 임금의 아우와 대신 10명을 데리고 개선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일본서기』는 야마토왜에 조공을 바쳤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왜곡이 심하다고 해도 역사서 전체를 거짓이라고 보는 것도 문제가 있다. 그래서 북한학계에서는 분국설分國說이 나왔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에 대한 기사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본국들이 일본 열도에 진출해서 세운 분국分國에 관한 이야기라는 학설이다. 북한의 김석형이 1963년 「삼한 삼국의 일본 열도 내의 분국설에 대해서(『력사과학』)」에서 최초로 주장한 분국설은 일본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 열도 내에는 지금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계 유적·유물과 지명이 전국 각지에 퍼져있다. 특히 규슈와 나라 부근에는 가야와 백제의 유적, 유물이 많다. 유물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가야와 백제의 분국이 그곳에 있었다고 말하면 적당할 정도다. 그래서 분국설이 나왔다
임나일본부설의 모순은 많다. 일본인 학자들은 서기 369년 가라 7국을 점령하고 임나를 설치했다고 주장하지만 『일본서기』에 ‘일본부日本府’라는 명칭이 처음 나오는 것은 웅략雄略(유랴쿠) 8년(464년. 신라 자비왕 7년, 고구려 장수왕 52년)의 기록이다. 신라에서 일왕 웅략 즉위 후 8년 동안 조공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정벌당할 것이 두려워서 고구려에 군사지원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호 요청을 수락한 고구려가 보낸 군사가 100명이라는 것이 『일본서기』의 내용이다.
『삼국사기』는 한 해 전인 자비마립간 6년(463) “군사를 크게 사열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군사를 ‘크게 사열〔大閱〕’했을 경우 최소한 몇 만 명은 되었으니 ‘크게’라는 형용사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100명의 군사로 보호할 수 있는 나라가 『삼국사기』의 신라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는 701년에 처음 사용했고, 그 전까지 국명은 왜倭였다. 그럼 일본 열도 내 임나의 위치는 어디일까· 『일본서기』에서 임나의 위치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기사는 「숭신崇神」 65년(서기전 33)조이다.
“임나는 축자국筑紫國에서 2,000여리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 계림鷄林의 서남쪽에 있다.” 숭신 65년은 서기전 33년으로서 가야가 건국된 서기 42년보다 90년 전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니 임가는 가야가 아니다. 또한 가야의 북쪽은 바다가 아니다. 북한학계는 김석형의 뒤를 이어 조희승이 이 분야 연구를 크게 진전시켰다.
그의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1995)』은 남한 강단사학계와 비교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일 정도로 방대하고 치밀한 내용인데 그 보급판이 『임나일본부 해부(2012)』다. 이 책들에서 조희승은 오카야마岡山현 기비吉備 지역을 임나라고 보고 있다. 오카야마 현과 히로시마현 동부를 과거에는 기비라고 불렀는데, 오카야마현에만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등 약 1만 2,000기에 이르는 고대 고분이 축조되어 있다.
그중 전방후원분인 쓰쿠리야마고분造山古墳은 길이가 약 360m에 달하는 일본 내 4위 고분이다. 또한 해발 397m의 귀성산鬼城山에 쌓은 기노조鬼の城는 5세기 무렵 가야인들이 쌓은 산성이다. 오카야마 이과대학에서 복원한 옛 지도를 보면 과거에는 오카야마 깊숙한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으니 「숭신」 65년조 기사에 부합한다. 또 그 주변에 임나와 각축했던 신라, 백제, 고구려 분국이 모두 있다.
남한 내의 민족사학자들 중 다수(문정창·최재석·이병선·황순종)는 대마도라고 보고 있고, 일부는 규슈(김문배·김인배)라고 보고 있는데, 앞으로 북한 학계의 연구 성과가 소개되면 오카야마설이 널리 퍼질 가능성이 있다. 윤내현은 최근 오카야마가 임나라는 견해를 밝혔다. 임나는 한반도 남부에 있지 않았다. 서기 4세기 말에서 6세기 말까지 한반도 남부에 임나가 존재했다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신라본기」에 나오지 않을 리가 없다.
남한 강단사학은 ‘임나=가야설’을 정설이라면서 북한학계의 분국설을 온갖 논리로 비판한다. ‘백제에서 야마토왜에 공주와 왕자들을 보내 천황을 섬기게 했다’고 주장하는 김현구는 이렇게 말했다. “김석형의 ‘삼한 삼국의 일본 열도 내 분국론’은 관련자료를 일방적으로 한국 측에 유리하게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는 『일본서기』를 일본 측에 유리하게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야마또정권의 한반도 남부경영론을 만들어낸 스에마쯔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김현구는 김석형과 스에마츠를 동시에 비판하는 것 같지만 같은 책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고전적인 정의를 내린 사람은 일제시대 경성제국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던 스에마쯔 야스까즈末松保和였다.”면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지명 비정比定은 스에마쯔 설을 따랐다”라고 말했다. 총론으로는 비판하는 척하지만 각론에서는 식민사학을 추종하는 행태의 반복이다.
김태식은 “(김석형은) 『일본서기』를 비롯한 문헌사료들을 이용할 때 거의 모든 사료를 무리하게 일본 열도에서의 사실로 억측함으로써 오히려 한반도 내 가야사를 포기한 결과를 초래하였다(『한국 전근대사의 주요쟁점(역사비평편집위원회, 2008)”라고 비판했다. 일본 열도 내 분국들을 연구하는 것이 어떻게 “한반도 내 가야사를 포기”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분국설은 가야의 일본 열도 진출사로서 가야사의 내용을 더 풍부하게 하는 것이다. 북한이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남한에 대해 정신적 우위를 주장하는 원인이 역사관에 있다. 북한은 1961년에 ‘한사군=한반도설’을 해체시키고, 1963년에 ‘임나=가야설’을 해체시켰는데, 남한 강단사학계는 아직도 이 두 학설을 도그마로 섬기고 있으니 남한을 아래로 보는 것이다.
고려와 조선의 국경선은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
우리는 국사교과서에서 고려의 북방 강역은 청천강 부근, 조선의 북방 강역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했다고 배워왔다. 그래서 우리나라 지도가 토끼 모양이라고 알고 있었다. 과연 그럴까· 고려의 예종은 재위 2년(1107) 윤 10월 윤관을 상원수,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삼아 17만 대군을 주어 여진 정벌을 명령했다. 예종은 다음 달에는 몸소 서경까지 가서 군사들을 격려하고 북진에 대한 굳은 의지를 과시했다.
윤관은 여진족들을 북방으로 몰아내며 영토를 확장했는데, ··고려사·· 예종 3년(1108) 2월조는 “윤관이 여진을 평정하고 여섯 성을 쌓은 것과 관련하여 글을 올려 축하하고 공험진公·鎭에 비를 세워 경계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 「지리지」에도 “(윤관이) 이 지역에 9개의 성을 설치하고 공험진에 있는 선춘령先春嶺에 비를 세워 이곳을 경계로 삼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공험진 선춘령에 ‘고려의 땅〔高麗之境〕’이라는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공험진에 대해 강단사학은 함흥평야 또는 길주 이남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일본인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등의 반도사관을 지금껏 추종하는 것에 불과하다.
공험진의 위치에 대해 『고려사』 「지리지」는 “선춘령 동남쪽, 백두산 동북쪽, 혹은 소하강蘇下江변에 있다고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백두산 동북쪽에 있다는 기술은 공험진이 지금의 함경남도에 있을 수 없음을 말해준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수빈강愁濱江에 대해서 “두만강 북쪽에 있는데, 그 근원은 백두산 아래에서 나오는데, 북쪽으로 흘러서 소하강이 되어 공험진·선춘령을 지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공험진은 두만강 북쪽으로 688리 지점인데, 이 때문에 통상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이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식민사관에 빠져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에 있던 고려 강역 공험진을 남쪽으로 1천리도 더 넘게 끌어내려 역사지식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왕 14년(1388) 명나라에서 요동백호遼東百戶 왕득명王得明을 고려에 보내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통보했다. 철령위 위치에 대해 현재 남한 강단사학계는 함경남도 안변의 철령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 또한 조선총독부의 이케우치 히로시가 반도사관에 따라 함경남도 안변에 철령鐵嶺이 있는 것에 착안해 왜곡한 것을 아직껏 추종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명나라의 정사인 『명사明史』 「지리지」 ‘요동도지휘사사’도 철령위를 함경도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철령위: 홍무洪武 21년(1388:우왕 14)에 철령성을 설치했다가 26년(1393) 옛 은주·州:현 요녕성 철령시)로 옮겼다. 철령은…서쪽에 요하遼河가 있고, 남쪽에 범하汎河가 있는데 모두 요하로 들어간다…동남쪽에 봉집현奉集縣(현 심양 남쪽 진상둔진)이 있는데, 옛 철령성 자리이고, 고려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명사』 「지리지」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
『명사』는 철령위 서쪽에 요하가 있다고 말한다. 명나라 때 요하는 지금의 요녕성 요하이고, 요하의 지류인 범하는 요하로 합류한다. 『태종실록』 5년(1405) 5월 16일조는 태종이 김첨을 통해서 “공험진 이북은 요동으로 환속하고 공험진 이남에서 철령까지는 그대로 본국本國(조선)에 붙여달라”는 태종의 요청을 명 태조가 받아들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는 고려 말 우왕이 명 태조 주원장에게 확인 받았던 철령~공험진까지였던 고려의 국경선이 그대로 조선의 국경선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때의 철령은 지금의 요녕성 심양 남쪽 진상둔진이고, 공험진은 흑룡강성 영안 부근이다. 조선 후기 지도에도 공험진 선춘령은 두만강 북쪽 700리라고 명기하고 있다. 이케우치 히로시가 한국사의 강역을 축소시키기 위해 왜곡한 학설을 지금껏 남한 강단사학계가 추종하면서 각종 국사교과서에도 고려 국경이 함경남도까지였던 것으로 왜곡하고 있다. 윤관이나 우왕, 태종이 지하에서 통곡할 노릇이다.
이완용의 비서 이인직과 국사교과서
이인직은 국사교과서에서 신소설 《혈의 누》를 쓴 선각자로 가르쳐왔다. 《혈의 누》의 내용은 청일전쟁 때 청나라 군사에게 겁탈당할 뻔한 조선 처녀를 일본군이 구해준다는 내용이다. 을사늑약으로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긴 이후인 1906년부터 《만세보》에 연재되었으니 대한제국을 빨리 점령해달라는 정치소설이었다.
1910년 일본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3대 통감으로 부임하자 데라우치가 합방청원을 제출하던 일진회와 손잡고 대한제국을 병합할까 다급해진 이완용은 비서 이인직을 시켜 나라를 팔아먹는 비밀협상을 하게 했다. 이인직은 도쿄 유학 시절의 스승이었던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츠 미도리小松綠를 만나 비밀협상을 수행했다. 고마츠가 나라 팔아먹은 한국인들에게 귀족의 작위를 주고 막대한 은사금도 줄 것이라고 말하자 이인직은 “그런 관대한 조건이라면 이완용도 만족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완용과 조중응이 망국협상 조인을 위해 데라우치를 만났을 때 유일한 이견은 데라우치가 고종·순종의 지위를 일본 황실의 일원인 ‘이왕李王’으로 봉하겠다고 하자 이완용이 왕이 아니라 ‘대공大公’으로 격하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이런 매국의 역사가 생성되는 이유는 해방 이후 식민사학자들이 남한 역사학계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식민사학의 특징은 한국사를 시간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축소하는 것이다.
식민사학은 한국 고대국가들의 성립연대를 끌어내려 시간을 줄이고, 한반도 북부의 한사군과 남부의 임나일본부를 통해 공간을 줄인다. 이 책에서는 서기 4500년경 시작된 홍산문화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시원을 추적하고, 반도를 넘어 대륙과 열도를 자유롭게 넘나들던 우리 역사를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