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수레바퀴 아래 짓눌린 청춘들을 위로하다!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이자 『데미안』과 쌍벽을 이루는 대표 성장소설 『수레바퀴 아래서』 출간
감수성이 가장 풍부하고 또 가장 위태로운 소년 시절에 그가 그렇게 날마다 밤이 깊도록 공부를 해야 했던 건 왜였겠는가? 사람들이 그에게서 토끼를 빼앗아 가고 라틴어 학교 시절에 의도적으로 친구들과 떼어 놓았던 건 왜이며, 낚시와 한갓진 시간은 누리지 못하게 금지해 놓고 천박하고 소모적인 공명심이라는 공허하고 속된 이상을 주입한 건 또 왜였겠는가? 왜 사람들은 시험이 끝난 뒤조차도 그가 수고하여 얻은 휴가 기간을 누리게 해 주지 않았던 걸까? 그들이 그렇게 몰아대던 그 어린 말은 이제 길가에 쓰러져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되어 버렸다. -본문 166쪽 중에서
상처 입은 청춘들의 영혼을 다독이는 힐링 열풍이 거센 요즘이다. 아픔과 상처가 청춘의 특권이므로 감내하면 밝은 날이 온다는 이야기가 담긴 책이 날개 돋힌 듯 팔린 것은 그런 뻔한 위로라도 붙잡고 싶은 청춘들의 절박함이 극에 달했음을 방증하는 지표가 아닐까. 하지만 ‘청춘은 원래 그런 거야.’라는 하나 마나 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바꿔 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당의정 같은 이야기는 절망을 부추길 뿐이라는 비판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을 사는 청춘들은 문제의 원인과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며 패배주의에 빠져들고 있다. 스스로를 ‘잉여’라고 부르며 희화화하기를 서슴지 않는 이들의 마음에는 냉소와 무기력이 뿌리 깊이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이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사회의 책임이라는 진실을 알려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청춘들은 대체 어디에서 답을 찾아야 할까.
여기 출간된 지 100년이 훌쩍 넘었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작품이 있다. 바로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독일 문학의 거장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가 그 주인공이다. 이 작품에는 총명한 한 소년이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억압하고 획일화시키는 교육 제도와 권위적인 기성 사회의 벽에 부딪쳐 비극으로 치닫는 과정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헤세는 누구나 경험하는 ‘성장’의 순간과 자의식이 팽창해 있는 청소년기의 내면 풍경을 특유의 섬세한 언어로 묘사하면서, 억압적인 교육 제도와 기성 사회의 권위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입시 위주 교육의 심화로 경쟁 속에서 시들어가는 오늘날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현실을 100년 전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러나 헤세는 한스 기벤라트라는 인물의 비극을 통해, 아무도 얘기해 주지 않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를 또렷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인간이 타고난 건강한 생명력을 잃고 ‘삶’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에 짓눌린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은 사회의 몰이해와 경직성 때문이라는 진실 말이다. 이것은 교육 현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으로까지 확장되어 독자들로 하여금 문제의식을 갖게 만든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한 인간의 고백이자 우리 모두가 겪는 청소년기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며,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의 문제를 짚어 내는 바로미터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이 책을 다시 혹은 새로이 펼쳐 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기계적인 사회 체제를 비판하고 청춘의 고뇌를 섬세하게 그린 문제작
소년들의 내면에는 뭔가 거칠고 무질서하고 교양을 갖추지 못한 어떤 것들이 있다. 이것이 우선 제거되어야 한다. 위험한 불꽃, 이것을 끄고 발로 불씨를 밟아 버려야 한다. 자연이 창조한 그대로의 인간은 뭔가 종잡을 수 없고 속을 들여다볼 수 없으며 위험한 존재이다. 이 존재는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산에서 터져 나온 물줄기요, 길도 질서도 없는 원시림이다. 그리고 원시림을 유용하게 쓰려면 나무를 잘라 터를 만들고 깨끗이 한 다음 강제로 구획 정리를 할 수밖에 없듯, 학교도 천연의 인간을 꺾어 버리고 정복하여 강제로 구획 정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본문 69~70쪽 중에서
독실한 경건주의 기독교관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난 헤세는 열네 살 때 마울브론의 신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했던 그에게는 개성을 묵살하고 억압적인 규율을 강제하는 기숙사 생활이 맞지 않았다. 그는 급기야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아’ 입학한 지 7개월 만에 학교에서 도망치고 만다. 고향에 돌아온 뒤에는 자살 시도와 신경쇠약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가 하면, 시계 공장의 견습공으로 또 서점의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 마침내 작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헤세는 이러한 자신의 청소년기를 상반된 성격의 두 인물을 통해 절묘하게 복기해 냈다. 가족과 사회의 몰이해와 무관심 속에서 예민한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은 채 죽음을 맞이하는 한스 기벤라트와 엄격한 규율에 반항하다가 끝내 학교를 이탈한 헤르만 하일너는 모두 헤세의 분신인 것이다. 이들은 또 ‘삶’이라는 무거운 수레바퀴 아래 짓눌린 채 살아가는 오늘날 청춘들의 대변자이기도 하다. 독자들은 두 인물에게 공감하고 이입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들을 궁지로 모는 학교와 사회의 규율이나 권위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독자들의 내면에 파고들어 삶의 방향을 잡는 데 길잡이가 된다.
아무도, 어쩌면 한스를 측은하게 여기는 보충 담당 교사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소년의 조그마한 얼굴에 번진 저 무기력한 미소 뒤에서 영혼이 침몰하며 고통스러워 하다가 두려움에 차서 절망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익사하고 있다는 걸 알아보지 못했다. 또한 아무도 학교가, 그리고 아버지와 몇몇 교사의 야만적인 공명심이 이 깨어지기 쉬운 여린 성정의 소년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본문 166쪽 중에서
인간의 본성과 자유를 억압하고 규율을 통해 ‘사회의 유용한 손발’을 배출하는 것이 목적인 학교와 사회. 이러한 기계적인 시스템을 고발하는 이 작품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른들이 주입한 공명심을 위한 삶을 살다가 결국 방향을 잃고 무기력에 빠져 자살인지 사고사인지 모를 죽음을 맞이하는 한스의 모습은, 비인간적인 시스템이 불러오는 어두운 미래에 대한 절묘한 은유인 것이다. 독자들은 한스를 죽음으로 이끈 것이 무엇인지, 또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되는 현실을 막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길 기대하며, 수많은 한스들에게 청춘의 본성과 권리를 노래한 이 작품이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