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롭게도 학생들은 추상화 수준이 높으면 그 나름대로 쉽게 소화하는 방식을 갖고 있다. 구태여 자신의 삶과 연결시켜 볼 필요없이 고식을 외우듯 머리 속에서 처리해 버리는 것이다. 사실상 이것은 입시 위주의 교육 체제에서 숨쉬듯 해오던 것이라 이 치열한 입시 전쟁에서 살아 남은 학생들은 매우 빠른 시간 내에 어려운 텍스트를 끄덕없이 요약해 낸다. 물론 이것은 전혀 바람직한 학문 하는 방법이 아니나 학생들 자신이 무엇인가 어려운 것을 배웠다는 뿌듯한 느낌을 갖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일상적 삶을 비추어주는 개념을 다루게 될 경우 사정은 달라진다. 문화와 관련된 가의는 헌실을 보는 감각을 공유하는 바탕이 없이는 의미있게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은 숫자나 추상적 수준에서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자신의 문제로 풀려져야 하므로 여간 어렵지 않다. 이는 곧 우리의 인식 체계, 우리 자신들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우리 것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또 한번 인식하게 한다.
--- p. 21
이 책은 우리의 겉도는 글, 헛도는 삶에 관한 책이다. 글을 읽을 때 우리는 당연히 그 내용을 우리 자신의 삶과 연결하여 적극적이고 창조적으로 읽어낸다. 당연히? 아니, 대부분의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나는 왜 우리가 책을 자신의 삶과 연결지어 읽어내지 못하는지를 캐묻고 있다. 인문사회과학 계통의 책을 읽으면서 텍스트를 자신의 삶과 연결지어 적극적이고 창조적으로 읽어내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간단히 말해서 이 책은 자아 성찰의 기록이며 '지식과 식민지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 p.책 머리에 중에서
박완서의 작품 세계가 그러한지는 뒤에 이어지는 다른 평자들의 논의에서 자세히 밝혀질 것이므로 여기서는 한 가지만 지적하려고 한다. 남근중심적 비평은 남자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사회가 성 범주를 중심으로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으며 또 그 구조화가 현대인들을 어떻게 억압하는지를 파악하지 못한 채 전통적인 여성상에 매달리는 사람이라면 남녀를 불문하고 박완서의 작품을 읽어도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하며 깊이 생각할 거리도 얻어내지 못한다. '여성', '남성'은 되어지는 것이지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p. 208)
--- p.
막상 비판의 화살을 겁없이 던진 지금, 나는 내가 던진 화살이 부메랑처럼 내게로 돌아오고 있는 것을 느낀다. 여전히 논문 끝네 붙은 참고문헌의 대부분은 서양 사람이 쓴 것이고, 학생들에게 읽히는 교재도 서양 것이 대부분이다. 학풍을 이어간다는 면에서 '이렇습니다' 하고 자랑스럽게 내세울 스승도 없으면서 그나마 어렵게 베풀어진 스승의 사랑을 간단히 넘겨버리는 나, 선배들을 그다지 존중해 본 적이 없는 나의 '오만기'가 바로 나 자신 깊이 내면화하고 있는 식민지성의 표상이 아닌가?
--- p.192
대학에 들어가서 학생들은 비로소 본격적 책 읽기를 할 기회를 갖게 되고 또 새로운 책들을 만나게 된다. 특히 맑스주의적 책을 읽으면서 학생들은 자신이 어른들이 '불온시'하는 책을 '주체적으로' 찾아 읽게된 기쁨과 아울러 비로소 지식인이 되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동안 사회를 알아가는 호기심을 억제해온 학생들에게 대학에 입학하면서 읽게 되는 사회변혁과 관련된 책들은 해방의 느낌을 갖게하기에 충분하다.
--- p.166,---pp.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