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어떻게 죽음을 맞을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사실 우리 모두는 형태는 약간 다르지만 육체적으로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노인성 질병으로, 아니면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육체적으로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확실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영적인 생명, 인격, 품격, 마음, 정신, 영혼의 삶은 죽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아주 새로운 삶을 지속할 것입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성경이 그렇게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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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대학에 들어가 번듯한 직장을 잡고, 집 사고 차 사는 일도 중요해 보이지만, 이것들은 마지막에 지고 갈 수도 없고 의미 있는 유품도 아닙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는 서로 정말로 사랑했던 기억이 남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기억,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뜻한 온기로 남은 기억이 소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와 교우들과 얼마나 좋은 사이로 지내고 있나요? 혹시 서먹서먹하거나 앙금이 남아 있거나 가슴 먹먹한 통증이 있지는 않은가요?
좋은 관계, 화목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화해와 용서가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이 용서가 간단하지도 않고 쉬운 문제도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통해 이 용서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용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강력한 능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용서의 메시지는 복음의 핵심이며 우리 생활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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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들어가서 주위를 한번 살펴보십시오. 죽어 가고 있는 나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잎의 색깔이 다르고 줄기도 벗겨지고 있습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는 생명을 잃게 됩니다. 하지만 주위를 바라보면 이제 새싹이 나고 새롭게 자라나는 조그만 나무도 있습니다. 이렇게 나무는 죽기도 하고 새롭게 태어나기도 합니다. 숲속에서는 끊임없이 생명이 죽고 태어나고를 반복합니다. 이것은 잡초, 꽃, 동물,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정해진 기간이 있습니다. 자연은 주기적으로 밤과 낮이 바뀌고 계절이 바뀌며 생명의 순환이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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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교회가 취한, 자살자들의 시신과 유족들에 대한 엄격한 입장은 성삼위 하나님의 긍휼의 정의를 무시한 채 생명의 복음을 지나치게 경직되게 해석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자살을 정당화하지 않으면서 사람의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긍휼의 정의에 기대어 함께 애도하고, 비탄에 빠진 이웃들을 치유로 인도하는 공동체 회복의 예식은 복음의 근본정신에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살아남은 자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괴롭고 슬픈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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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외면하고 터부시하는 현대인은 유언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언을 준비하지 못하고 죽습니다. 유언 상실이란 사실 꿈과 이상과 삶의 목표를 상실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유언 작성은 단순히 죽음을 실제적으로 준비함을 훨씬 넘어서 삶의 이상과 꿈과 목표를 세우고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유언장에 대해 부정적인 선입견이 있습니다. 유언장은 부자들이 주로 쓴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죽음을 연상케 하기 때문에 노인이 되어서나 작성해 보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비전 유언장’입니다.
비전 유언장은 죽음 준비가 곧 삶의 준비라는 신념으로 출발합니다. 비전 유언장은 일반적으로 유언장이 갖는 부정적 이미지를 벗어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새로운 삶을 살도록 준비하기 위한 계기를 마련해 줄 것입니다. 또한 비전 유언장은 일반적인 유언장의 큰 목적인 ‘재산분배’ 대신에 돈이나 재산 외의 유산에 관한 정리와 전승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비전 유언장에서의 유산이란 포괄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추억의 유산, 관계의 유산, 가치관의 유산, 리더십의 유산, 노하우의 유산, 자선의 유산 등 많은 무형의 가치들을 포함합니다.
--- p.247~248
인생의 방황과 신앙의 구원을 경험한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인간이 진정한 자기를 알게 되는 것은 오직 죽음과 대면할 때뿐”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삶을 생각할 때 막연한 것이 죽음 앞에 설 때 명료해지는 것이 인간 삶의 역설(paradox)일 것입니다. 실제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직면할 때 삶의 의지가 강하게 살아남을 경험합니다. 그렇다면 『죽음 교양 수업』은 인생의 마지막 때가 아니라 인생 시작과 함께 그리고 인생 한복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 p.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