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마을 북키드가 한국학의 석학이 되기까지,
동·서양 고전의 그 짜릿한 탐닉과 탐독, 그리고 탐식의 세계!
일제 강점, 한국전쟁, 유신정권… 세월은 변해도 변하지 않는 단 한 가지. 그것은 멈출 수 없는 지식의 쾌락! 김열규 교수, 그에게 독서는 앎이자 삶이었다. 강단에서, 자연 속에서 일흔을 훌쩍 넘긴 노 교수의 열정적 책 읽기! 행간의 삶을 읽어라, 시대의 물음은 책 안에 있다!
* 저자 인터뷰
* 질문 1: 그동안 선생님은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와 『한국인의 자서전』, 『욕』과 『한국인의 화』 등을 발표하면서 한국인의 삶과 죽음에 관해 천착해오셨습니다. 그 연구과정에서 선생님에게 한국인은 어떠한 존재이고, 한국인의 삶의 궤적은 어떠한 것입니까?
* 김열규 선생님: 한국인과 그 문화를 남달리 많이 들여다본다고 애를 쓴 셈인데, 그러다 보니 점점 더 깊은 미궁에 빠지고 만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한 마디로 잡아내면, ‘어깨와 허리 그리고 온 몸으로 떠받친 짐의 부피며 무게만큼 그들 삶의 보람을 빚어 온 사람’, 그 쯤 될 것 같습니다.
* 질문 2: 연구 과정에서 무수한 책들을 섭렵하셨는데, 선생님에게 책은 어떠한 존재입니까? 특히 일제 강점기의 유년시절과 한국전쟁기의 청소년 시절 그리고 유신시절을 겪으셨습니다. 그 파란만장한 한국현대사 속에서 선생님에게 책은 어떠한 존재였습니까?
* 김열규 선생님: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으로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았습니다. 인간보다 이데올로기를 중시되었던 시기였고,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공포의 날들을 보내며 혹독한 전쟁과 기아를 견뎌내야 했던 시기였습니다. 그 당시 책은 내게 역사와 현실에 마주 대하는 방패였는가 하면, 환난을 피하는 피난처 구실을 하기도 했습니다. 내 삭지 못하는 분노의 불길을 꺼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내일을 꿈꾸게 해주었습니다.
또한 책은 내 삶의 정신적 스승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언문 제문>은 제가 한국인의 삶의 궤적을 연구할 수 있게 한 계기가 되었으며, 젊은 시절 읽었던 소로의 『월든』이 계기가 되어 16년 전 낙향하여 지금도 자연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 질문 3: 선생님이 살아오셨던 시기에는 책이 매우 없는 시기였는데, 지금은 책이 넘쳐나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책을 읽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책을 읽지 않는 풍토에 대해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 김열규 선생님: 나의 성장기는 굶주림의 시대였으나 책이 있어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풍요롭지만 정신과 교양은 굶주림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배는 부르고 있으나 그와 반비례해서 머리가 기아 선상을 헤매는 도수가 커지고 있다 하겠습니다. 가슴이 쪼르륵대는 소리가 커져 가고 있습니다. 한데도 그에 대한 자각증이 없는 게 인간성과 인품과 교양의 고갈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각자 우리들의 정신과 정서 그리고 영혼을 스스로 등지는 ‘자기 배신행위’의 정도가 날로 커져 가는 것 같습니다. 그건 필경 ‘자기 포기’가 되고 말 것입니다.
* 질문 4: 요즘 출판계에서는 IMF보다 더 큰 불황이라고 하소연을 합니다. 이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김열규 선생님: 독자들은 ‘자기 배신행위’에 대한 경각심을 느끼며 정신과 교양의 굶주림을 채워야 할 것이고, 출판은 양서만이 희망이란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찍어내면 팔리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책의 홍수의 시대입니다. 독자의 마음을 울리고 시대의 물음을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 질문 5: 요즘은 논술에 집중해서 중·고등학생들이 요약된 책들만 읽고 숙독이나 완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숙독과 완독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김열규 선생님: 한권의 책을 다 읽고는 가슴에 품는 그 감동, 그때 완독은 읽는 독자의 정신과 영혼이 또 한 차례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한권의 책을 속속들이 꿰뚫어서 글자 겉으로는 안 드러나는 그 깊은 속내를, 레이저 빔으로 비쳐 내듯이 읽어 낼 바로 그때, 그 숙독에서는 책이 더 이상 저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건 독자 자신의 몫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제가 2부의 4장의 제목을 ‘이미 내 것이 되어버린 책들’이라고 지은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그 주옥같은 고전들을 다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을 때, 그때는 그 작품이 이미 그 작가의 것 즉, ‘그의 것’이 아닌 ‘나의 것’이자 ‘우리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 질문 6: 답변에서 약간 언급하셨지만, 선생님은 소로의 『월든』을 읽고, 지금은 경남 고성에서 자연적인 삶을 살고 계십니다. 책이 독자들에게 주는 영향은 어떤 것입니까?
* 김열규 선생님: 가끔은 제가 책 안에서 주인공처럼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삶의 고통과 마주치면 릴케가 저 만큼 앞을 가고 있고, ‘걷기 반, 생각에 묻히기 반’ 하다 보면 헤세가 나를 지켜보고 있곤 합니다. 숲에서 푸른 정서에 사무치면, 로버트 프로스트가 쉬었다 가자고 운을 떼곤 합니다. 물론 소로가 프로스트와 어깨 나란히 하고 있을 때도 드물지 않습니다. 뜬금없는 이야기같지만, 이는 분명 책만이 줄 수 있는 지식의 쾌락입니다. 쾌락은 다양한 것들이 많지만, 지식의 쾌락만큼 짜릿하고 남 부끄럽지 않은 것은 없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