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 일문과 졸업. 2002년 계간 《리토피아》 신인상(수필)으로 등단. 역서로 《기러기》(모리 오가이, 리토피아, 2006), 《라쇼몽》(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문예출판사, 2008) 등이 있고, 저서로 《그와 나 사이를 걷다-망우리 비명으로 읽는 근현대인물사》(골든에이지, 2009, 문광부 우수교양도서)가 있다. 블로그 ‘일본문학취미’(blog.naver.com/japanliter)는 2003년 문예진흥원이 선정한 우수문학사이트이다. japanliter@naver.com
나는 고양이, 이름은 아직 없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어디선가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곳에서 야옹야옹 울던 기억만 남아 있다.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사람이라는 동물을 보았다. …… 서생이라는 자는 때때로 우리를 잡아서 삶아 먹는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별로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p.7
의무가 없는 것을 알자마자 아저씨는 갑자기 마음이 가벼워진다. 책임이 없다는 걸 알면 모반의 연판장에도 이름을 써넣겠다는 표정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렇게 저명한 학자가 많이 가입한 곳에 자기 이름을 입적시키는 것은 지금까지 이런 경험이 없는 아저씨에게는 무한한 영광이므로 대답에 힘이 들어간 것도 무리는 아니다.---p.61
아무리 남이 보지 않는 장소라도 고양이와 좌석 쟁탈을 벌였다는 것은 다소 인간의 위엄에 관계된다. 정색을 하고 고양이를 상대로 옳고 그름을 다투는 것은 아무래도 점잖지 못하다. 웃긴다. 이 불명예를 피하려면 다소 불편을 참아야 한다. 그러나 참을수록 고양이에 대한 증오는 늘어나니, 스즈키 군은 때때로 내 얼굴을 보고 인상을 찌푸린다. 나는 스즈키 군의 불만스런 얼굴을 보는 것이 재미있으므로 웃긴 생각을 억누르고 가급적 태연한 얼굴을 한다.---p.171
사물은 보기 나름이므로 아저씨의 성난 소리를 단지 흥분의 결과로 판단할 필요는 없다. 만 명 중에 한 사람 정도는 다카야마 히고쿠로가 산적을 꾸짖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석해줄지도 모른다. 본인 자신도 그런 생각으로 한 행위인지 모르나, 상대가 산적을 자임하지 않은 바에야 예기한 결과는 나오지 않는 게 당연하다.---p.302
다행히도 아저씨처럼 내 털을 걸핏하면 거꾸로 쓰다듬으려는 비뚤어진 괴짜가 있어 이처럼 웃긴 장면도 볼 수가 있는 것이리라. 아저씨 뒤만 쫓아다니면, 어디를 가든 무대의 배우가 재미있는 연극을 보여줄 것이다. 재밌는 남자를 주인으로 모시게 되어 짧은 고양이의 삶이지만 꽤 많은 경험이 가능하다. 고마운 일이다. 이번 손님은 누굴까
아직 이름은 없는 고양이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기억은 없지만 교사의 직업을 가진 아저씨의 집에 기거하면서 인간이라는 족속을 관찰하고 연구하기 시작한다. 신경성 위염을 앓는 아저씨의 고상한 취미와 친구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고양이는 중요하지 않은 일에 진지함을 보이는 그들을 비웃기도 하고, 근대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일본의 지식인들의 고뇌를 엿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