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가 되면 문방구마다 새로운 학용품들을 진열하느라 분주했다. 평소와 다르게 매대 위에 가지런히 진열된 과목별 공책들은 상쾌한 긴장감을 주며 새 학기의 시작을 알렸다. 고무냄새를 풍기던 교과서 비닐 커버, 외국에서 건너온 신기한 필기구, 반짝반짝 빛나는 스티커, 빌딩처럼 쌓여 있는 과목별 참고서, 앙증맞은 캐릭터들이 수놓인 실내화까지, 모든 것들이 조명에 반짝이며 새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문방구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볼은 빨개지고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 p.12
어린 시절의 내 꿈이자 좋아했던 것에 대한 보상을 해주는 마음을 담아 ‘리멤버 유어 걸후드 REMEMBER YOUR GIRLHOOD’라 는 슬로건을 만들고 내가 만든 문구에 넣었다. 문구를 사용하며 나처럼 어린시절의 황홀함을 떠올렸으면 하는 마음과 함께, 지금 이 순간을 새로운 ‘GIRLHOOD(소녀 시절)’로 만들어갔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다. 브랜드 이름을 ‘스탠다드러브댄스 STANDARDLOVEDANCE’로 지었는데, 다양한 세대의 반짝이는 GIRLHOOD들이 모여 밝은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매장에 모녀 손님이 종 종 방문하는데 “이거 엄마 어릴 적에 썼던 거야, 너도 한번 써볼래?”라는 대화를 들은 적이 있다. 너무도 짜릿한 순간! 내 문구를 통해 세대가 공유하는 순간을 직접 목격하니 나의 큰 꿈을 이룬 것만 같았다. 20년도 더 지난, 나의 어릴 적 꿈들이 더 빛날 수 있도록 ‘리멤버 유어 걸후드’라는 슬로건을 나도 따라 갈 생각이다.
--- pp.24-25
일기장은 그야말로 나만의 작은 세상이어서 이루지 못할 큰 바람이나 무한한 상상을 적어도, 속상한 마음이나 세상에 대한 험담을 적어도 걱정이 없다. 종종 생각이 너무 많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에겐 일기만 한 친구가 없다. 어떤 이야기도 오랫동안 묵묵히 들어주는 고마운 친구. 오늘 내가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지 나를 향해 팔을 벌려 기다려주는 친구. 고민거리가 생기면 예전엔 어떻게 헤쳐 나갔는지 일기장을 펼쳐보기도 하고, 잊고 있던 나의 취향과 추억을 다시 알 수도 있어 끊임없이 나 자신과 소통하게 해주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 p.30
나는 마음에 들었던 순간과 기억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픈 욕심쟁이인 게 분명하다. 좋아하는 것을 아껴 두었다가 쓰고 싶은 마음, 나만 보고 싶은 마음, 나와 영원히 함께 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부지런한 까마귀처럼 모으다보니 해마다 하나씩 보물 상자가 만들어졌다. 보물 상자는 시간과 향기까지 봉인되어 나의 보물을 더 소중한 것으로 만들어주고, 스크랩 박스이자 타임캡슐의 역할도 해준다. ‘이때는 이런 것에 꽂혀 있었지’ 하는 생각들과 추억이 깃든 물건들로 생각 여행을 떠나게 도와준다.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작은 쪽지나 편지를 적어 넣으면 재미가 배가 된다.
--- p.64
할머니의 서랍을 열어본 날이 생각난다. 할머니께서 무언가 꺼내달라셔서 열었던 서랍 안은 그야말로 세월을 고스란히 품은 타임캡슐이자 보물 창고였다. 오래된 금장 손목시계, 옛날 글씨체로 쓰인 티켓, 장갑, 반짇고리,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 조그만 향수병. ‘이 물건들도 한때 찬란하게 빛났겠지’ 내가 겪어보지 못한 시대를 상상하는 게 재미있다. (중략) 누군가에게는 더 이상 쓸모없는 낡은 물건들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 또 이러한 물건을 귀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이 물건들도 본래 주인에게 소중한 물건이지 않았을까 하는 애틋함, 오랜 시간동안 잘 버텨준 대견함, 이 물건이 태어난 시대에 대한 상상이 뒤섞여 나는 그만 또 사랑에 빠져버린다.
--- pp.70-72
분홍색의 가장 큰 매력은 예민함이다. 물감을 사용해 분홍색을 만들 때 불필요한 색이 조금이라도 섞이면 바로 흐리멍덩한 회색빛이 돈다. 흰색과 빨간색, 때때로 노란색 의 비율이 적절하게 섞여야 맑은 분홍색이 나온다. 디지털 작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인쇄 수치에 파란 잉크가 조금이라도 섞이면 애매한 보라색이 되어버리니 꼭 꼼꼼하게 확인해야 하는 컬러다. 이렇듯 예민하고 세심함을 요하는 분홍색은 내 성격과도 조금 닮았다! 스펙트럼 또한 넓어서 꽤 많은 영역의 색들이 분홍색으로 불리기도 한다. 빨간빛의 분홍, 보랏빛의 분홍, 오렌지색에 가까운 분홍, 채도가 잔뜩 내려간 갈색에 가까운 분홍처럼. 내가 좋아하는 분홍색은 다량의 흰색에 소량의 빨강이 섞인 파스텔 계열의 분홍색인데, 최근에는 형광빛의 분홍색에도 흥미를 느끼고 있다. 앞으로 또 어떤 색에 홀딱 빠져버릴 지 모르겠지만 어렵고도 예민한, 따뜻하면서도 까칠한 분홍색과 더 친해지고 싶다. 어렵기 때문에 더 잘 다뤄보고 싶다.
--- pp.84-86
내가 좋아하는 것을 보고, 듣고, 느끼는 순간이 바로 행복 이라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 하고, 찾기 위해 선 끊임없이 내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온전히 내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마음이 밝아지면 이것 그대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데에 이유를 찾으려 하지 말자. 이렇게 하나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모으는 일은 마음속이 시커먼 안개로 가득 찰 때 빛을 밝히는 방법이 되어주고 있다.
--- p.114
앞으로도 나는 어른 나이가 되었다고 어른 흉내를 내려 힘쓰지 않을 거다. 어린 시절 마음 안에서 빛나던 ‘무엇’을 소중히 간직하며 살아도 괜찮다고 끊임없이 내 자신을 응원 해주며 살아가려 한다. 내 모습과 내 취향을 지켜내며 단단한 어른이 되자고, 작지만 반짝이는 것들을 오롯이 껴안아 품으며 살아가자고,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앞으로도 누구보다 나를 응원해줄 거다.
--- pp.181-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