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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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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3월 16일
쪽수, 무게, 크기 420쪽 | 548g | 140*210*25mm
ISBN13 9791158791315
ISBN10 115879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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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뛰어난 기획자에, 기막힌 카피를 쓰는 카피라이터이고, 그에게 비용을 지불할 클라이언트에게 절대로 패하지 않는 말 상대였다. 하지만 그의 직원이 찾아와 오늘 저녁 일찍 퇴근해야만 하는 피치 못할 사정을 얘기할 때 그는 짜증이 치솟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다. […] 그는 코칭을 받고, 강좌를 듣고, 자기 최면을 걸고, 자신이 어떻게든 해낼 것이라고 확신하는 데 안간힘을 썼다. 그럼에도 그의 몸과 마음은 자신이 확장시키고 있는 잘못에 점점 더 반응했다. 그 분야의 전문가라고 저절로 훌륭한 리더가 되지는 않는다. […] 좌절이라는 세포가 암세포처럼 그의 몸의 기관들을 먹어 삼켜버렸다. […] 단은 탈진으로 가는 길에 확실하게 안착했다. 처음 나타난 증상을 그는 무시했다. […] 전 세계에서 열리는 콘퍼런스에 참가했고, 야심 찬 광고캠페인을 계획했고, 전문가들이 나와 소비와 라이프스타일에 대해 조언하는 [당신의 스타일을 보여줘]라는 TV 프로그램에 고정 패널로 출연했다. […] 9월이 끝나가는 어느 날 아침 눈을 뜬 순간 단은 자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출근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을 알아챘다.
--- pp.25-27

“그럼 시작하자고. 나한테 원하는 게 뭔가, 플레밍?” 단은 다리를 의자에 올려놓고 두 손을 목 뒤로 깍지 꼈다. […] “내가 여기 온 건 부탁이 있어서야. 평상시 같으면 부탁 같은 건 안 할 테지만 알다시피 이번 상황이 예사롭지가 않아서. 이번 사건의 피해자는 이름과 주소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게다가 범행 장소도 하루 종일 사람들이 비교적 많이 드나드는 곳이야. 그런데 이 사람들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소식통이 우리한테 있잖아. 회사 내부 외부 사정에도 훤하고 심지어 출입문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까지도 다 아는. 게다가 확실한 알리바이까지 있지. 단, 네가 우릴 도와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어. 네가 직원들에 대해 얘기해주면 수사 시간을 엄청나게 단축시킬 수 있을 거야. 직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누가 누구와 잠자리를 갖는지, 누가 누굴 싫어하는지 등등. […]”
--- p.49

“흠, 네가 눈치 못 챌 줄 예상했어.” 단이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승자의 자부심이 약간 숨어 있었다. “릴리아나는 가진 게 없잖아. 쓰던 물건도 전부 해지고. 주방 수납장도 텅 비었고, 침대 시트는 너무 낡아 금방이라도 구멍이 날 지경이고. 그런데도 냉장고에 아주 비싼 프랑스산 샴페인이 있고 잠옷은 완전히 새거야. […].”
“릴리아나가 돈 많은 애인이라도 있었다는 말인가?” 플레밍의 목소리엔 빈정거림이 묻어 있었다.
[…] “네가 놓친 게 있어. […] 샴페인 병에 로고가 새겨져 있었지. 못 봤어? […] 그 샴페인 병은 작년에 회사 창립 10주년 행사 때 제작됐어. 쿠르트&코와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 손에만 들어갈 수 있는 제품이야.”
--- pp.96-97

“지금 막 들은 얘기야.”
“무슨 얘기를 하다가?”
“엘리사베트 룬과 수세미컴퍼니 얘기를 하다가…….” 단의 말문이 갑자기 막혔다. 자기가 완벽하게 바보짓을 했다는 걸 즉각 깨달았다.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다안?” 플레밍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내가…… 아…….”
“너 엘리사베트한테 설마 우리가 메레테 핀센한테 가는 길이라고 말한 건 아니겠지?”
“그게 아니고, 그냥…… 그냥 그게, 근데…….”
“이런 빌어먹을! 보세 형사, 당장 프레데릭스베르 경찰서에 전화해서 메레테 핀센 집으로 출동하라고 해! 아직 도망치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 형사가 다른 경찰에게 지원 요청하는 소리, 아마추어 탐정의 실수에 욕을 퍼붓는 소리를 전화기 너머로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들이 단을 위해서 이 상황을 보여주는 건지, 아니면 차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소동을 단이 듣고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건지 단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몇 분이 지나는 동안 아무도 단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단은 마치 정당한 벌이라도 받는 양 건물 밖에 가만히 서서 매서운 추위를 견뎌내고 있었다.
--- pp.122-123

플레밍은 대충 정리가 된 신문지 뭉치를 뒤집어 앞면을 살폈다. 일순간 그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가 염려했던 것보다 상황이 훨씬 더 심각했다. 엄청나게 선명한 단의 컬러사진이 실려 있었는데, […] 플레밍은 한때 단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카리스마와 침착함, 그리고 천성적인 자신만만함을 생각하자 갑자기 횡격막이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 지면 상단에 ‘지역 경찰은 TV2의 라이프스타일 전문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 처지’라는 헤드라인이 달려 있고, 사진의 아랫부분에는 ‘대머리 탐정’이라는 표제가 대문짝만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그리고 신문 하단 귀퉁이에 플레밍의 사진이 조그맣게 나와 있었다. 그는 한 손에 담배를 들고 쿠르트&코 회사 앞에 서서 전화통화를 하는 중이었는데, 거센 바람에 그의 머리칼을 비롯해 코트와 목도리까지 모두 한 방향으로 펄럭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헤매는 사람 같았다.
--- pp.177-178

단은 자신이 우울증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나자, 자신의 불신을 우울증 탓으로 돌리려고 애썼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지은 죄와 오만함 때문에 천벌을 받아 의처증이 생긴 거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결백한 플레밍이나 정직한 마리아네는 아무 잘못도 없고 모든 게 멍청한 자기 탓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볼 때마다 자그마한 불신의 벌레가 어느덧 그의 마음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 그의 의심이 옳은지 아닌지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 상자를 열면 튀어나올 진실이 너무나 많았다. 세 사람 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오랜 세월 더없이 효율적인 것으로 입증된 기술을 고수해왔다. 즉, 침묵했다.
--- pp.199-200

“지금 단 소메르달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는 거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왜 그러시는데요?”
“우리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로봇 플레밍과 대머리 탐정’이라는 연극 공연을 할 거라는 소문을 들었거든.” […] 플레밍은 귀가 빨개져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
잠시 후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단의 휴대전화 번호가 떴다. 플레밍은 초록색 통화버튼 위에서 엄지를 댈까 말까 주저하다가 빨간 버튼 쪽으로 엄지를 옮겼다. 그는 또다시 잠깐 망설이다가 빨간 버튼을 터치했다. 통화수신이 거부되었다.
단은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의 휴대전화를 응시했다. 수신 거부라고?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단은 한참을 고민한 끝에 첫발을 내딛기로 결심하고 플레밍과 모든 정보를 공유할 참이었다. 그런데 죽마고우에게 음성메시지를 남길 기회조차 주지 않고 수신 거부를 하다니!
--- pp.239-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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