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저를 매혹시켰던 책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되지요.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진실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뿐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맞아요. 처음에 나는 그 진실이 없으면 죽을 것만 같았는데 이제 그것을 간직하면 여기서 내가 죽을 것만 같더군요. 그 책은 진리를 말하고 있었던 것예요. 모든 것은 변한다.
저는 그 구절만 빼놓고 그 책에 있는 모든 것들을 믿었지요. 그 책이 나에게 주었던 진실이 진실인 것만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어리석게도 생각했던 거예요. 세상에. 이 세상에 변하지 않고 언제나 거기 있어주는 것이 한가지쯤 있었으면 했지요. 그게 사랑이든 사람이든 진실이든. 혹은 나 자신이든...... 나는 기대어 서 있고 싶었나봐요. 존재란 건 원래 머무르고 싶어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페루로 갔습니다.
--- p.176
우리의 결혼이 대책없는 파국으로 치달을 즈음 나는 그때의 그에게 소리쳤다. 죽여버리겠어! 언젠가 네가 내 앞에서 천천히 죽어가는 걸 보고 말겠어! 그리고 나는 욕조에 거꾸로 처박혀진다. 내 삶이 영화가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필름을 되돌릴 수 있었다면 나는 보게 되리라. 산발을 한 머리칼과 깨어진 병에 찔린 발가락에서 흐르는 피. 졸린 목에 남아 있는 검붉은 손가락 자국, 그리고 증오로 생생하게 번득이던 눈빛을.
--- p.203-204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내 가슴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나는 몰랐었다. 내가 거짓말을 하거나,내가 엄마의 월남치마 주머니에서 십원을 훔쳐내어 하드 사먹은 걸 엄마가 눈치챈 것 같을 때만 가슴이 뛰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내 가슴은 뛰고 있었다.
--- p.21
빨간 불로 바뀌어 차가 멈추어 있는 짧은 시간에도 휴대폰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왜냐하면 모든 사랑은 사실 허망하므로 이 순간만이 전부라는 걸 나는 이제 알고 있는 까닭이다...그러므로 예전의 나는 사랑을 믿지 않았지만 이제 나는 사랑하는 나 자신을 믿지 않는다...
--- p.183
그의 미소는 점점 더 애매해졌고 그는 자신이 더이상 진지하게 사람들을 대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신조에 의하면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것은 물론, 진지하게 한사람 한사람을 대하지 못하는 것은 죄악이었다. 게다가 강연 요청은 쏟아져서 그는 그중의 대부분을 거절해야만 했는데, 그런 뒤에는 으레 그가 오마방자해졌다, 라는 말이 떠돌아자니곤 했다.
--- p.217
그는 차창으로 달려드는 하늘을 보면서 그날의 바닷속을 생각했다. 그러자 문득, 만일 우리가 사는 세상도 하나의 바닷속과 같다면 지금 저 하늘 위의 세상에는 폭풍우가 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우리가 하늘이라고 부르고 있는 저것이 만일 다른 세상의 수평선 같은 것이라면...... 거기서도 누군가가 태어나고 죽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면...... 흔들리는 촛불이 밝혀진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치르던 그날은 바람이 많이 불었다.하필이면 먼바다에 폭풍경보가 내려지고, 거리의 가로수 몇개가 뿌리째 뽑혀나간 날이었다.
--- p.112
그 여자는 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그 애를 위로해 주어야할텐데. 난 그 애에게 남은 유일한 피붙이인데. 그 여자는 피곤한 눈을 감았다. 그도 아니면 택시를 타고 온 남편이 택시비를 가지고 아파트 입구로 내려오라는 그런 전화를 할 수도 있었다. 술에 취한 남편은 곧잘 그러곤 했으니까. 집 앞에 와서 전화를 했는데, 택시비도 없이 택시를 타고 와서 전화를 했는데 아무도 받지 않으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그러니 잠들지 말아야지. 아주 잠들지는 말아야지. 그러면서 그녀는 곧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 p.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