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마르에서는 어둡고 비 오는 날만이 계속되었다. 그곳에는 화려하거나 세련된 건물, 색색의 정원은 없다. 채도가 낮은 낡은 벽과 돌길만 있어서 더욱 쓸쓸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곳곳에 괴테의 동상이 자리하고 그와 연인의 집이 있다. 아이스크림 하나 들고 아기자기한 꽃밭 근처를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이마르를 괴테가 사랑한 도시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것일까.
어느 음악학교에서 학생들의 공연을 보았다. 오르간과 두 개의 현악기로 이루어진 작은 연주회였다. 많은 사람이 찾아와 오후를 함께 보낸다. 캐나다에서 오신 옆자리의 할아버지는 이곳에 있는 국제학교 선생님이다. 까만 양복과 하얀 수염이 정말이지 잘 어울린다. 커다란 풍채만큼이나 따뜻한 인사를 건넨다. 언젠가 꼭 캐나다에도 가서 그림을 그려달라는 말과 함께 내가 문밖을 나설 때까지 손을 흔들 만큼 내 그림을 좋아해주셨다. ---p.63
내가 여행 가방을 쌀 때 가장 먼저 챙기는 것은 스케치북과 10년 넘게 써온 낡은 필통이다. 그리고 여행서나 회화집이 아닌 책 한 권을 반드시 챙긴다. 이번 여행에는 《월든》을 들고 갔다. 헬렌 니어링의 책과 소로의 책 중에 고민하다가 《월든》을 가져갔다. 호숫가를 감상하거나 갑자기 비가 내리거나 낯선 사람을 만난 상황에서 소로가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한다기보다는 책을 좌르륵 훑다가 마음에 드는 쪽을 펼쳐 몇 번이고 읽어본다. 혹은 마음이 붕 떠서 좀처럼 평온하지 못할 때 잔디에 앉거나 침대에 누워 이 책을 읽으며 위안을 얻곤 했다. 여행서에서는 가방에 카메라, 비상약, 손전등 등등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것을 챙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할 뿐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한 권 가지고 떠나시오’라는 조언은 없다. 위급 용품이나 안내서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몸을 챙기는 것 이상으로 마음을 챙기는 것도 중요하다. 여행은 마음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왜 바쁜 일정 속에 지친 마음을 가다듬을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못할까. 여행 가방에 무엇을 넣을지 고민한다면, 여권과 지갑, 공책 다음으로 무겁지 않고 몇 번을 읽어도 좋은 자신만의 책을 꼭 한 권 챙길 것.---p.66
아주 싼 비행기 티켓을 구해서 폴란드로 갔다. 대학 도시 크라쿠프는 멋진 곳이다. 가로세로 200미터로 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중앙광장은 골목 사이사이마다 다양한 음식점과 카페, 옷가게, 화장품 가게, 책방, 기념품 상점 등등 원하는 모든 것이 다 있다. 골목이 매우 많고 꼬불꼬불해서 이곳저곳 다니다 보면 길을 잃을 것만 같지만, 생각지도 못한 색다른 가게를 만나기도 하고 미로 같으면서도 은근 다 연결이 되어 있어 어느새 중앙광장으로 다시 되돌아오게 된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른 채 그냥 돌아다닌다.---p.72
에펠탑은 파리 어디서나 조금씩이라도 보여서, 잠시 스쳐 지나가면서도 보게 된다. 그렇게만 봐도 참 예쁘다. 하지만 나는 ‘몇 시간 동안 한자리에’ 서서 가만히 지켜보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구름 사이를 지나다가, 햇빛에 반짝이다가, 노을 따라 분홍색으로 물들다가, 노란 불빛이 조금씩 켜지며 밤하늘 사이로 반짝거린다. 모두 다른 풍경이지만 전부 다 에펠탑이다. 한자리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해가 지고 밤이 될 때까지 그냥 보기만 한다. ---p.108
불과 며칠 전과 전혀 다른 날들이다. 첫날 새벽부터 출발한 산티아고 순례길은 피레네 산맥을 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운동이라고 한 것은 동네를 걷는 것뿐이었는데 10킬로그램이 넘는 배낭을 짊어지고 30킬로미터가 넘는 산길을 걸어야 한다. 너무나 힘들지만 풍경이 정말 아름답다. 동화책에서나 보던 야생 양 떼를 보았다. 하늘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깝다. 하늘 바로 아래 언덕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어디에나 맑은 바람이 불고, 나비가 날아다니고, 꽃이 반짝인다. 아스팔트가 아닌 흙길을 걷는다. 길이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노란색 이정표를 따라 무작정 한 걸음씩 걸을 뿐이다. ---p.132
사막에서의 하룻밤은 특별하다. 우리나라에서 온 여행자 여럿, 일본인 어머니와 아저씨, 러시아 아가씨, 미국에서 온 브랜든. 그렇게 와글와글 모인 멤버가 모두 좋은 사람이다. 이집트 친구들이 사막 모래 위에 불을 피워서 요리해준 저녁 또한 맛있다. 갓 튀겨준 팝콘과 뜨끈뜨끈한 군고구마, 혀가 아릴 정도로 달콤한 샤이. 모든 게 특별할 바 없는 평범한 음식인데도 사막이라는 이유만으로 달리 느껴진다. 모닥불 근처에 둘러앉아 손을 녹이고,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춤을 추고, 노래한다. 그렇게 고요한 사막 어딘가에서 우리가 머무른다. 모래 위를 산책하는 것도, 모닥불 가까이에서 맨발을 녹이는 것도, 차 앞유리에 누워 별을 바라보는 것도 좋다. ---p.180
라다크 작은 마을 어느 곳에서 결혼을 축하하는 자리에 초대받았다. 진한 갈색 피부에 유난히 깊은 주름만큼 미소도 깊은 할머니들과 함께였다. 옆자리엔 아이들이 수줍게 앉아 있다.
검고 긴 머리를 양쪽으로 곱게 땋았다. 화려하고 낡은 도자기 찻잔에 버터와 소금, 소다와 물로 만든 버터차를 마신다. 인생의 행복한 날.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이기에 소박한 음식만으로 노래하고 춤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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