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하는 기곈데요?”
“그게요, 설명서를 첨부했는데요, 한마디로 기능을 말하기가 까다로운 게, 기능이 없어요. 이 프로젝트 제품은 기능성 제품이 아니고, 말하자면 존재성 제품이었어요. 뭘 하는 제품이 아니라 그냥 존재하는 제품인데요, 사실 회사에서도 제품 콘셉트를 확정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여러모로 복잡해요.”
--- p.15
"자, 그럼 우리가 지금 우주로 떠나보내려는 물건은 뭐죠?”
“신우정 박사 유작입니다. 신 박사가 남긴 메모에는 존재를 추출해내는 기계라고 적혀 있습니다.”
“인공지능 같은 건가요?”
“아니요. ‘인공존재’라고, 최고의 공학자가 만든 물건입니다. 이건 진짜 예술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쓸모가 하나도 없거든요.”
“존재라, 태생적으로 외로운 물건이군요.”
“네. 외롭게 태어난 물건입니다.”
“우리만 외롭게 태어난 게 아니었군요. 자, 그럼 그 외로운 인공존재를 우주로 내보내도 될까요?”
--- p.36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선생님이 나보고 뒤에 나가서 서 있으라는 거야.
“설명할 수 있는데요.”
나는 그렇게 말했어. 그랬더니 선생님이 설명을 해보라는데, 나는 앞에 나가서 해도 되느냐고 물었어. 나도 그림이 필요했거든. 선생님은 얘가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나 하는 표정이었지만,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어. 나는 앞으로 나가서 내가 알고 있는 대로 그림을 그렸어.
행성은 주전원--- p.周轉圓)이라는 원을 따라 도는데, 주전원의 중심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이심원을 따라 돈다. 그래서 지구에서 보면 저렇게 꼬불꼬불한 모양으로 움직인다. 저 꼬불꼬불한 궤도의 안쪽 곡선이 바로 역행현상이 일어나는 지점이다. 그렇게 말했어. 『알마게스트』에서 배운 대로였어. 그랬더니 선생님이 이렇게 말하는 거야.
“니네 나라에서는 그렇게 가르치냐?”
그건 내가 학생이었을 때 일어난 일이지 1633년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고. 그런데도 나는 다른 사람들이 전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알고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게 된 거야. 그래서 깜짝 놀랐어. 나만 빼고 다들 그렇게 알고 있다니. 내가 얼마나 놀랐겠어.
--- pp.58~59
그때 버스기사가 차에 올라타더니 문을 닫고 사람들에게 뭐라고 소리쳤다. 물론 나는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말이 떨어지자 다른 승객들은 모두 성가시다는 얼굴로 버스 안 구석구석으로 고르게 퍼져 앉는 게 아닌가. 잠시 뒤에 버스 위쪽에서 쿵 소리가 났다. 나는 황급히 가방을 감싸안으며 앞좌석 등받이에 붙어 있는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버스가 공중으로 둥실 떠올랐던 것이다.
--- p.89
눈을 감았다. 그리움이 맞닿았다. 맞대놓고 보니 둘이 별로 다르지가 않았다. 낯선 곳, 낯선 밤으로부터 나에게로 이어진 단 하나의 연결고리. 은경이가 나를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이성은 길을 잃고 공중을 맴돌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쉬움. 말로는 물을 수 없고 말로는 대답할 수도 없는, 우리가 만났기 때문에 시작된 이 모든 일. 그게 다 은경이였다.
--- p.107
마로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더더욱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미성이는 도대체 어디서 그런 이야기들을 갖다 쓰는 것일까. 아이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평범하고 어리기만 했다. 그리고 이야기 속의 마로하가 누구인지 알아낼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 p.142
자동반응이라는 현상이 나타나요. 합체되고 나면 그 하나하나의 개체들은요, 새로 만들어진 자기네 집단자아를 정말 끔?찍하게 사랑하거든요. 그래서 그 집단자아가 손상을 입는 걸 참지를 못해요.
--- p.178
“여기는 원 제국 팽창기에 스스로를 몽골인이라고 불렀던 투르크계 상인들이 무역로를 개척했던 곳이야. 마을이 있었는데 전쟁 중에 유실됐어. 그래서 그 시기의 미묘한 민족성을 지닌 유목민 계열 정착민 양식의 혼령들이 출몰해. 굉장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곳이라고.”
--- p.204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이곳의 밤이 무섭지가 않다. 혼자인데도. 그저 마냥 행복하다. 나는 내가 왜 이런 모습을 한 어른으로 자라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훌륭한 인물도 아니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닌. 그나마 이때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다 날려버릴 것처럼 뒤숭숭했던 내 마지막 발굴작업, 모두가 나를 떠나버리게 만든 광기.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도대체 왜 이런 어른이 되고 말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저 행복하기만 하다.
--- p.236
이 책을 내면서 세상에는 둘 이상의 전혀 다른 ‘작법-독법’ 세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토론으로 얻은 이론상의 발견 같은 것이 아니라, 원고와 교정지 위에서 얻어낸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지식이었다.
--- pp.300~301
지난 10년간 한국문학계가 겪은 변화를 반영하는 작업을 거쳤다. 이 작업을 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언제나 고마운 일이다.
--- p.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