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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메모

아무튼, 메모

: 이것으로 나의 내일이 만들어질 것이다

아무튼, OO-028이동
정혜윤 | 위고 | 2020년 03월 09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8.4 리뷰 127건 | 판매지수 3,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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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3월 09일
쪽수, 무게, 크기 166쪽 | 188g | 110*178*15mm
ISBN13 9791186602515
ISBN10 118660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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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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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빈 공간에 단어를 써놓는 것의 의미는 생각보다 크다. ‘친구’라고 쓰면 나는 그 단어 속으로 들어가버리고 싶다. ‘무지개’라고 쓰면 그 단어를 보고 싶다. 그런 단어들은 아주 많다. 흑조, 4월의 눈, 호랑가시나무, 러시아식 꿀 커피. 나는 그 단어들을 여행의 단어들이라고 불렀다. 내 몸이 아니라 내 마음을 움직이는 단어들이었다. 각각의 단어들에는 사연이 있다. 그러나 내가 왼편에 얼마나 멋진 문장들을 옮겨 썼든 나의 삶은 오른쪽 페이지에 아직 완전히 쓰이지 않은 채로 있었다. 그 엉성한 생각들은 좀 더 정교해지고 정확해지다가 언젠가는 현실이 되어야 했다. 나는 점점 더 쓰이지 않은 페이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 익숙해졌다. 나는 과거보다는 미래를 생각하고 싶었다. 내 메모장의 여백이 현실보다 더 중요한 현실 같았다. 먼 훗날 나는 보르헤스가 이것을 아주 멋진 문장으로 표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단어를 읽지만 그 단어를 살아낸다.”
--- p.38

비록 내가 쓴 글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지만 일기도 메모로서 분명히 장점이 있다. 자기 자신을 보게 만든다. 과거를 돌아보게 한다.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야말로 도덕적인 것의 출발이다. 자신의 못난 점을 인정하는 것도 대단한 용기다. 그러나,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나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는 나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 좋다. 내 속을 들여다보는 것보다는 내 속에 들어오는 이야기들에 빠지는 것이 더 좋다. 내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새로 포착한 문장이 나를 보게 만드는 것이 좋다. 그때 쓴 것과 비슷하게 재현하면 이런 메모들이 나올 것 같다.
--- p.58

혼자서 메모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우리는 사회적 존재다. 메모는 재료다. 메모는 준비다. 삶을 위한 예열 과정이다. 언젠가는 그중 가장 좋은 것은 삶으로 부화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메모할지 아무도 막지 못한다는 점이다. 분명한 것은 메모장 안에서 우리는 더 용감해져도 된다는 점이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더 꿈꿔도 좋다.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쓴 것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어떻게 살지 몰라도 쓴 대로 살 수는 있다. 할 수 있는 한 자신 안에 있는 최선의 것을 따라 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있지 않은가. 자신 안에 괜찮은 것이 없다면 외부 세계에서 모셔 오면 된다.
--- p.67

이탈로 칼비노의 말이 떠오른다. “해답이 아니라 경이로움을 즐기라.” 나는 지칠 때면 속으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지금 어디선가 고래가 숨 쉬고 있다! 지금 고래가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고래처럼 깊게 숨을 쉰다. ‘나는 너와 함께, 너처럼 힘을 낼 거야.’ 고래처럼 물 밖으로 솟구쳐 태양을 향해 뛰어오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 pp.96-97

우리 사회는 꿈을 너무 오래 말하는 사람을 억압한다. 너무 오래 열정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을수록 철부지 사춘기 미성숙한 소년쯤으로 여긴다. 솔직히 내 눈에도 기타를 보고 정신 못 차리는 모습이 딱 철부지처럼 보인다. 나는 친구와 기타를 번갈아 보았다. 내 친구의 여위고 지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활짝 웃고 있었다. 배고파 쓰러져도 음악 소리가 나면 웃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 웃음이 좋았다. 친구에게는 가난도 건드리지 못하는 단호함과 인내심이 있었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대체 얼마만큼 멀리 자기 길을 갈 수 있을까? 그는 고통에도 에너지가 있다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 p.111

한 해가 끝나고 또 한 해가 시작되면 다이어리를 구입한다. 혹은 어디선가 얻기도 하고 선물로 주고받기도 한다. 한 해가 흐르는 동안 나는 시간의 흐름을 단어로, 문장으로 바꿔놓는다. 메모를 한 사람은 누구라도 자신의 메모장 안에서 인내심과 경이로운 순간들, 생각들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이 두 단어 ‘인내심’과 ‘경이로움’이 빚어낸 놀라운 이야기들이 함께하길 바라 마지않는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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