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몬 연구를 둘러싼 광기와 미스터리
호르몬 과학이 걸어온 놀랍고도 기묘한 발자취
이 책은 흥미로운 호르몬 연구를 소개한다. 겨우 100년 남짓 된 호르몬 연구의 발자취는 파란만장하다. 놀라운 발견으로 이루어진 동시에, 별난 돌팔이짓과 광기로 얼룩져 있기도 하다. 의사와 과학자들의 무모하고도 황당한 호르몬 에피소드가 이 책을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요소다.
호르몬 과학은 언뜻 비과학적으로 들리는 한 연구에서 시작됐다. 독일의 의사 아놀트 베르톨트는 수탉의 고환을 모두 떼어낸 후, 하나의 고환을 수탉의 배에 이식하는 엽기적인 실험을 시행한다. 이 실험을 통해 베르톨트는 고환이 제자리에 있지 않아도 혈액을 통해 모종의 물질, 즉 호르몬을 분비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1920년대에는 정관수술이 크게 유행했다. 남성들은 피임이 목적이 아닌, 회춘을 위해 수술을 받았다. 놀랍게도 이 유행을 주도한 것은 의사들이었다. 심지어 어떤 의사들은 정관수술의 효과를 테스트하기 위해 다른 질병을 치료하러 온 환자에게 동의도 얻지 않고 정관수술을 시행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정관수술뿐만 아니라, 테스토스테론을 증강시킬 수 있다며 동물의 고환을 환자들에게 이식한 의사들도 있었다. (세르게 보로노프는 유인원의 고환을, 존 블링클리는 염소의 고환을 이식했다.)
1950년대에 태어난 보 로랑은 간성으로 태어났으나 의사들로부터 아무런 고지를 받지 못하고 성기수술을 받아 하루아침에 여자아이가 됐다. 이후 그의 삶은 행복하지 않았다. 검증되지 않은 오염된 성장호르몬 주사로 인해 수백 명의 환자들이 뇌에 구멍이 뚫리는 크레이츠펠트-야콥병에 걸린 사례도 등장한다. 이와 같은 안타까운 사연들은 의사와 과학자들의 오만함이 불러일으킨 결과다. 저자는 광기와 희생이 뒤얽힌 이와 같은 ‘크레이지한’ 호르몬 연구를 통해 호르몬의 미스터리가 밝혀지고 과학이 발전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호르몬의 발견부터 호르몬의 미래까지
호르몬 과학으로 보는 의학의 발전사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단순히 흥미로운 연구나 인물들의 에피소드 모음집은 아니다. 호르몬의 발전을 통해 의학의 흐름을 보여주는 역사서기도 하다. 이야기는 호르몬이 알려지지 않았던 1883년의 사건에서 시작한다. 230킬로그램인 블랜치 그레이의 시체는 당시 의사들에게 탐나는 의학 재료였다. 밤마다 시체 도굴범들이 그레이의 무덤을 찾아가 시체를 도굴하려고 호시탐탐 노렸다. 당시에는 아무도 그레이가 왜 그렇게 뚱뚱한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책은 그로부터 약 100년 후인 1994년, 다시 비만에 관한 이야기로 끝마친다. 록펠러대학교의 제프리 프리드먼 교수는 지방세포에서 렙틴이라는 호르몬을 발견한다. 렙틴은 식욕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며, 이에 결함이 생기면 끊임없이 허기를 느껴 비만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약 100년이 만에, 비만에 관한 미스터리 하나가 풀린 것이다.
저자는 이 100년 동안 호르몬을 통해 의학이 어떻게 발전할 수 있었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뇌하수체호르몬이 발견된 덕에 쿠싱증후군, 쿠싱병 등을 진단할 수 있었으며, 태반호르몬이 발견된 덕에 바로 결과를 알 수 있는 임신 진단 테스트법이 고안됐다. 아직 호르몬의 베일은 완전히 벗겨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발전한 호르몬 연구를 둘러싼 지난 이야기는, 많은 과학자들이 낙관하는 것처럼 호르몬이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열쇠가 될 수 있을지, 그 미래는 또 얼마나 파란만장할지 기대를 갖게 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호르몬이다!
우리와 함께 살며, 호흡하며, 감정을 표현하는 호르몬의 비밀
저자는 호르몬을 ‘가장 광범위한 과학’이자, ‘가장 인간다운 과학’이라고 말한다. 과연 호르몬이 무엇이길래 인간답다는 걸까? 인체 내에는 호르몬을 분비하는 분비샘이 아홉 개 있으며, 지금까지 밝혀진 호르몬의 종류만 수십 가지다. 이러한 호르몬은 사춘기, 신진대사, 행동, 수면, 기분 변화, 면역, 수유, 모성애, 성gender, 섹스 등을 통제한다. 그야말로 우리의 모든 것을 통제한다고 할 수 있다.
렙틴을 발견한 제프리 프리드먼 박사는 “우리는 ‘뭔가를 마음대로 조절하며 살고 싶다’는 헛된 욕망을 품고 있다”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식사량을 줄이면 체중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행동의 밑바탕에는 식욕, 성욕, 수면욕 등을 충족하고자 하는 기본적 충동이 도사리고 있으며, 이 충동의 밑바탕에는 호르몬이 깔려 있다. 즉, 인간의 행동과 충동을 조절하는 것이 호르몬이기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신체뿐만 아니라 기분과 감정마저 호르몬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니, 호르몬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호흡하는 동반자와 같은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을 진정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흔히 사랑이나 자비로움, 혹은 생각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뒤에 호르몬이 존재한다면, 진정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호르몬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호르몬을 더욱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다.
◆ 이 책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궁금증들
- 성장호르몬을 맞으면 정말 키가 커질까?
- 호르몬이 우리의 감정과 생각까지 결정할까?
- 폭식이 의지박약 때문이 아니라 호르몬 때문이라고?
- 킬러 호르몬이 있을까?
- 호르몬은 성별 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 피임약과 호르몬대체요법은 얼마나 안전한 걸까?
- 호르몬 과학이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열쇠가 될 수 있을까?
‘미천한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전문 의학’으로 바꿔놓은
내분비학계의 원더 우먼들
호르몬이 돌팔이 의학에서 가장 중요한 전문 의학이 되기까지, 수많은 과학자들의 끈기가 필요했다. 놀라운 발견을 이뤄낸 과학자들을 한 명씩 발견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묘미 중 하나다. 특히, 저자는 성차별을 딛고 내분비학계에서 큰 업적을 세운 여성 과학도들을 소개한다.
그중 한 명이 바로 호르몬 측정법을 발명한 로절린 얠로다. 오랜 기간, 호르몬은 너무나 미량이기에 ‘측정할 수 없다’는 상식이 지배했다. 그러나 얠로는 방사면역측정법(RIA)이라는 호르몬 측정법을 고안해, 호르몬을 혈액 1밀리리터당 ‘10억 분의 1그램’ 수준까지 측정할 수 있게 했다. 이 방법은 치료법도 아니고 단지 무언가를 측정하는 방법일 뿐이라며 평가절하되기 일쑤다. 하지만 이 측정법 덕에 호르몬과 바이러스를 탐지했고, 수많은 치료법이 개발됐다.
임신호르몬인 사람융모성생식샘자극호르몬(hCG)를 발견하고 이름 붙인 사람도 조지아나 시거 존스라는 여성 과학자다. ‘무엇이 임신호르몬을 분비하는가’는 의학의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였으며, 많은 의사들이 뇌하수체가 임신호르몬을 분비한다고 잘못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의과 대학생이던 존스가 임신호르몬을 분비하는 것은 뇌하수체가 아니라 태반임을 증명했다.
여성 의학도이자 과학도로서, 저자는 한 인터뷰에서 여전히 과학계가 너무나 남성 편향적이라고 말했다. 여성 의학도와 과학도들이 더욱 당당히 설 수 있기를 바란다고 힘주어 역설하기도 했다. 앞으로도 그는 과학이나 의학의 역사 속에 숨어 있는 여성들의 업적을 밝힐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