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총 12년 동안 교과서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만나왔습니다. 하지만 제가 만난 그 어떤 학생들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예하의 한인 애국단 단원이 80명이나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저 교과서를 통해 의거에 성공했다는 것과 시험에 나오는 이봉창, 윤봉길 의사만을 기억할 뿐입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이름도 없이 사라진 수많은 독립 영웅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이 책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27년간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임시 정부 이야기를 들려줄 것입니다. 1910년 국권 피탈 시기부터 1945년 광복이 되기까지의 잔혹했던 일본 식민 통치라는 큰 틀 속에서 임시 정부의 상하이 시기(1919~1932), 이동 시기(1932~1940), 충칭 시기(1940~1945),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기(1945~1948)를 함께 따라갈 것입니다.
--- p.4
3·1운동은 우리가 독립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과제를 던져주었습니다. 청원이나 비폭력 시위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만주나 연해주에서 활발하게 무장 독립 투쟁이 전개되었습니다. 한편 3·1운동은 세계 여러 약소 민족의 반제국주의 민족 운동에 큰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는 5·4운동이 일어났고, 인도에서는 비폭력·불복종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베트남, 필리핀 등 식민 상태에 있던 아시아 각국의 민족 운동에도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3·1운동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일본에 맞서 결사 항전을 하려면 통일적 지도부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제기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이 선출한 대표자들이 법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는 공화주의에 입각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을 이끌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탄생했습니다.
--- p.52~53
우여곡절 끝에 임시 정부 개조안이 합의된 후 1919년 9월 6일 통합 임시 정부의 개정 헌법이 탄생했고, 9월 11일에는 신헌법을 공포하고 내각을 발표하면서 ‘상하이 통합 임시 정부’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 통합된 임시 정부는 독립 운동 단체와 우리 민족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중국과 러시아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45개 단체들이 통합된 상하이 임시 정부에 지지 의사를 밝혔습니다. 통합 임시 정부 수립에 대해서 꼭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10년 국권을 피탈당한 지 9년 만에 3·1운동 정신을 계승하여 단절되었던 한민족 정권을 다시 세웠다는 것입니다. 정치 체계에 있어서는 오랜 기간 이어온 군주제가 폐지되고, 한국 역사상 최초로 헌법에 기초한 민주 공화제의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것은 황제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p.70~73
상하이 임시 정부도 첫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국호와 연호의 제정을 놓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논쟁을 벌였습니다. 처음에는 ‘조선공화국’, ‘고려공화국’ 등이 국호 후보로 올랐습니다. ‘대한’은 이미 망해버린 ‘대한제국’의 국호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반대 의견에 맞서 일본에 빼앗긴 이름을 다시 찾아온다는 의미가 있다며 찬성하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 ‘대한민국’ 국호 제정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10년 전에 상실한 국가 이름인 ‘대한제국’에서 ‘대한’을 도로 찾아 쓴 것은 빼앗긴 국가를 되찾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정치 체제를 ‘제국’이 아닌 ‘민국’을 채택했다는 사실입니다. ‘민국’이라는 국호는 3·1운동 직전까지 소수 세력이 지지했던 복벽주의를 완전히 극복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국호로 ‘민국’을 채택한 것은 대한제국이 망한 지 9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독립 후 새로 건설할 정부는 군주제가 아닌 백성의 나라인 민국, 즉 공화제로 한다는 데 국내외 독립 운동가들의 의견이 모아졌음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민주정체를 달성했음을 의미합니다. 4월 11일 최종적으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연호를 ‘민국’으로 정했습니다.
--- p.93~94
1937년 11월 18일 임시 정부는 다시 전장에서 후난성 창사로 이전하는 대장정의 길을 떠났습니다. 당시 창사는 곡물 가격이 싸고, 홍콩을 통해 국제 통신을 접하기 편리하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이 창사를 공격하자 임시 정부는 다시 창사를 떠나 광저우로 이동했습니다. (……) 재차 대장정에 나선 결과 임시 정부는 1938년 10월 류저우에 도착하여 반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때 김구는 임시 정부와 가족들을 중국 정부의 임시 피난 수도인 충칭으로 이동하는 문제를 장제스와 교섭했습니다. 김구는 중국 정부의 허락을 받았지만 충칭에 바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당시 인구 20만에 불과한 소도시였던 충칭이 임시 피난 수도가 되자 임시 정부뿐만 아니라 중국 각지의 정부 기관과 피난민들이 모여들면서 인구가 200만 명으로 급증했습니다. 인구 급증은 심각한 물가 폭등과 주택난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임시 정부는 바로 충칭으로 가지 못하고, 1939년 4월부터 치장에 자리 잡았습니다. (……) 임시 정부는 1940년 9월 대장정의 마지막 종착지인 충칭에 도착합니다. 1932년 5월 상하이를 떠나 충칭에 자리 잡기까지 8년 여 동안 무려 3만 리를 이동했습니다. 김구를 비롯한 임시 정부 요인들은 100여 명의 대가족을 이끌고 일본군의 공습을 피해가며 오로지 독립을 위한 열망 하나로 역경을 이겨냈습니다.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임시 정부의 이동 시기’라고 부릅니다.
--- p.185~187
중앙 육군 군관 학교 낙양 분교 내에 독립 운동가 양성을 위해 설립된 한인 특별반의 정식 명칭은 ‘중국 중앙 육군 군관 학교 낙양 분교 제2총대 제4대대 육군 군관 훈련반 제17대’입니다. (……) 학교 운영은 김구가 고문 자격으로 총괄하고 안공근, 안경근, 노종균 등이 관장했습니다. 입교생 훈련은 총교도관 지청천과 교관 오광선, 이범석, 조경한, 윤경천, 한헌 등이 담당했고 이범석은 학생대장을 겸했습니다. 교육 기간은 1년으로 그리 길지는 않았습니다. (……) 임시 정부는 졸업생들을 상하이·만주·국내·일본 등 각지에 파견하여 국내외 여론의 조사 보고, 일본의 중국 침략 방해 저지 및 공작 전개, 국내에 잠입해 작전 정보의 수집 및 송달 등의 특수 공작을 담당하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중국과 만주에서 항일 무장 투쟁에 앞장섰던 독립군 지도자의 대부분은 낙양 군관 학교의 교관이나 장교 후보생으로 훈련을 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낙양 군관 학교 한인 특별반은 우리 독립 운동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인 특별반이 짧은 기간 운영되었지만 배출된 졸업생들은 1930년대 후반부터 광복 전까지 활발한 무장 투쟁을 했던 조선 의용대와 한국 광복군의 주요 구성원이 되어 중국 관내에서 독립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조선 의용대와 한국 광복군은 우리 독립 운동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조직입니다.
--- p.199~204
임시 정부는 20여 년 동안 일본과의 항전이라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오랜 기간 군대 창설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1940년 충칭에서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면서 일본과의 항전을 시작합니다. 임시 정부는 한국 광복군을 창설한 이후 끊임없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 항전에 참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추후 연합군이 한반도에 상륙할 때 한국 광복군도 연합국의 일원으로 선봉대가 되어 조국 해방 작전에 뛰어들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1943년 한국 광복군은 영국군과 합작하여 공작대를 인도·버마 전선에 파견했습니다. 이 공작대가 바로 ‘인면전구* 공작대’입니다. (……) 인도와 미얀마 전선의 험난한 자연적, 지형적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강인한 체력이 필수였고, 능숙한 일본어 실력은 일본군을 상대로 특수 공작 선전전을 수행할 때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국군과의 연합 작전을 위해 영어 구사 능력도 필요했습니다. (……) 당시 한국 광복군 인면전구 공작대는 임팔 대회전 최전선에 투입되어 활약했습니다. (……) 인면전구 공작대는 격전이 벌어지던 곳곳에서 대적 선무 방송, 투항 권유 전단 작성, 노획 문서 해독, 포로 심문 등 다양한 공작전을 수행하여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 p.251~256
만약에 국내 진공 작전이 계획대로 실행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는 일본의 패망이 1년만 늦어졌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 ‘만약에’ 일본 패망이 딱 1년만 늦어져서 한국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이 실행되고, OSS 특수 부대원들이 활약해주었더라면 항일 운동이 한반도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요? 그랬더라면 미국이 임시 정부를 인정하고 임시 정부 혹은 한국 광복군도 전후 한반도 문제 처리 과정에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면 우리의 역사가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한편 일본 패망 이후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하고 한국 광복군과 OSS는 명령 대기 상태에 들어가면서 모든 작전이 사실상 정지되었습니다. 임시 정부는 중국 전구 미군과 OSS, 맥아더 사령부에 작전을 지속할 것과 임시 정부 및 한국 광복군의 조기 귀국을 요청했습니다. 또한 한국 광복군이 한반도 국내의 질서 유지를 위한 군대로서 큰 가치가 있으며 소련 점령 지역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항하여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 주장에 OSS도 동의했고 한국 광복군과의 합작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 1945년 10월 1일, OSS 자체가 해체되면서 한국 광복군과 OSS의 공동 작전도 끝이 났습니다.
--- p.276~278
임시 정부는 충칭에서 해방을 맞이했을 때부터 스스로 정부임을 내세워 과도 정부 수립의 주체가 되고자 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임시 정부는 귀국 후 통일 전선을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조선 공산당 등을 협상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계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임시 정부는 신탁 통치 반대 정국을 이용하여 과도 정부 수립을 최대한 앞당기려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과도 정부 수립은 실패로 끝났고 통일 전선의 형성 또한 좌우 대립으로 어렵게 되었습니다. 귀국 후 임시 정부의 가장 큰 한계는 바로 김구를 비롯한 임시 정부 요인들이 국내외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임시 정부는 27년이라는 오랜 망명 생활로 국내 정세에 어두웠고 국내에 독자적인 조직 기반과 정보 수집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또한 미국은 임시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독립 운동 단체로만 인식했고, 소련은 임시 정부의 친중·친미적 태도에 거부 반응을 보였습니다. 중국은 국공 내전이 임박하면서 임시 정부를 후원할 수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임시 정부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어있는 상태였습니다.
--- p.301
대한민국은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처음 탄생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임시 정부’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란 국가를 세우고, 이를 유지 운영하기 위한 정부로 임시 정부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결국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계승하여 재건한 것입니다. (……) 이승만은 개회사에서 3·1운동으로 임시 정부를 세웠다는 사실과 함께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기미년에 수립한 임시 정부를 계승하여 수립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 이승만은 1948년 7월 24일 대통령에 취임한 후 대통령 문서를 발행할 때 ‘대한민국 30년’이라고 썼습니다. 여기에서 ‘30년’은 1919년부터 계산한 것입니다. 이것은 임시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는 같은 존재로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 정부를 계승하여 재건된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 p.312~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