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는 의심하기 시작했다. 왜 옛이야기에 나오는 남자들은 모두 도움이 필요한 불쌍한 존재인가? 왜 그들은 한결같이 무능하거나 불구이거나 (강간) 범죄자일까? 왜 계모는 모두 나쁜 여자일까? 왜 딸들은 버림을 받고도 아버 지를 구하거나 살리기 위해 죽음의 시련을 견뎌야만 하는 것일까?
권선징악의 결말로 끝나는 그 모든 옛이야기에서 ‘선’은 과연 누구를 위한 ‘선’이며 ‘악’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선’과 ‘악’은 누구의 관점 혹은 입장에서 기술되는가?
기존의 옛이야기들을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했고 모두 새롭게 다시 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여성의 시각으로 다시 보자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래서 페미니즘의 눈으로 다시 쓴 우리의 옛이야기에서는 묵살되고 지워진 여성들의 목소리가 부활한다.
--- p.10~11 「프롤로그 ‘이제 우리는 의심하기 시작했다」 중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옆집 할멈에게 나를 맡겨버렸다.
어머니를 측은해하던 옆집 할멈은 불평을 해댔지만 그래도 투박한 손으로 나를 안아주었다. 돌이 지나 걷기 시작한 아이를 늙은 할멈이 돌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할멈이 지치면 동네 이 집 저 집에 나를 맡겼다. 나는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며 눈칫밥을 먹었다. 눈칫밥이라는 것이 그런 건지 겨우 좋다 싫다는 말이나 하는 어린애였는데도 늘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나를 대하는 동네 어른들의 측은해하는 눈빛도 싫었다. “에 유, 저런 불쌍한 거”하며 혀를 끌끌 찼다. 그 말 뒤에 숨겨진 자신의 아이를 보며 안도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내 속은 뒤틀리고 있었다.
놀이에 끼워주지 않는 여자애들이나 나를 놀려먹는 남자애들 가리지 않고 내 성질을 건드리면 주변에 있는 것들을 던져댔다. 용케도 어른들이 볼 때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는지, 애들끼리 있을 때만 행패를 부렸다. 애들을 울리고 난장판을 만들어도 어른들 눈에 띄지 않았고, 나는 점점 능숙하게 두 얼굴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나는 그저 불쌍하고 눈치 보는 애로만 여겨졌다.
--- pp.23~24 「신콩쥐팥쥐」 중에서
어머니가 없었던 콩쥐는 일찍 아내를 잃고 슬퍼하는 불쌍한 홀아비를 동정하는 동네 아낙들의 젖도 얻어먹고, 십몇 세가 되어 스스로 집안일을 돌볼 수 있을 때까지는 살림 못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콩쥐를 돌보던 마을의 지원과 돌봄도 받았을 것이다. 그야말로 마을의 환대를 경험하며 선하게 성장한 아이가 콩쥐였으리라.
그렇게 사랑만 받던 콩쥐가 계모와 의붓자매에게 태어나 처음 미움을 받는다. 재수 없게도 어찌어찌 어렵사리 가게 된 남의 잔치 가는 길에 꽃신을 잃어버리고, 천운처럼 그 신을 찾아 헤맨 페티시의 소유자 김 감사의 두 번째 부인이 되지만 그 행운조차 오래가지 못한다. 팥쥐에게 살해당하고 영혼 혹은 귀신이 된다. 기왕 귀신이될 거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울트라 파워 원귀가 되지 자기를 해친 당사자에게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안/못하고, 귀신이 되어서도 울고만 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원망하면서.
--- p.68 「다시 쓴 작가의 이야기 ‘콩쥐와 팥쥐 그리고 나'」 중에서
옛날 반도의 어느 작은 산골 마을에 힘이 센 오누이가 살고 있었다. 아들도 딸도 힘이 세어 어렸을 때부터 노는 모양이 남달랐다. 아들 길동은 무엇이든 부수고, 딸 길영은 무엇이든 아주 크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엄마에게는 부수는 아들이나, 남다른 크기와 단단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딸 모두 버거웠다. 그 뒷감당을 혼자 해내자니 이 아이들을 어찌 키워야 할지 두려움만 매일 앞섰다.
--- p.90 「홍길영전」 중에서
「아기 장수」 민담에서 파생된 아기 장수에게 그만큼 힘이 센 동급의 누이가 있다는, 또 다른 민담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오누이 힘겨루기」다. 「오누이 힘겨루기」 민담에서는 힘이 남달리 센 오누이가 등장한다. 오누이는 주로 과부인 엄마와 함께 산 아래 사는데 분명하지 않은 이유로 목숨을 건 힘겨루기 내기를 한다.
충남 공주의 무성산성에 얽힌 전설이 이 「오누이 힘겨루기」의 전형적인 서사를 가지고 있는데 특히 이 산성은 지역민들에게는 ‘홍길동성’이라고 불리고 있다. 그러니까 홍길동과 그 누이가 힘겨루기 내기를 했고 그 결과와 흔적으로 무성산성이 남았다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무성산성 전설의 서사에는 분명히 홍길동의 누나가 그 산성을 쌓았는데 무성산성이 ‘홍길동 누나산성’이 아니라 ‘홍길동성’이라고 불린다는 점이다. --- pp.138 ~ 139 「다시 쓴 작가의 이야기 ‘홍길동에게는 누나가 있었다’」 중에서
“구미호래요! 불여우래요. 꼬리가 아홉이래요.”
사내아이들이 합창하며 고개 아래로 우르르 달리기 시작했다.
여우고개에 사는 구미호에게 돌과 풀을 뜯어 던지고 놀리다가 구미호가 빗자루를 휘두르며 쫓아오자 다들 우다다다 내빼기 시작했다. 뒷집 영호가 재미난 거 구경시켜준다고 해서 따라왔던 미경은 사내아이들 뒷전에서 소심하게 풀을 뜯어 던지는 시늉을 하며 재밌다고 같이 웃고 있었다. 그러다 구미호가 빗자루를 휘두르며 달려 나오고 사내아이들이 잽싸게 달아나며 놀리는 노래를 부를 때, 미경은 그만 돌부리에 걸려 철퍼덕 넘어지고 말았다.
--- p.148 「꼬리가 아홉인 이야기」 중에서
치명적인 여성, 팜므 파탈 Femme fatale 이 처음 등장한 것은 후기 낭만주의 시에서부터였다. 자연 속에서 홀연히 나타나 남자를 꾀어서 넋이 나가게 해서 망치는 그런 여성이 영국에서는 존 키츠 John Keats 의 「자비가 없는 아름다운 아가씨 La Belle Dame Sans Merci 」에 등장한다. 이해할 수 없는 불가지의 존재에 비합리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대상으로 여성과 자연은 이렇게 하나로 융합된 이미지가 된다.
이 자연 속에서 나타난 남자를 홀려 파멸시키는 이미지가 바로 중국과 한국의 구미호의 이미지와 일맥상통한다. 대체 여우가 위험하면 얼마나 위험한 동물이기에, 여우는 이렇게도 여성형으로 의인화되어서 숱한 전설과 민담에 남았는지 새삼 궁금해지는 지점이 아닐 수 없다.
--- p.187 「다시 쓴 작가의 이야기 ‘꼬리가 아홉인 이유’」 중에서
사슴 : 옥황상제님, 쇤네는 그저 억울하옵니다. 저 계집이 아직 어려서 뭘 몰라 그럽니다. (마야를 향해) 원래 땅에서는 다들 그렇게 수컷이 암컷을 어르고 꼬셔서 짝짓기하고, 새끼 낳고, 지지고 볶고… 그려, 뭐가 좀 힘들었나 본데… 그건 니 부모한테 가서 따져야지. 왜 화살을 애먼 사슴한테 돌리고 그려?
마야 : 은혜를 갚으려면 뭐라도 네 것을 내줬어야지, 왜 우리 엄마의 인생을 통째로 갖다 바쳐?
신하 : 옳거니! 은혜를 갚으려면 산삼 묻힌 곳을 알려주든가, 아님 네 뿔이라도 잘라 바칠 것이지.
상제 : (큰 헛기침. 신하에게 나즈막히 속삭인다.) 야, 중립, 중립!
신하 : (얼른 고개를 조아린다.) 황공하옵니다.
마야 : 너 때문에 우리 어머니, 나와 동생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 (격양된다.) 우리 엄마는 하루도 빠짐없이 한숨 쉬고, 눈시울을 붉히셨어. 바로 네놈 때문에! 매일 눈물 짓는 엄마 밑에서 사는 게 어떤 건지 네가 알아? 이 사슴 새끼야!
--- p.202 「하늘 재판 극, 고통을 벗고 치유의 날개옷을 입다」 중에서
「선녀와 나무꾼」에는 세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중 맏딸로 태어난 마야가 바로 새로 쓰는 옛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마야는 필자가 심리치료 현장에서 만났던 수많은 여성을 대변하는 인물입니다. 마야의 허스토리는 여러 내담자의 합성이지만, 어떤 것은 제 삶의 노트에서 바로 가져왔습니다. 끝이 열린 구조의 재판 극 형식으로 썼으므로 지금부터 여러분은 이 희곡의 말미를 장식할 작가 혹은 이 재판의 배심원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참여와 공정한 평결을 위해 몇 가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 p.237 「다시 쓴 작가의 이야기 ‘선녀와 나무꾼, 그 숨겨진 이야기’」 중에서
웅녀에 대한 신화는 본래 웅녀의 아들이며 동시에 한민족의 시조이기도 한 단군의 이름을 붙여 「단군신화」라고 불려왔다. 그러나 나는 이 신화가 ‘웅녀신화’라고 불려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단군이 아니라 웅녀가 이 신화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신화의 중심행동은 그녀로부터 일어난다. 나는 곰이 여성으로 변신하는 과정이 ‘웅녀신화’의 중심 테마라고 믿는다. 지금부터 나는 웅녀의 변신이 일어나는 신화의 두 번째 부분에 집중할 것이다.
여성의 몸은 원시인류에게 ‘비밀’을 담고 있는 현장으로서, 답을알 수 없는 의문을 던진다. 생명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새 생명의 전달자이며 동시에 기적과도 같은 변신(임신과 출산)의 주체로서 여성의 몸은 남성에게 문제가 된다. 그래서 그들은 성인으로 입문하는 중요한 시기에 초점을 맞추고 필사적인 남성판 인간창조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다양한 창조설에서 흔히 나타나듯이 한국판 최초 인간 창조 이야기도 여성의 출산능력을 왜곡하거나 부정했다는 측면에서 예외가 아니다.
--- pp.264~266 「[부록논문] 단군신화에 나타난 한국 여성의 분열 - 웅녀와 호녀의 이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