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내 운명을 개척해야 하는구나, 이제 즐겁게 빈둥거리던 생활을 청산해야 하는구나, 하는 끔찍한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나는 요크 애비뉴 1539번지 아파트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다가오는 해에 입을 버뮤다 반바지 세 벌을 미리 구입했어. --- p.62
이렇게 하퍼 리는 이스트사이트 아파트에서 『앵무새 죽이기』 원고를 고쳐 쓰고 또 고쳐 썼다. 때론 희열을 느낀 적도 있지만 대부분은 실망과 좌절과 절망의 연속이었다. 어느 겨울 밤, 초라한 요크 애비뉴 아파트의 책상에 앉아 타이프로 친 원고 한 페이지를 읽고 또 읽었다. 갑자기 그녀는 지금까지 써왔던 원고를 주섬주섬 모아 창가로 들고 가 창밖의 눈 속에 집어 던져 버렸다. 그러고 나서 테이 호호프에게 전화를 걸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행동을 설명했다. 호호프는 그녀에게 어서 빨리 밖으로 나가 원고를 주워 모으라고 하였고, 호호프의 말을 듣고 하퍼 리는 대충 옷을 걸치고 어둠 속으로 내려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원고를 주워 모았다. 평소 그녀는 [작가가 되는 것 말고는 어떤 일에서도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면서도 때로는 이렇게 깊은 절망감에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 p.88
[네가 쓰고 싶은 작품이 무엇이든 그것을 쓸 수 있도록 네 직장을 1년간 쉬었으면 해. 메리 크리스마스!]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에요?」 「쪽지에 쓰여 있는 그대로야.」 하퍼 리는 어안이 벙벙하여 몇 초 동안 말문이 막혀 가만히 서 있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엄청난 도박이에요. 무척 위험이 따르는 일이라고요.] 그러자 마이클 브라운은 미소를 지으며 [아니, 넬. 모험이 아니야. 이건 아주 확실한 일이거든]이라고 대꾸했다. 브라운 부부는 하퍼 리가 작가가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뉴욕시에 왔지만 막상 항공사 일에 치여 제대로 글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던 터였다. 예나 지금이나 항공사의 티켓 판매나 예약 담당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래서 1년 동안 영국해외항공사를 휴직하고 오직 글 쓰는 일에만 전념하도록 그녀에게 재정적 뒷받침을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무상으로 돈을 준 것은 아니었다. 작가로서 성공하면 갚으라고 빌려준 것과 다름없었다. 하퍼 리는 이 돈을 [선물] 대신에 [빚]이라고 자주 불렀다. 그러나 아직 작가로 데뷔조차 하지 않고 문단 말석에 자리도 얻지 못한 작가 지망생에게 1년치 생활비를 빌려준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귄 지 불과 몇 년 되지 않는 친구는 말할 것도 없고 가까운 일가친척도 선뜻 내리기 힘든 결단이다. 하퍼 리가 브라운 부부에게 [엄청난 도박]이라고 말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뒷날 작가로 대성공을 거둔 뒤 1961년 『맥콜』 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브라운 부부의 행동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날 일어난 기적에 어리둥절하여 나는 창가로 다가갔습니다. 새로운 삶을 멋지게 시작할 기회가 완벽하게 주어진 겁니다. 그것은 관대함에서 우러나온 행위가 아니라 사랑에서 우러나온 행위였지요. [우린 너를 믿어!]라는 그들의 말이 정말로 내 귓가에 쟁쟁 울리고 있었습니다. --- p.18
어린아이들이 그렇듯 어린 하퍼 리에게도 어머니의 존재는 무척 소중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어머니는 육체적으로는 존재할지언정 정신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어머니의 [부재]는 어린 하퍼 리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남겼다. 그녀가 내성적이고 과묵하고 비사교적인 것도 따지고 보면 어머니의 부재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이렇게 어머니로서나 아내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던 프랜시스 리를 대신하여 해티 벨 클로젤이라는 흑인 가정부가 살림을 도맡아 하다시피 했다. 『앵무새 죽이기』에 등장하는 충실한 흑인 가정부 캘퍼니아는 바로 클로젤을 모델로 했다. 하퍼 리는 이 소설에서 스카웃이 두 살 때 그녀의 어머니가 사망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스카웃은 [우리 엄마는 내가 두 살 되던 해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식해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렇듯 하퍼 리는 소설에서 어머니에게 사망 선고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