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도 빌런도 아닌,그저 그런 변호사의 변(辯)특별한 포부나 장래 희망 없이 살았고,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 역시 한 번도 꿔본 적 없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대한민국 법조 1번지’ 서초동을 9년째 맴돌고 사는 저자, 그는 그런 스스로를 가리켜 ‘모태 아웃사이더’, ‘생계형 변호사’라 칭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종종 멋지고 흥미진진하게 그려지는 변호사들의 일과 삶, 하지만 2만 7,880명에 달하는 이 땅의 변호사(대한변호사협회 통계, 2020년 4월 1일 기준) 중 1인에 불과한 저자의 존재는 먼지같이 가볍고도 하찮기만 하다. 누군가는 ‘사(士)’ 자 들어간 철밥통 직업 아니냐고 할 테지만, 장사가 안 되면 접어야 하는 건 마찬가지. 오전 내내 세상 억울한 사연을 들고 찾아오는 고객들과 입씨름을 하고 임박한 재판 시간에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 달려가지만 어쩐지 판사는 상대방 편만 들고, 화려한 언변과 논리로 정의를 구현할 새도 없이 보통 10분 안에 끝나는 재판은 드라마와는 달리 ‘노잼’이다. 카리스마 여사님과 퇴임을 앞둔 공무원, 노동자 유족에서부터 약쟁이와 사기꾼, 동네 불량배, 추방 위기의 불법체류자 등 그를 찾아오는 고객들의 면면도 매우 다양한데, “뭐 저런 인간을 변호하냐”며 맹비난을 받는 일도, ‘한 것도 없으면서 돈돈거리는 변호사 놈’으로 후려침을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는 쥐방울만 한 회의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책상을 탕탕 치더니 “그럼 대체 할 수 있는 게 뭐예요?”라거나, “그렇게 얘기할 거 같으면 제가 변호사 안 샀죠. 안 되는 걸 되게 해주는 게 변호사 아니에요?”라며 내 역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네, 아닌데요._ 본문 중에서먹고사니즘의 기쁨과 슬픔,존버는 무죄입니다생존을 위해 각자도생하는 시대. 변호사의 세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저자는 인생 최대 관심사이자 제1목표인 ‘원활한 생계유지’를 위해 주야장천 삽질에 바쁘다. 이 땅에 최초의 변호사가 탄생했던 1906년 이래 변호사의 수가 1만 명을 넘어서기까지는 딱 100년이 걸렸고, 2014년과 2019년 각각 2만, 3만 명을 돌파하며 그 수의 증가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늘어나는 수임 경쟁과 불황 속 가격 경쟁에 수임료는 10년 새 반 토막이 났고, 변호사 도움 없이도 척척 재판하는 ‘셀프 소송’도 확산되는 추세다. 대형 로펌은 몸집을 더욱 불리고, 청년 변호사들은 인터넷에서 상담을 하며 고객을 끌어모은다. 30년 전에는 이름 석 자 커다랗게 적은 간판을 걸어놓은 채 그저 사무실에서 고상하게 난이나 닦고 있어도 세상 억울한 사람들이 줄지어 찾아왔을지 모르지만 요즘 같은 때에 개업 변호사가 그러고 있다면? 그는 30일 뒤 자기가 키운 난처럼 빼빼 마른 채 사무실 바닥을 기어 다니게 될 거다. _ 본문 중에서매일같이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걱정하지만, 어쨌거나 생계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며 나름의 해학으로 똑같은 일상을 견디고 사는 저자의 모습은 여느 30~40대 직장인과 다르지 않다. 직장인과 자영업자 사이, 승진 없는 직장이라 다행이라며 정신 승리하고, 특유의 아웃사이더 근성으로 회식 자리를 ‘갑분싸’로 만들기도 하며, 월요일이면 그저 아프고 싶고, 한편으론 ‘남의 일’에 하나하나 분개하다가는 이 일 못 한다는 선배의 말을 비타민처럼 삼키는 나날들.저자는 변호사로서 수임한 각종 사건 이야기를 풀어낸 1장 ‘생계형 변호사의 일하는 시간’부터 직장인으로서 겪는 현실 자각의 순간들을 털어놓은 2장 ‘생계형 변호사의 현타 오는 순간’, 소름 돋게 반복되는 매일 중 문득문득 느끼는 단상을 그러모은 3장 ‘생계형 변호사의 반복되는 일상’을 통해, 드라마만큼이나 단내 짠내 나는 변호사의 세계를 특유의 유쾌함과 더불어 현실감 있게 또한 입체적으로 전한다. 오늘을 쏙 빼닮은 내일은어김없이 찾아오니까‘이렇게 사는 게 맞나?’,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면 되나?’ 마흔을 앞둔 나이에도 우리는 왜 여전히 불안정하며 같은 고민을 계속하는 걸까. 이번 생에는 갑갑한 현실이 획기적으로 바뀌지 않을 것 같고, 다음 생이라고 이보다 나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평균 이하의 사명감과 정의감으로 정말 어쩌다 보니 변호사가 되었다는 저자 역시 그렇다.오늘은 내가 변호사가 된 지 2,812일째 되는 날이었고 ‘앞으로 뭐 해 먹고살지?’라는 생각을 2,812번째 한 날이었으며 온라인 변호사 커뮤니티의 취업 게시판을 2,812번째 방문해 또 한 번의 의미 없는 클릭을 마친 날이기도 했다._ 본문 중에서서초동 사람들이 입만 열면 뿜어대는 ‘법대로’, ‘원칙대로’에 느끼는 깊은 회의감, 소위 ‘잘나가는 변호사’와는 지구 열두 바퀴쯤의 거리가 있는 현실, 그리고 철저히 속물스러운 욕심들. 겉으로는 점잖은 척, 세상 돌아가는 일 다 아는 척 번듯한 변호사 행세를 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오늘 치 수습에 안도하고 내일 치 수습을 걱정해야 하는 몸. 누군가 변호사란 ‘고도의 공공성과 윤리성이 강조되는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이라 펄쩍 뛴다 해도, 현실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 생활인의 관점에서 ‘변호사는 법률 서비스라는 상품을 팔아서 먹고사는 자영업자’일 뿐이다.분명 지쳐가는 중이었지만, 적극적으로 현실을 바꿀 용기나 의지는 없었다. 대신 나름의 우회로로서 ‘재미’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쓰게 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해우소에서 질러버리는 외마디, 읽고 내려놓기 무섭게 뇌리에서 휘발될 잡담, ‘아, 나만 공들여 삽질하며 사는 게 아니라 다행이야’ 하는 마법 같은 정신 승리면 충분하다. 이긴 것도 진 것도 아닐지라도, 결국에는 존버하는 자가 평화를 찾는 법. 어지간한 청춘보다 내가 더 아프지만 그렇다고 영 못 해먹을 정도는 아닌 것 같고, 크게 낭패 보는 일 없이 살아온 날들에 안도하는 우리 모두에게,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밝혔듯 이 책이 그저 ‘생면부지의 동병상련’처럼 읽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