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프랑은 뭐 하면서 시간 보내?”
종종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순간 와이프라는 단어가 살짝 거슬린다. 그보다 아내라는 말을 좋아해서다. 그래도 우선 대답을 해야 하니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우리도 뭐 특별한 건 없는데? 싶다가도 한마디 꺼내본다.
“저희는 미술관에 좀 자주 가는 편이에요.”
“뭐, 네가?”
느닷없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네, 제가 그림 보는 걸 좋아해서요”
몇몇 사람들은 기절초풍 일보 직전이다. 응? 왜 그러지?
그림을 보러 다니는 일은 나의 오랜 습관이다. 미술을 전공하는 여자 친구와 사귀었던 것이 계기였다. (그 친구가 지금의 아내는 아니지만…….) 그 후로 미술관을 찾아다니는 건 마치 이따금 영화를 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안 어울리게 왜 그래? 우리 그런 사람들 아니잖아?”
상대는 나를 닦달한다.
“너나 나나 남다를 것 없는 남자잖아. 고만고만한 남자 인생이면 다 비슷해야 하는 것 아니야?”
보채기도 한다. 고상한 척 그만하고 축구나 한 게임 한 뒤에 술이나 마시자고. 드물게는 지나치게 빈정거리는 사람도 있다.
“남사스럽게 계집애처럼 그럴 거야?”
그럴 때 나는 조용히 미술관으로 향한다.
그림은 말이 없다. 가타부타 치근덕대지도 않는다. 과묵하니 더 정이 간다.
--- pp.13-15
나는 같이 있기 불편한 사람들 틈에 끼어있는 걸 싫어한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그런 모임에는 가지 않으려 한다. 누가 뭐라 하건 그 고집을 지켜왔다. 어색한 약속은 잡지 않고 귀가한다. 그러다 보니 또 집안일을 하게 된다. 이런……. 식탁에 앉아 거실을 둘러본다. 자꾸만 할 게 눈에 들어온다. 화병 물 갈아줘야겠네. 수건 빨래도 해야겠다. 점심 먹고는 냉동실 정리나 한 판 해볼까? 아차. 종량제 봉투 떨어졌지. 내 정신 좀 봐.
이래서는 집안일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끝없이 할 일은 쌓여만 간다.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한 올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두고 깔끔 떨고 자빠졌네 하겠지만, 맞다. 나는 어질러져 있는 꼴을 못 본다. 제각기 제자리에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어질더분한 것은 발견하는 즉시 치워야 직성이 풀린다.
집에 들어오면 항상 손부터 먼저 씻는다. 왠지 모르게 찝찝해서다. 될 수 있으면 향 좋은 비누로, 뽀드득뽀드득. 그럴 때면 기분이 한껏 고조된다. 손이 깨끗해지는 것뿐인데 마음도 한결 홀가분해진다. 아, 참. 손에서 물이 줄줄 흐르는 채로 화장실을 나서는 법도 없다. 손을 야무지게 닦고 박수 한 번, 짝! 그러고 나서야 집에 온 것 같다. 손을 씻기 전에는 완전히 마음 놓을 수 없다. 집 밖의 먼지가 아직 묻어있을 테니.
샤워 전에는 잠자리에 몸을 뉘이지 않는다. 아무리 피곤한 날이라도 몸에 따뜻한 물을 끼얹고 허둥지둥 머리를 감고 나서야 잠들 수 있다. 그러니 손도 안 씻고 심지어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로 직행하는 아내의 몸부림은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사랑하니 망정이지, 친구 녀석이 그런다면 안방 문 앞에서 육탄 방어를 했을 것이다.
--- pp.28-30
영화관은 어쩔 수 없어서라도 작은 영화관에 가야 할 때가 많다. 보고 싶은 영화가 아예 대형 극장에 걸리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어! 이 영화 봐야지!’ 하고 예매하기를 눌러보면 상영관과 나의 거리 250킬로미터.
구미에 내려온 뒤로 영화를 제때 챙겨보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지방일수록 저예산 독립 영화, 예술 영화, 소소한 다큐를 상영하는 극장은 찾아보기 힘들다.
내가 굳이 작은 영화관으로 향하는 이유는 그곳에서 부스럭-후루룩-짭짭 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로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간, 그 공간이 빚어내는 정중함과 영화에 대한 존중감이 좋아서다. 물 이외의 음식물은 지니지 않고 오롯이 영화에만, 영화를 만든 이들의 마음과 그들이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에만 집중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 속에 함께 있을 때 전해져 오는 편안한 소속감은 대형 극장에서는 느끼기 힘들다. 하염없이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더라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 모든 이름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가만히 앉아 영화의 여운을 느끼는 사람들. 그 묘한 동질감이 나를 잡아 끈다.
아내와 처음 데이트를 했던 신촌 아트하우스 모모. 그날의 떨림을 기억한다. 어정쩡한 자세로 매표소 주위를 맴돌던 나. 미셸 공드리 감독의 [무드 인디고]를 보는 내내 나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손을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니, 잡아도 될까?’ 전전긍긍하다 영화에는 집중도 못한 채 결국 손을 잡지도 못했다. 이후에 들어보니 그날 다짜고짜 손을 잡았더라면 ‘이 사람 왜 이래?’ 하며 나를 더 이상 만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망설임도 때론 쓸모가 있구나 싶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우리는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인생 후르츠]를 보며 백년해로를 약속했다. 서로의 왼손과 오른손을 편안히 포개어 둔 채로.
--- pp.63-65
웬만하면 회식은 가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이유를 만들어 내서라도 회식 자리는 빠지고 본다. 일단 일이 있다고 둘러댄 다음 찬찬히 생각한다.
정말 불가피하게 모임에 나가게 된다면 누구와, 무엇을, 언제까지 먹고 마시게 될지에 관해서 생각한다. 나가서도 술은 마시지 않거나 ‘짠’만 하거나 한두 잔만 마신다. 약을 먹고 있다는 둥 점심에 배탈이 났다는 둥 준비해 둔 말을 꺼내놓는다. 2차에 따라가는 일은 결코 없다.
업무로 연을 맺은 사람들은 내가 술을 못하거나 즐기지 않는다고, 무슨 재미로 사냐고 곧잘 이야기한다. 응? 사실 나는 애주가다.
그런 자리에서, 그런 속도로, 그런 사람들과 술잔을 부딪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나는 여건만 된다면 매일 저녁 한 잔의 와인을 곁들이고, 여름이면 누구나처럼 시원한 맥주를 즐긴다. 소주를 먹어야 한다면 합성첨가물 없는 증류주를 찾고, 특별한 날에는 싱글 몰트 위스키를 마시는 사치도 부리곤 한다. 다만 되도록 천천히, 마음 맞는 사람들과 편안한 자리에서 마시길 원한다. 부어라 마셔라, 너 죽고 나 죽자 마시는 건 대학교 신입생 때 이후로 그만뒀다. 그리고 내게 선택권이 있는 한 다시는 그러고 싶지 않다.
이런 내 태도를 감지한 누군가가 어느 날 쏘아붙이듯 말했다.
“좀 회식도 꼬박꼬박 나오고. 술자리 끝날 때까지 먼저 집에 가지 말고. 핑계 대면서 술도 빼지 좀 말고. 그래야 인맥도 탄탄하게 쌓을 수 있고 나중에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고 그러는 거. 자네는 그런 것도 모르나?”
네, 모릅니다.
말수도 마찬가지다. 나는 상대방이 나와 결이 다르다는 걸 감지하는 순간 입을 다문다. 단 몇 분이든, 몇 개월이 됐든 그 앞에서는 침묵한다. 겉도는 이야기만 주고받을 바에야 차라리 그게 속 편하다. 내가 하도 말이 없으니 벙어리인 줄 알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과연? 나와 절친한 사람들은 나에게 그렇게 쉬지 않고 떠들면 입 아프지 않으냐고 빈정거린다. 즐거운 이들과 함께라면 이야기 샘은 마를 일이 없다. 서로 마음만 맞는다면 만사형통인 법이니까.
같은 기수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참여하게 된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에서도 나는 1년이 됐건 2년이 됐건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하여 그 방의 알림을 꺼두는 건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 읽지 않은 메시지가 수백 개가 될 때도 있지만 그걸 순서대로 읽어 내려가는 일은 당연히 없다. 관심 없는 대화를 읽지 않는 것 역시 잠을 자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오히려 용량을 차지할까 봐 대화 내용 전체 삭제를 누르는 일이 많다. 한순간에 지는 벚꽃처럼, 앗사리あっさり(미련 없이 깨끗이). 텅 빈 대화방을 보면 그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다.
--- pp.70-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