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철학자의 사상이 그의 삶 전체와 일치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어느 누구든 삶에는 우여곡절이 있을 것이요, 어느 한 인간의 사상일지라도 나름의 편력이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를 부르짖던 한 청년이 나이가 들어 ‘전혀’ 정반대의 사상을 피력한다는 것도 매우 드문 일이다. 적어도 그가 역사에 남는 철학자라면 말이다. 헤겔은 바로 이렇게 매우 드물고 기이한 평가에 시달린 철학자들 중에 속한다. --- p.9
이제 이 책의 뚜렷한 결론은 오히려 이렇다. 철학자 헤겔은 실제 삶의 헤겔과 ‘일치’한다. 비록 성숙한 헤겔의 어조는 절제되었으며, 그 표현은 신중하게 선택된 것일 수 있어도 자신의 신념을 저버리면서까지 현 상황과 타협한 증거는 없다. 이 책은 이렇게 교정된 헤겔 상을 생생하게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이다. 이를 위해 그간의 연구 성과들을 소개하는 데 멈출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이를 토대로 헤겔이 『법철학 개요』를 둘러싸고 벌였던 논적들과의 대결을 재조명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삶과 일치하는 철학 또한 생동하는 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 p.12
헤겔에 따르면 오늘날 ‘교양의 엄청난 진일보’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무엇보다 ‘사람이 사람을 인간으로, 이미 인격으로 고찰’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리스 로마에선 그렇지 못했다. 근대에서야 비로소 ‘인간이라는 사실이 최고의 법’이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법이 객관적 현실성으로서 힘을 지녀야 한다. 인간이 곧 인격이라는 사상은 역사 속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철학적으로도 보편성을 지니는 개념이다. 그렇기에 철학적 법 개념은 이제 인격 자체에서, 그것도 자유를 본질로 하는 인격 자체에서 다시 쓰이고 정돈되어야 한다. 법전은 바로 모든 인격의 자유의 보장이어야 한다. --- p.145
지금까지 살펴본 헤겔의 군주를 오늘날 제도화된 대통령이나 수상으로 대체해 다시 읽어 보는 것은 추천할 만하다. 자연적 세습성이 가져다주는 여러 혜택을 제외한다면 군주에게 부여된 정치적 역할은 사실 오늘날의 대통령이나 수상보다도 ‘못한’ 것이다. 이러한 역할에 만족시키기 위해 『법철학 개요』는 군주를 수식하는 미사여구들을 심심찮게 사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겉치장은 당시 정치 역사적 맥락에서 본다면 입헌 군주제를 받아들이게 하려는 헤겔의 정중한 타이름일 경우가 많다. 그러나 군주는 법전을 공포하고 부여할 수 있을지언정 제정하는 자는 아니다. 현대 독일 연구자들이 그 정치적 역할에 있어 헤겔의 군주를 오히려 독일 연방대통령에 가장 잘 들어맞는 것으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헤겔과 그 적들』은 동시대 철학자들과 헤겔의 대결구도를 묘사하면서 헤겔이 프로이센 정부를 옹호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프리스, 왕정복고를 지지하는 사비니와 할러, 신의 인격성을 국가의 토대로 내세우는 슈바르트와 슈탈, 칼 슈미트의 독재론 등은 헤겔의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법과 현실의 전반적 관계를 파악할 수 있으며 19세기 초 유럽의 정치적 긴장과 변화를 흥미진진하게 접할 수 있다. 이 책은 전문도서임에도 쉽게 읽히며 은연중에 독자들을 철학적 문제로 안내하는 장점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