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학은 주장과 근거 사이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탐구하기 때문에 각각의 문장을 파고들어 가는 것 대신 그 문장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집중한다. 우리는 흔히 일상에서 상대방의 말에 담긴 ‘내용’에 발끈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지민이가 잘생긴 건 아니지만….” 뭐? 지민이가 잘생긴 건 아니라고? 너 지금 우리 지민이 욕하는 거구나? 하지만 논리학에서라면 지민이가 잘생겼는지 아닌지보다 “지민이는 잘생긴 건 아니지만 춤도 잘 추고 애교도 많고 패션센스도 좋다. 그러므로 방탄소년단에서 제일 멋진 멤버다”라는 논증의 전제 중 하나로 들어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 논증의 전제들로부터 결론이 올바르게 도출되었는지를 평가한다. 혹시 추론에서 숨은 가정은 없는지 살펴본다. 그렇다면 너는 제일 멋진 멤버의 기준으로 춤과 애교와 패션센스는 포함시키지만 외모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니? 그 기준은 누구 맘대로 정했어? ‘발끈’하지 않고 ‘평가’한다. 무엇보다 상대방의 말이 틀렸는지 맞았는지, 틀렸다면 왜 틀렸는지를 조목조목 따져볼 수 있으니 제일 만족스럽다.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응징하는 법」중에서
논리실증주의자들이 확실한 지식을 얻기 위해 철학적 논의에 자연과학의 방법을 가지고 왔듯, 내게 제안을 하는 사람을 과연 믿고 따를 수 있을지 고민이 될 때 나는 추억 속 ‘낯선 사람 경계하기’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 방법을 적용해본다. 상대가 나에게 흐뭇한 기대감을 선사해준다는 이유로 상대를 믿고 불확실한 영역에 발을 디디는 건 마치 사탕을 줄 테니 같이 가자고 하는 낯선 이를 순순히 따라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무리 상대가 자신감이 넘치고 의도가 좋아도 마찬가지다. 거의 프레젠테이션급으로 계획을 설명하고, 그 계획대로만 되면 탄탄대로라고 나에게 자신만만하게 얘기해도 정작 그 계획을 실현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믿고 따르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다.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하게 해주겠다며 호언장담하는 사람을 따라나섰다가 하고 싶은 걸 하기는커녕 할 수 있는 것의 가짓수가 줄어드는 상황이 되어서야 안 되지 않겠는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중에서
내가 착해서 문제라고 생각할 때 착하면 안 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내가 하는 행동을 두고 사실은 스스로 원치 않는데도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한다. 좀 더 약삭빠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함께, 사람들을 대할 때 내가 손해를 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며 괜한 피해의식을 느낀다. 이때 심리적 이기주의의 관점을 빌려와 나의 행동을 바라본다면 그런 강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손익계산적인 사람인 것이다. 내가 이미 충분히 나 자신을 위해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니 대인관계에서 불안감이 사라진다. 지금 당장 손해를 보는 것 같은 일을 했더라도 그것이 결국엔 나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옜다 하고 미련 없이 훌훌 털어버릴 수 있다. ---「착해서 자꾸만 호구가 되는 것 같다면」중에서
저팔계 사건이 있고 나서 나는 당연하게도 유치원에 가는 것을 싫어하게 됐다. 이건 단순히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난생처음 제대로 마주한 타자가 너무나 불편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각자에게 타자라는 존재가 불편한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타자를 꺾어 내 밑으로 들어오게 해야 비로소 나 자신을 주체적으로 정립할 수 있으니, 타자를 만난다는 것은 곧 싸움의 시작을 의미한다. 하지만 타자를 지양함을 통해서만 나는 나 자신을 더 명확하게 확립할 수 있다. 내가 보다 주체적인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토록 불편한 타자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타인이라는 존재가 불편하게 느껴질 때」중에서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 상대방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제자리인 것만 같은 관계에 지쳤다면,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나 자신에게로 눈을 돌리자. 관계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가짐과 태도가 변하는 순간, 그동안 꿈쩍도 않던 관계에도 새로운 빛이 들어올 테니까. 기존의 상대와 새로운 국면의 관계를 맞이하든 아니면 관계를 정리하고 새로운 사람을 찾아나서든, 둘 중 어느 쪽의 변화이든 간에 이전보다는 한 단계 발전한 모습일 것임에 틀림없다. 만나고 헤어짐의 마지막 해피엔딩은 과연 어디인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관계에서의 변증법을 반복해나가다 보면 언젠간 알게 되지 않을까. 변증법적 도약의 마지막, ‘절대정신’의 단계에 이르러 세상의 진리를 모두 파악하게 된 정신처럼. ---「너라면 내 마음을 알아줄 거라 생각했는데」중에서
정언명령에 의거하여 우리 모두 도덕군자가 되자는 말을 하려고 칸트 선생님을 모신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정언명령이 불손한 세상을 살아가며 혼란을 느끼는 우리에게 테라피가 되어주기 때문에 이 상담의 자리를 마련했다. 칸트의 윤리학에 들어 있는 이 정언명령이라는 사상에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모든 인간은 항상 목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지극히 칸트다운 이 생각,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드는 이 도덕 원칙에 따르면 사람은 결코 다른 것을 위한 수단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제 칸트 선생님의 처방이 내려진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모든 사람 즉 인류를 향한 존중이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꽤 많이 드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나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자문자답을 통한 정언명령이 나의 신념을 잡아준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서라면 무슨 말이든 던지고 보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NO’라고 말할 수 있는 단호함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을 이용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NO’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나도 내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해야 할까」중에서
내가 신체를 더 잘 파악하여 보다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을 알아냈더니 내 생각의 종류와 질도 더욱 늘어났다는 바로 이 경험이 스피노자가 설명하는 인간의 신체와 정신 사이의 관계를 매우 잘 요약해준다. 스피노자가 말하길, 우리는 신체가 외부로부터 받는 자극을 통해서 정신적인 관념을 형성한다. 그렇기에 신체적 자극을 더욱 다양하고 복잡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정신적 관념 또한 더욱 다양하고 복잡해질 수 있다. 신체의 역량이 얼마나 되는지에 따라 정신의 역량도 결정된다는 이야기다. 앞서 내려진 결론과 합쳐보면, 결국 자신의 신체를 더 잘 알고 또 그 신체를 잘 쓸 수 있는 사람일수록 정신의 역량이 크다는 결론이 도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