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새로 짓거나 고치기 위해 수많은 그림을 그리는 동안, 삶의 방향을 확인하고, 그 안에 담길 날들을 상상하며, 우리다운 삶을 명확히 규정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새로운 다짐과 의지로 완성했다고 여긴 집에서 마주한 건, 결핍과 비뚤어진 보상심리 같은 과거였고, 그것으로 인해 불편한 지금이었다. 결국 불편해진 집을 몇 해에 걸쳐 하나하나 다시 고쳤다. 그 과정에서 바랐던 나와 바라는 나를 모두 내려놓았고, 비로소 홀가분하고 적당히 만족스러운 내가 될 수 있었다. 그제야 진짜 나에게 맞는 삶이 어떤 건지도 알게 됐다. 나의 전부를 바라보는 일도 ‘집’을 통해 비로소 가능해졌다. 내가 살아가는 ‘지금, 여기’에서 말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우리가 그린 집들에는 ‘우리’가 없었다. 아니 그 안에서 꿈을 키우고 행복을 만들며 편안한 미소를 짓는 우리는 없었다. 집들이를 하며 남들의 감탄사에 우쭐대는 우리만 있었다. 남들이 뭐라 하건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왜 내가 아닌 남에게 집중했던 걸까. 타인의 눈총이나 잔소리쯤은 가볍게 무시하고 스위치를 꺼버리면서도, 타인에게 으스대는 일만큼은 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던 걸까. 그럴 수 없던 상황에서 내내 주눅 들고 쪼그라들었던 욕구가 이때다 싶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던 걸까. 내게 정말 그런 게 있었단 말인가. 얼굴이 확 붉어졌다.
--- p.30
내가 살아갈 공간을 단번에 알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스스로 만들어가는 그 공간이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짠’ 하고 마무리되지 않는 건 당연하다. 생각 혹은 상상과 실제 사이의 간극이 큰 건, 지극히 당연하다고 인정하기로 했다. 다행스러운 건 그걸 인정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는 거고, 더 감사한 건 그 과정에서 내가 알지 못했던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거다. 그러니까 고쳐 지은 집을 다시 바꿔가는 과정은, 집이 돌아보게 한 나를 발견하고 인정하고 보듬고 떠나보내는 과정이기도 했다.
--- pp.60-61
늘 자신감이 넘치고 한없이 밝기만 하던 그 친구들의 방은 내 방과 너무 달랐다. 창에는 예쁜 커튼이 달려 있고, 커튼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어와 방을 환히 밝혔으며, 음악이 크게 울렸고, 취향을 잔뜩 드러낸 그림과 소품, 그리고 환하게 웃는 가족사진과 가족들의 사랑을 먹고 자란 귀여운 어릴 때 사진들이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환하고 소리가 있고, 온전히 자유롭고 독립적인 방은, 늘 소리 죽여 어둡게 웅크리고 있던 내가, 이방인조차 될 수 없던 내가 꿈꾸던 것이었고, 마흔이 다 되도록 떨쳐내지 못한 내 불쌍한 결핍이었다. 우습게도 내 집을 마련한 마당에, 채워지지 않은 결핍을 이제라도 보상받겠다고 나는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문을 달 수 없으니 방이랄 것도 없지만, 내 안에서 더는 성숙해지지 못했던 사춘기 소녀는 그렇게, 드디어,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 pp.68-69
며칠간 물건을 정리하느라 나는 과거의 시간을 살아야 했다. 하나하나 그 물건들에 담긴 기억을 떠올리고 그때의 나와 만났다. 그때로부터 나는 잘 흘러와 지금의 내가 되었노라고, 어둡고 축축하고 푸른 안개에 휩싸여 있던 겨울은 봄을 지나 여름이 되었노라고, 그 겨울을 잘 버티고 봄으로 여름으로 걸어 나와 주어 고맙다고, 이제는 여름의 언어로 여름의 노래를 배우겠노라고, 그리하여 무성한 초록을 잘 가꾸겠노라고, 그러니 서러워하지 말고 잘 가라고, 인사를 했다. 여태 그 어떤 헤어짐보다 온전하고 아름다운 이별이었다.
--- pp.81-82
알맞게만 있으면 된다.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된다. 불편하지 않은 정도가 알맞음의 기준이지 않을까. 물건이든, 공간이든, 관계든, 일이든, 전부 말이다.
불편하지 않음에도 부족하다 느끼는 건 마음이 다른 곳을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배고프지 않지만 공복을 느끼는 뇌처럼 말이다. 그 공복을 이기지 못하고, 또는 혀에서만 좋은 순간의 행복이 그리워 먹은 야식들은 결국 해롭다. 몸에건 삶에건 군살을 찌우는 건 좋지 않다. 몸에 찌는 군살은 왠지 내 소관이 아닌 듯하니, 부디 삶에 찌는 군살만큼이라도 잘 관리해야겠다.
--- p.101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무기력하기만 하다고 여겼던 서른 즈음의 나는 우울증을 앓았던 것 같다. 누군가의 인생에 한 번쯤은 안개가 짙게 드리우는 시간이 있기 마련인데, 그러니까 내게는 그때가 그렇다고, 그렇게 안개를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는 해가 그리워, 안개를, 습한 우울을 한 번쯤 바싹 말려보고 싶어서, 해를 찾아 여행을 떠났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해를 찾아 멀리 길을 나서지 않아도 된다. 아니 공원이나 산책로조차 필요 없다. 해가 우리 집으로 찾아오는 시간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해가 손바닥만 한 마당에 온전히 들어차는 시간을 기다렸다 버선발로 나가 반기기만 하면 된다.
--- pp.208-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