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출간일 | 2020년 04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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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36쪽 | 988g | 180*235*30mm |
ISBN13 | 9791196363277 |
ISBN10 | 1196363277 |
출간일 | 2020년 04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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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36쪽 | 988g | 180*235*30mm |
ISBN13 | 9791196363277 |
ISBN10 | 1196363277 |
수록 작품 125점, 수록 화가 41명, 원고지 약 2천 매, 집필 기간 20년, 서울을 그린 현전하는 거의 모든 옛 그림을 집대성한 최초의 저작 수록 작품 125점, 수록 화가 41 명, 원고지 약 2천 매, 집필 기간 20 년. 『옛 그림으로 본 서울』을 둘러싼 숫자의 의미다. 책 한 권의 탄생에 기여한 이 숫자들은 그 자체로 이 책이 지닌 의미와 가치에 대해 말해준다. 이 책에 실린 작품은 16세기 작가 미상의 것으로부터 19세기 심전 안중식의 작품까지 약 125점에 달한다. 이 숫자만으로도 이미 서울을 그린 현전하는 그림의 총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의 의의는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이 다일까. 조선미술사에서 위대한 업적을 쌓은 겸재 정선으로부터 작품만 남기고 이름은 잊혀져 ‘미상’으로 남은 작가들까지 약 41명의 화가들이 이 책을 통해 독자들 앞에 작품을 펼쳐 보인다. 이러한 작가와 작품의 총망라의 주체가 다름아닌 미술사학자 최열이라는 점은 특히 눈여겨볼 지점이다. 한국미술사에서 미술사학자 최열의 이름은 빠질 수 없다. 많은 학자들이 자신의 주력 분야에 치중하는 것에 비해 최열은 조선 회화사에서부터 근현대미술사까지 시대와 분야의 구분없이 한국미술사 전반을 광폭으로 살피며 수십 년 미술사 연구의 현장에서 충실히 복무하며 그 결과물을 상재해왔다. 그런 그가 약 20여 년 동안 꾸준히 주목해온 것이 있으니, 바로 서울의 옛 풍경을 그린 조선 시대 화가들의 그림이다. 그가 그림을 주목한 방식은 어떤 것일까. 그에게 그림은 회화적 가치 그 이상이다. 평생 미술사를 공부해온 최열에게 그림은 회화라는 칸막이 안에 갇혀 있지 않았다. 그에게 그림은 곧 역사이며 사람이다. 그림을 통해 화가의 의도와 회화적 특징을 살피는 동시에 그림의 이면, 그림을 둘러싼 시대,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는 온갖 이야기를 독자에게 갈무리해 전한다. 이를 위해 관련한 다양한 문헌과 시문이 활용되는데, 그가 아니라면 이러한 전방위적 학문의 경지를 독자들은 과연 누구를 통해 접할 수 있을까. |
책을 펴내며 | 한양의 기억은 서울의 미래다 서장 “서울, 햇볕 드는 큰 땅에 우리의 문명을 여노라” 01 도봉에서 삼각산을 거쳐 백악에 이르다 나라를 세우고 개혁을 꿈꾸던 이들의 영토, 도봉 태조 이성계, 천년왕국을 꿈꾸다 | 젊은 조광조가 사랑한 땅, 그곳에 들어선 도봉서원 삼각산, 이 아름다운 산세를 어디에서 만나랴 “이곳은 참으로 특별하여 그림에 담을 수 없구나”| 선비의 눈길을 황홀경으로 이끌다 “백악이야말로 산과 물의 형세가 옛글에 부합하다” 한양의 소문난 명승지, 산은 작으나 매우 깊은 땅 | 이 산을 그린 조선의 화가, 다섯 “이곳은 하늘 아래 으뜸 가는 복 받은 땅” 남경, 한양, 그리고 서울로 이어지는 통치의 심장 | 대은암, 풍광을 빗대 권력자를 비웃다 | 계곡 따라 들어선 누정의 아취, 권세의 흔적 | 겸재의 그림으로 떠올리는 경복궁과 숭례문 옛 풍경 | 문예사족의 집결지, 삼청동 풍류는 모두 다 어디로 02 세검정에서 나오니 창의문에 곧 닿더라 냇가와 바위가 어울려 참으로 좋구나 칼과 붓을 씻은 땅, 세검정 | 총융청에서 비롯한 신영동의 유래 | 탕춘대에서 오간수문까지, 홍지문의 안과 밖 | 석파정, 말없이 일러주는 권력의 무상함 창의문, 이 일대의 아름다움은 도성의 제일 창의문, 더욱 드러나 밝게 빛나리 | 동네 이름, 여전하거나 바뀌었거나사라졌거나 03 청풍계의 벗, 인왕산 그림, 필운대 꽃놀이 이백오십 년 권력의 산실, 문예의 꽃을 피우다 장동김문 세거지에서 이룩한 문예창신 | 이곳에 깃든 겸재 정선의 자취 인왕산 기슭에 꽃이 피면 모두 모여 꽃놀이 「인왕제색도」에는 구름 깔리고, 「인왕산도」에는 봄바람 부네 | 수성궁에는 물소리 흐르고, 송석원에는 시가 흐르네 | 송석원, 예술인의 아름다운 규율 | 필운대에 퍼지는 화가와 시인의 꽃노래 04 서대문을 지나면 서소문이 우뚝하고 광화문이 머지않네 한양의 서쪽 땅, 눈을 들어 그곳을 바라보다 풍요로운 시장, 서소문 밖 풍경 | 서대문 영은문터에서 생각하는 독립 | 징심정에서 조희룡을 그리워하네 | 심사정,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서울을 그리다 | 서대문 냉천동, 백사 동인들의 만남의 장 사라져 흔적만 남은 옛 서울의 기억 여전히 머나먼 경복궁의 옛 영화 | 경희궁의 추억, 북일영이여 | 비변사, 사헌부, 의금부, 옛 모습 다시 볼 수 없지만 | 청계천과 탑동의 추억 05 창덕궁 지나 혜화문, 그 너머 망우리 창덕궁, 천년을 꿈꾼 왕조의 심장부 창덕궁으로 향하는 새벽길 풍경 | 왕의 문장이 머무는 집, 규장각 | 어느 날, 창덕궁에 울려 퍼진 노랫가락 | 대보단을 둘러싼 현실과 이상의 경계 | “이곳 경치를 즐기노라면 그윽한 정취에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이제는 사라져 볼 수 없는 군자정 | 비변사 낭청들의 축하연, 그림으로 남다 혜화문 안팎, 그곳에 남은 사람과 시절의 자취 사연 많은 혜화문, 그 시절 그 혜화문 | 심은 지 오백 년, 여전히 창창한 성균관 은행나무 | 임금님, 동대문에 납시었네 | 정선의 그림으로 더듬어보는 이 땅의 정경 | 효종의 북벌, 숭무정책에 맞닿은 서울의 말 목장 | 임금이 근심을 잊었노라, 망우리고개에 얽힌 전설 06 남산 위 저 소나무, 용산에 흐르는 역사 세월 흐른 지 오래, 그리는 마음 지니고 남산을 바라보네 사연 많은 장충단공원, 항일의 땅이 되다 | 태종 시절부터 푸르른 남산 위의 저 소나무 | 북악십경 아계동, 군부대 주둔지에서 남산한옥마을로 | 남산 소나무 아래에서 나눈 청춘들의 맹약 | “어찌 이런 풍경이 왕성 근처에 있을 수 있는가”| 그에게 한양은 곁에 있어도 여전히 그리운 고향 그후로 오랫동안 이곳에도 역사가 흐르다 숭례문 밖에 연못이 있었네, 그곳에는 연꽃이 피었네 | 거대한 창고 지대, 한강 물류의 중심지, 용산나루 | 경강상인의 거점이었던 땅, 일본군과 미군 주둔지를 거쳐 다시 돌아온 땅 07 한강을 따라 광나루에서 흑석나루까지 사람 사는 이야기가 들리는 듯, 활기가 넘치던 땅 아차산부터 광나루까지, 교통과 물류, 군사의 현란한 교차 | 송파나루, 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화가의 서로 다른 시선|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곳, 그곳에 저자도가 있었네 | 두모포 사대부라면 한강 제 물 쓰듯 재물을 아끼지 않더라 | 옥수동 인근, 선비들의 독서 지대이자 왕실의 누정 지대 한강은 여전히 흐르나 그 시절은 간 곳이 없네 세조의 장자방 한명회가 사랑한 압구정, 풍경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가 | 조선의 얼음창고 서빙고, 수양대군이 꿈을 키운 요람 | ‘한강의 기적’이 지워버린 풍경, 동작동과 흑석동 | 금호동을 둘러싼 오해, 추사가 머문 땅 금호는 어디인가 08 노량진 거쳐 행주산성, 한강은 흐른다 천년의 명승에서 바라볼 것이 어찌 풍경뿐이랴 노량진을 지날 때면 사육신을 생각하노라 | 고려의 왕과 조선의 왕들이 즐겨 찾던 곳, 용산호 오늘이 옛을 가리니 사라진 그 풍경은 어디에서 찾을까 풍광으로 특별한 밤섬, 사라졌으나 다시 드러난 기적의 땅 | 잠두봉이었으나 이제는 절두산, 선유봉이었으나 이제는 선유도 | 개발 광풍에 사라진 그림 속 저 봉우리 | 공암나루 광주암, 오늘날 공원에 남아 옛시절을 전하다 | 노년에 관리가 된 화가, 강 건너 한양을 추억하다 | 권력과 역사가 뒤엉킨 땅 행호, 화가는 풍경으로만 남기다 부록 옛 그림 속 서울을 그린 조선의 화가들 주요 참고문헌 인명 색인 |
나에게 서울은,
나에게 서울은 어떤 의미였는지 생각한다.
강원도 태백에서 산 타고 놀다가 초등학교 3학년 2학기가 끝나갈 무렵 의정부로 이사 왔다. 경기 북부에서도 낙후된 동네였는데, 지붕이 맞닿을 듯 오밀조밀한 다세대 주택 천지였고, 동네에 단 한 동뿐이던 아파트는 이제 막 삽을 뜬 참이었다. 나는 그전까지 집과 사람이 그렇게 빼곡하게 밀집된 동네에는 발 디딘 적조차 없이 살았다. 전신주마다 위태롭게 치렁치렁 가득 꼬인 전선이 참으로 생경했다. 그때는 거기가 서울인 줄로만 알았다. 당시 친구들과 어울리며 무심결에 “우리 마을”이라는 단어를 종종 썼는데, 그때마다 그런 단어는 시골에서나 쓰는 말 아니냐며 놀림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여기서는 “마을”이라는 말 대신 “동네”라는 말을 쓴다나? 의정부가 서울이 아니라는 사실은 조만간 알게 되었지만 어쨌든 아동기의 끝자락에 서울권의 변두리에 입성한 셈이다.
진짜 서울 생활은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시작되었다. 처음 2년은 통학했고, 이후 2년은 화양동에서 최저의 주거요건을 찾아 가까스로 몸을 욱여넣고 살았다. 졸업 후 군복무와 직장생활은 타지에서 보냈지만,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다시 화양동으로 돌아왔다. 지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가장 왕성한 20대부터 30대 중반까지 약 10년 이상을 화양동에서 보낸 셈이므로, 현시점에서 화양동을 내 근거지로 반추한대도 크게 무리는 없다(혹여 훗날 광진구 지역구 의원이나 지방의원으로 출마하게 된다면 이 말을 다시 발굴해서 써먹어야겠다).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책을 읽고, 밥을 먹고, 생각에 잠겼던 것일까.
화양동에서 살았던 시기가 나의 성장에 미친 가장 큰 심리학적 의미를 하나 꼽으라면, 거기서 만난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온갖 경험들을 통해 내가 그저 보통 사람이라는 것, 즉 나 자신이 특출나게 똑똑하거나, 창의적이거나, 드라마틱한 성장과정을 거쳤거나, 이른바 ‘위인급’의 자질을 갖추지 않았다는 것을 깨우쳤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대목은 정말 중요하다. 나는 거의 중학교 때까지도 나 스스로 장차 위인전기의 주인공이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처참한 환경을 뚫고 기적처럼 피어난 저 고결한 연꽃과 같은 성공스토리의 주인공 말이다! 내 위인전기를 쓸 사람을 조금이라도 도와주려고 일기, 상장, 편지, 사진 등과 같은 나 자신의 조잡한 사료들을 아카이빙하기까지 했으니! 이토록 거의 반사회적일 수준에 육박하는 과도한 자의식에서 벗어나게 해준 곳이 화양동이니 어찌 고맙지 않을쏘냐.
그러면서도 그간 화양동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찾아볼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러다 최근 최열 선생의 신간을 읽으며 화양동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어 즐거웠다.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자마자 살곶이벌 일대를 말 치는 목장으로 정하고 행당동 중랑천변에 마조단을 설치해 조상에게 예를 올렸다. 말이 군사와 교통 면에서 얼마나 중요한 자산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후 세종은 마장을 둘러보고 교통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하여 행당동에서 성수동 뚝섬으로 이어지는 살곶이다리를 개설하고 말의 양육 상태를 관리감독할 정자인 화양정(華陽亭)을 건립하게 했다(280p). 화양동의 유래가 되는 이름이다. 오늘날 화양동에는 말 대신 그보다 활달하고 정력적인 청년들이 우글거린다. 화양동을 떠나서야 화양동을 알게 되었다.
마장이었던 살곶이벌은 오늘날의 면목동, 중곡동, 송정동, 화양동, 성수동 일대를 아우르며, 그 인근에도 장안평이라는 벌판에서 마장이 융성하였다. 장안평은 오늘날 사근동, 마장동, 용답동, 장안동, 답십리동 등을 일컫는다. 이 중에서도 면목동과 마장동은 마장에서 직접적으로 유래된 지명이다.
살곶이벌 일대 마장을 그린 지도인 <마장 진헌마정색도(1678)>가 책에서 소개되었다. 숭무정책과 북벌정책을 추진한 효종 시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군사적 가치가 큰 마장의 구조를 단순 명료하게 보여준다. 지도로서 지리정보를 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여러 말의 생동감 넘치는 역동적인 움직임을 담아내어 미적 가치도 충족하고 있다. 명료함과 아름다움은 대치되기 쉬운데, 그 적절한 균형에 디자인의 정수가 있다. 그림 속 말은 용맹하게 달리거나 서로 부대끼거나 천진난만하게 뒹굴거리거나 멍하니 앉아서 쉰다. 어느 하나도 같은 모양인 녀석이 없는 것을 보면 이름을 알 수 없는 화가의 말에 대한 애정과 관찰력을 엿볼 수 있다. 말에 미쳤던 화가 조지 스텁스(George Stubbs)나 테오도르 제리코(Theodore Gericault)도 이 작품을 봤다면 소장하고 싶어 안달 났을 터다. 그들은 사진을 방불케 하는 사실적이고 섬세한 화법으로 말을 그렸으나, 거침없는 최소한의 선만으로 대상을 추상화시켜 본질을 담아내는 화법에서는 <마장 진헌마정색도>의 화가에 미치지 못한다. 이 그림 속 풍경은 제주도의 마방목장에 가면 지금도 볼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비행기 타고 가야만 볼 수 있다는 점이 애석하기도 하다. 국토의 70%가 산지인 이 나라에서 말을 위해 옥토를 기꺼이 내어줄 여유는 없다.
작가 미상, 마장-진헌마정색도(1678), 국립중앙도서관
화양동이 속한 광진구의 유래도 재밌다. 예로부터 광나루는 강원도와 충청도의 문물이 들어오는 통로로서, 군사와 물류의 요충지였다. 고려까지는 버들나루라는 뜻의 양진楊津이라 하였으나, 조선에 이르러 광진廣津으로 불리기 시작했는데, 넓은 나루라는 뜻이므로 얼마나 번성한 나루였는지를 보여준다(321p). 문물과 사람이 오가는 번성한 나루에는 시장과 유흥이 발달하게 되어있고, 유흥에는 온갖 악행도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루터 인근에는 망나니가 칼춤 추는 형장이 있었다고 하는데, 하루는 형을 집행하려던 차에 아차산고개 너머로 말을 타고 넘어오는 전령이 급하게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집행관은 형을 재촉하는 것이라 여겨 처형을 서둘렀는데, 전령이 전하고자 했던 말은 그 죄수가 무죄라는 것이었다. ‘아차’하는 사이에 벌어진 사형이라는 의미에서 아차산이 유래되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다. 또 다른 유래설은 아침에 제사 드리던 곳이라는 의미의 아단(阿旦) 혹은 아차(阿且) 등이 있는데, 지금은 우뚝 솟았다는 의미의 아차(峨嵯)로 굳어졌다. 아마 처형 이야기는 그저 전설일 게다.
정선, 광진(18세기), 간송미술관
제목 그대로 16세기 이후 서울을 그린 거의 모든 진경산수화를 모았다는 이 책은 북으로 도봉에서부터 출발하여 서울의 중심인 백악산과 도심 일대를 꼼꼼하게 짚어보고, 이후 동으로 광나루, 서로 노량진까지 마치 저자와 함께 도보 여행을 다니는 듯한 경로로 구성되었다. 특정 지명과 공간에 얽힌 역사적 사연과 인물들의 이야기를 살피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천을 돌이키는 과정은 자못 흥미롭다. 그 공간에 각자의 사연이 담겨 있다면 더욱 그러할 터. 최열 선생은 작품과 역사에 얽힌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설명하는데, 사설시조를 번역한 듯 조사를 최대한 배제한 채 약간은 고어체를 가미하여 문체가 맛깔스럽다. 요즘 국어에는 쓸데없는 조사가 너무 많다는 것을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글에서 이미 느낀다.
옛 서울의 진경과 오늘날을 비교하면 우리네 근대화 과정의 총체적 난맥상, 즉 아무런 준비도 철학도 없이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타자에 의한, 가장 힘없는 자들의 희생을 강요한, 왜곡된 욕망이 켜켜이 투영된 채 마구 뒤섞인 바로 그 난맥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체증이 느껴진다. 이 체증은 무조건 과거가 좋고, 지금은 후졌다는 이분법적 신비화가 아니다. 분명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중 하나로 손꼽을 만한 곳에 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당혹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당혹감이란, 오늘날의 내가 왜 이 모습으로 성장했고, 왜 특정한 결정을 내렸는지를 스스로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을 때 느껴지는 감정과 비슷하다. 우리는 국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외세와 소수 권력자의 손에 이끌려 아무런 성찰도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철골콘크리트 도시로 만들어버렸다. 우리는 한 평짜리 땅을 소유하기 위하여 우리 인생과 영혼을 너무도 쉽게 저당 잡힌다. 이 욕망의 악순환을 누가 만들었는가? 농토를 빼앗은 탐관오리와 세도가와 친일파들, 토지대장을 멋대로 조작한 공직자들, 국토개발 명분으로 국토를 결딴낸 지도자, 그리고 그들을 단죄하기보다 공모를 선택한 정치권력과 사법부 등 잘못 꿴 단추를 꼽자면 한도 끝도 없다. 오류는 구조가 되기 전에만 바로잡을 수 있다. 지금은 너무 늦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