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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나날

가벼운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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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6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444쪽 | 600g | 140*225*30mm
ISBN13 9788960901629
ISBN10 896090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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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와 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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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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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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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는 얼어붙었고 비둘기들은 ‘FURNITURE’라고 쓰인 간판의 R자 위에서 몸을 웅크렸다. 뉴욕은 소유물의 대성당이었다. 그 냄새조차 꿈이었다. 이 도시에선 거부당한 사람들조차 떠나지 못했다. 한 늙은 여자가 계단에 앉아 있었다. 얼굴은 세월에 낡았고, 머리는 헝클어진, 이가 다 빠진 추악한 노파였다. 무릎 위에 앉힌 짐승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고 주둥이는 회색이었다. 노파는 고개를 숙여 뺨을 그 작은 개의 뺨에 대고, 말이 없었다.
--- p.53

완벽한 하루는 죽음 안에서, 죽음과 유사한 상태에서 시작한다. 완전한 굴복에서. 몸은 나른하고 영혼은 온 힘을 다해 앞서나간다. 숨조차 따라간다. 선이나 악을 생각할 기운은 없다. 다른 세계의 빛나는 표면이 가까이서 몸을 감싸고, 밖에선 나뭇가지들이 떨린다. 아침이고, 그는 천천히 일어난다. 마치 햇빛이 다리를 건드렸다는 듯이. 그는 혼자다. 커피 향이 난다. 개의 황갈색 털은 타오르는 빛을 빨아들인 듯하다.
--- p.66

그들의 삶은 함께 꾸려졌고, 함께 짜였다. 그들은 마치 배우들 같다. 자기밖에 모르는 성실한 배우들. 오래된, 불멸의 연극 대본 이상의 세상은 없는 배우들.
--- p.78

도시의 저물녘이었다. 교통 체증과 거리에 불빛을 쏟으며 달리는 버스들, 쇼윈도에 비친 모습들, 안경점들. 살이 에이도록 추웠고, 신문가판대와 할인 상점을 지나는 인파로 가득한 세상이었다. 롤스로이스에 탄 여자들과 그 화려함에 환해진 그들의 얼굴들.
--- p.148

“와인 잔이야 항상 필요하지.”
“깨질까 봐 무섭지 않아?”
“내가 무서워하는 유일한 건 ‘평범한 삶’이라는 두 단어야.”
--- p.255

그녀는 남편에게 이해심 많고 심지어 다정한 아내였다. 하지만 침대에선 무슨 협정을 맺은 것처럼 발조차 스치지 않았다. 협정은 협정이었다. 결혼이라는.
--- pp.271~272

공유한 것은 행복뿐이라는 듯, 그들은 다음 날을 계획했다. 이 평온한 시간, 이 안락한 공간, 이 죽음. 실제로 여기에 있는 모든 것들, 접시와 물건들, 조리 기구와 그릇들은 모든 부재하는 것의 삽화였다. 과거로부터 밀려온 조각들이고 사라져버린 몸체의 파편들이었다. 그들은 거짓의 증거들 속에서 거짓을 살았다. 어떻게 쌓여왔고 어떻게 일어났는가?
--- pp.273~274

호텔 방은 문 닫은 레스토랑의 테이블처럼 휑했다. 오랜 병자의 방처럼 양탄자는 낡았고, 공기는 차가웠다. 방 안의 사물들은 주변과 고립되어 부조리한 빛을 발했다. 책과 숟가락과 칫솔이 마치 눈 위에 놓인 소파처럼 기이해 보였다. 그녀는 이 휑한 공간에서 옷을 입었지만, 립스틱을 바르고 선글라스를 끼고 벨트를 하고 스키 리프트의 지도를 들었지만, 방 안의 냉기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른 아침 그 최초의 맑은 빛이나 폭풍우만이 그녀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 p.303

내게 용기가 있었다면, 믿음이 있었다면, 그는 생각했다. 우리는 마치 중요한 일을 수행하듯 우리 자신을 보존한다. 그러기 위해서 항상 다른 사람을 희생시킨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장해둔다. 남들이 실패하면 우리가 성공한 것이고, 남들이 바보 같으면 우리는 현명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을 부여잡고 나아간다.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을 때까지.
--- p.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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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초월적인 버팀목들과 자발적으로 단절한 우리 근대인들이 치르는 대가는 이것이다. 시간은 가차 없이 흐르는데 삶의 의미는 드물게만 찾아진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많은 시간을 인생 그 자체와 싸우며 보낸다. 근대 이후의 위대한 장편소설들이 대체로 ‘시간과 의미’라는 대립 구도 위에 구축돼 있는 것도 그 때문이고, 그 소설의 주인공들이 자명한 악과 싸우는 로망스적 영웅이 아니라 삶의 무의미와 대결하는 신경증적 영웅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물론 성공이 아니라 실패다. 그러나 그들의 실패는, 의미란 무의미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얻는 전리품이 아니라 싸움 그 자체 속에서만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어떤 것임을, 그러므로 삶이란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그 순간에만 겨우 의미를 갖는 것임을 입증하는 데 성공한다.
제임스 설터는 이 모든 것을 거의 무정할 정도로 정확하게 해낸다. ‘정확하다’라는 평가는 우리가 소설가에게 바칠 수 있는 최상급의 찬사 중 하나일 것이다. 설터가 어떤 감정을 묘사하면 그것에서 불명확한 것은 별로 남지 않는데, 그럴 때 그는 마치 다른 작가들이 같은 것에 대해 달리 쓸 수 있는 가능성을 영원히 제거해버리려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한때 내가 가장 사랑한다고 믿은 대상이 이제는 내 삶의 무의미를 극명하게 증명하는 것처럼 보일 때의 그 비감悲感을 설터만큼 잘 그려내는 작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숨 쉴 틈 없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설이 아니라 수시로 깊은 숨을 내쉬느라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소설이다. 삶을 너무 깊이 알고 있는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 느끼게 되는 피학적 쾌감 때문에 나는 그만 진이 다 빠져버렸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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