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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

[ 양장 ] 현대문학 핀 시리즈-소설선 026이동
듀나 저 / 구본창 그림 | 현대문학 | 2020년 05월 2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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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5월 25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204쪽 | 282g | 112*190*22mm
ISBN13 9788972751724
ISBN10 897275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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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장을 열고 여분의 옷과 신발을 생성한 나는 욕실로 들어가 구식 샤워기를 틀었다. 청결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가상현실 안이건, 물리 공간 안이건, 몸을 깨끗하게 하고 싶다면 더 손쉬운 방법이 얼마든 있다. 난 그저 중력에 의해 떨어지는 뜨거운 물을 즐기고 싶었을 뿐이다. 호텔에 있는 고풍스러운 기기들은 대부분 이런 쾌락을 위해 존재했다.
--- p.21

처리반의 작업은 아르카디아나 엘리시움과 같은 양로원 도시에 모이는 한가한 관광객들이 쫓아다니는 구경거리 중 하나이다. 도시 여기저기에 유령들이 출몰하고 제복 입은 공무원들이 그 난처한 상황을 수습하려고 따라다닌다. 처리반 직원들은 모두 평균 키보다 작고 (소행성대 기준으로 보면 더 작다) 동글동글 귀여운 인상에 실수투성이이고 수다스러운데, 모두 의도적이다. 도시는 처리반의 작업이 무성영화 시대 코미디처럼 보이고 싶어 한다. 심지어 그들의 말과 행동은 보통 사람들보다 10분의 1 정도 가속되어 있다. 보글보글 와글와글 우당탕탕.
--- p.36

그들은 나에게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내게 동료들을 희생해가며 구출할 만한 가치가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럴 만큼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재미있을 이유가 있다면 둘 중 하나다. 재미있는 무언가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에게 붙었거나 내가 내가 아니거나.
잠시 후자가 당겼다. 이게 20세기 영화 속이라면 그게 답이었을 것이다. 연방 우주군이 나라고 들고 온 것은 몸이 다 타버린 머리뿐이었으니, 그 안에 든 무언가가 자신을 배승예라고 믿는다고 해서 사실이라는 법은 없다. 이 생각은 어느 정도 매력적이기도 했다. 내가 지난 몇십 년 동안 억지로 끌고 다녔던 배승예의 삶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무언가가 되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 pp.54-55

오딜리와 접촉한 ‘단 하나의 진실’ 무리 중 네 개가 1년 전 연합에 성공한 것입니다. 이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고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스스로의 존재를 배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하지만 이들은 그럴싸한 논리를 만들어냈습니다. 역시 매우 톨스토이적인 논리였지요. ‘단 하나의 진실’ 제국 말입니다. 그들은 스물세 개의 역사에서 공통되는 것들을 뽑아 기둥을 만들고 여기저기에서 재료들을 가져와 스물네 번째 역사를 꾸며 이것이 스물세 개의 역사에 암호화되어 숨어 있던 ‘단 하나의 진실’이라고 선언했습니다.
--- pp.136-137

‘아르카디아, 엔디미온, 엘리시움. 이들은 죽은 자들의 안식처와 거리가 멉니다. 다들 아시잖아요. 양로원의 마더들은 소멸하는 인간들의 정신이 남긴 데이터를 이용해 끊임없이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연구해왔습니다. 여기는 프랑켄슈타인의 연구실입니다. 번뜩이는 글리치 속에서 죽은 자들의 정신을 자르고 붙이며 무언가 다른 것을 만드는.
--- p.161

공간이 흔들리더니 상가 건물 하나가 일어났다. 이제 그것은 철근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회색 거인이었다. 거인은 유리창이 손톱처럼 박힌 손을 휘두르며 나에게 달려왔다. 고도를 높이자 그것은 부풀어 올랐다. 거인의 발에 밟힌 건물들이 으스러지고 몸에 치인 아파트 건물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뒤를 돌아본 나는 유리창과 가구,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거인의 얼굴이 섬뜩할 정도로 어린 시절 내 얼굴과 닮은 걸 알아차리고 진저리를 쳤다.
--- p.176

피를 잔뜩 뒤집어쓴 라다가 복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 절반이 늑대에게 물어뜯겨 날아가버렸고 갈기갈기 찢겨 나간 군용 외투는 옷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오로지 애지중지하는 곰 인형만 멀쩡했다.
“이제 좀 씻지?”
내가 말했다.
“이런 모습을 너에게 보여줄 기회를 날리라고?”
“이제 봤으니 좀 씻어.”
“아브라카다브라.”
손가락을 튕긴 라다는 얼룩 하나 묻지 않은 깔끔한 상태로 돌아왔다.
--- pp.186-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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