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고 배우는 수업에 누구보다 전문가인 우리. 이제 진짜 선생님이 되어갈 수업을 할 차례다. 우리 모두는 충분히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다.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었다. 손을 씻고 줄을 선 후 식당으로 함께 이동한다. 급식을 받아서 아이들을 자리에 앉도록 안내하고 테이블 바깥쪽 모서리 자리에 앉는다. 밥을 한 숟갈 뜬다. 일어서서 반찬을 가지고 투덜대는 아이에게 다녀온다. 밥을 한 숟갈 뜬다. 일어서서 밥 먹다 말고 말싸움을 하는 아이들에게 다녀온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은 밥을 굉장히 빨리 먹는다. 얼른 먹고 나가서 친구들이랑 노는 게 더 중요하단다. 아이들이 다 식당을 빠져나가면 나도 식판을 정리하고 나선다.
“토마토는 고체잖아요. 그럼 토마토를 믹서기에 갈면 액체가 되는 거죠? 갈다 중간에 멈추면 액체도 있고 건더기도 있는데, 그건 뭐예요, 선생님?”
당황하지 않는 것, 그것이 어찌 보면 선생님이 가져야 할 가장 큰 덕목이 아닐까 싶다. 당황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여유가 생기고, 그 여유에서 아이들을 대하는 너그러운 태도가 나올 것이며, 그러한 태도를 통해 아이들은 즐겁게 생활하고 부담감 없이 공부를 할 수 있다.
바쁜 상황에서 내가 아플 틈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머릿속으로는 ‘에라 모르겠다’며 맘 편히 한 일주일 병가를 내고 푹 쉬면서 회복하고 싶다는 생각을 백 번도 넘게 했다. 꿈같은 이야기다. 결국은 누군가 나 대신 저 모든 일을 해야 한다. 누가 나 대신 저 일을 하게 될지마저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아이들도, 나도 모두가 꽃이다. 각자 한 송이의 꽃으로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 향기가 강한 꽃도 있고 향기가 없는 꽃들도 있다. 색깔이 화려하게 붉어진 꽃도 있는 반면 수수하고 은은한 꽃도 있다. 커다랗고 매력적인 꽃이 있는 반면 조그마하고 단정한 꽃도 있다. 남에게 줄기를 기대어 의지하는 꽃과 튼튼하게 다른 꽃을 받쳐주는 꽃들도 있다.
아이들은 장난꾸러기여야 한다. 장난을 친다는 것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또 사회 속에서 누군가와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며, 적당한 관심을 주고받기를 희망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혼자만 재미있을 때는 장난이 아니다. 함께 하는 친구도 재미있어야 장난이다. 그렇지 않으면 폭력이 될 가능성이 크다.”
아이들은 선생님에 대해서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도 알고 싶어 한다. 선생님의 집은 어디인지, 선생님은 어느 초등학교를 나왔는지, 선생님은 어제 저녁에 뭘 먹었는지, 선생님은 포도맛 젤리를 좋아하는지 사과맛 젤리를 좋아하는지, 선생님은 결혼을 했는지, 선생님은 나이가 몇인지, 선생님은 형제자매가 있는지, 우리가 체육시간에 수업을 하러 나가면 선생님은 혼자 무엇을 하는지….
아이들은 어른들에 비해 조금은 더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할 줄 안다. 아이들은 스스로에 대해 충분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고, 본인이 어떤 점에서 뛰어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표현하기도 한다.
“얘들아, 집에도 안 가고 게임만 하는 거 아냐?”라고 말하며 다가갔다가 깜짝 놀랐다. 스스로 네이버와 구글에 검색해가며, 유튜브에서 관련 영상을 수십 편을 보고, 강의를 찾아 들어가며 게임을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 단순한 게임일지라도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나누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깨어있는 척하면서도 결국은 교과서에 담긴 10년 전 사람들의 지식을 전달해주는 나보다는 훨씬 앞서있는 듯했다.
“아이들이 적당히 고민하고 걱정하고 심사숙고하며 하나씩 극복해보는 연습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말을 하고 싶다. 창의적 인재육성을, 자주적인 어린이를 키우겠다는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사소한 것 하나하나를 어른이 해결해주는 환경을 만들어버리면 아이들은 그렇게 자라날 것이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자리 바꾸기 이벤트는 아이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같이 앉게 되는 짝이나 모둠원이 어떠냐에 따라 학교에 오고 싶은 마음도 달라지고, 수업에 집중하는 정도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자리배치 결과를 조금 더 부드럽고 유쾌하게 전달하려고 신경을 쓰곤 한다. 마치 복권을 사고 하나하나 긁어나가는 마음처럼, 행사장에서 경품 추첨을 하는 것처럼, 나의 마니또가 누구였는지 밝혀지는 그 순간처럼 긴장되면서도 즐거운 분위기에서 전달하고자 한다.
선생님은 만남과 이별의 직업이다. 매년 새로운 학생들을 만나고 일 년을 살다가 헤어져야만 한다. 그 일 년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새로운 학생들을 만나 또 새로운 일 년을 시작한다. 선생님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친하게 지내는 선생님도 다른 학년으로, 다른 학교로, 심지어는 다른 지역으로 언제든 흩어져버린다. 정이 들어버린 학교도 정리할 새 없이 떠나가야 하며, 새로운 학교를 오래 보아왔던 것처럼 사랑하기 시작해야 한다. 선생님은 그런 연애를 해야 한다.
항상 책임감을 지닌 채 아이들을 만나야 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아이들이 변화하고 성장하면서 길을 결정하게 되는 아주 조그만 조약돌이 될 수도 있고, 큰 발구름판이 될 수도 있다. 선생님으로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아이들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촉매제로서, 조력자로서 지녀야 하는 마땅한 것이 아니다. 혹시라도 내가 아이들의 결정에, 아이들의 선택에 미세하게나마 영향을 주어 성장의 방향을 조금씩 틀어 놓을 가능성이 있다는 긴장감과 무거움 때문에 가져야 하는 그런 것이다.
아이들이 교사 마음에 들지 않는 방향으로 행동을 할 때 교사는 엄청난 스트레스와 함께 아이들의 방향을 내 쪽으로 돌려놓으려고 엄청 노력을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감정도 닳고 마음도 닳고 몸도 지쳐간다. 아이들의 성향과 마음의 방향을 이용해서 원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 아이들의 방향을 교사에게로 맞추려 노력하지 말고, 아이들의 방향을 살펴본 뒤 교사가 아이들과 같은 방향을 향하여 선다면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을까.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