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상한 게임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혼자 반문하다가 성우는 깜짝 놀랐다. 다운로드 수가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게임에 대한 평점 역시 이상하게 높았다. 자연스럽게 게임에 대한 리뷰들도 살피게 되었다. 재미없다는 말이나 게임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리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좀 더 손쉽게 레벨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을 공유해달라는 요청이 대부분이었다. 그 정도로 재미있는 게임인 걸까? 아니면 게임을 마스터했을 때 주어지는 보상이 어마어마한 걸까? 궁금했지만, 이 게임을 마스터했다는 리뷰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다. 결과를 알고 싶은 오기가 생겨 리뷰들을 더 꼼꼼하게 살피다가 성우는 한 리뷰에 서 스크롤을 멈췄다.
ID: avenger321
복수는 차갑게 해야 제맛!
--- p.25
아버지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그날, 아버지 집에도 화재가 발생했다. 이번 화재는 원인도 범인도 바로 드러났다. 기승만의 아들인 내가 범인이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방화로 인한 피해는 거의 없었고, 집 안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사망자나 부상자 역시 없었다. 방화에 실패했지만 나는 스스로 방화범이란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불 지른 이유를 만천하에 공개해야만 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기자는커녕 경찰서조차 가보지 못하고 바로 정신과병원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몇 년 동안 그곳에서 진짜 미친놈으로 살아야 했다. 그때 내 나이 겨우 열여덟이었다.
--- p.39
“복수를 한다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렇게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죠.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듯 고통의 통점도 다른 법이니까. 내겐 고통이지만 상대방에겐 그게 행복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진짜 복수를 하고 싶다면, 그 사람의 심장에 흐르는 피가 몇 도인지 알 정도로 그 사람에 대해 모르는 게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진짜 복수는 내가 아닌 그 사람이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무언가를 던져주는 겁니다. 그게 당신한테는 달콤한 꿀처럼 여겨지더라도.”
--- p.96
도대체 이 인간들은 왜 이렇게까지 해서 복수를 해주겠다는 거지? 그저 돈을 벌겠다는 목적이었다면 이렇게 고객들을 힘들게 하면 안 될 텐데. 설마 다른 목적이 있는 걸까? 어쩌면 경찰들이 어떤 수사를 하기 위해 깔아놓은 밑밥 같은 걸까?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이놈의 지랄 맞은 성격 때문이었다. 각각의 주관식 문항에 걸맞은 소설을 적어놓고 저장 버튼을 누르는 순간, 바로 기절하듯 곯아떨어졌다. 그렇게 열여덟 시간이나 잠을 자고 나서 야 해당 문서를 보낼 수 있었다. 보내고 나니 궁금증이 하나 더 늘었다. 그들은 나를 어떻게 판단했을까? 내 진심을 알아차렸을까?
--- p.104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내의 얼굴은 분명 내가 복수를 해야 할 대상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니라고. 내가 납품한 부품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고. 설사 하자가 있었더라도 내 딸의 죽음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핏대를 세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저 가슴 밑바닥에서 시커먼 죄책감이 새벽안개처럼 묵직하게 피어오르더니 부지불식중에 내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랐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제 나는 누구에게 분노해야 하는 걸까? 누구에게 복수를 해야 하는 걸까?
--- p.146
누가 봐도 완벽한 엔딩이었다. 그런데 왜 나는 지금 이 착잡한 심정을 떨칠 수 없는 걸까? 내 손으로 적의 심장에 칼을 꽂는 것만큼 통쾌한 복수는 아니었지만, 꽤 완벽한 복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아팠고, 답답하고 먹먹했다. 이대로 영원히 나는 기쁨이 뭔지 행복이 뭔지 모르는 삶을 살게 되는 걸까? 복수의 끝이 이렇게 지리멸렬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왜일까? 왜 복수를 하고도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는 걸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완벽한 복수를 했다고 하더라도 죽은 서연이는 살아 돌아올 수 없고, 끔찍했던 지난 10년의 세월 역시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랬다. 복수는 그저 복수일 뿐이다. 내 끔찍한 삶을 다시 예전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것은 복수가 아니라 나 자신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복수의 쓰디쓴 결말을 꾸역꾸역 삼키며 복수전자 이메일 화면을 무심코 스크롤 하다가 미처 읽지 못한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
추신: 완벽한 복수가 완벽한 위로를 주지는 못하겠지만, 또 다른 희생자를 막았다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기를 바랍니다.
--- pp.181~182
사실 나는 지난 12년 동안 여러 가지 루트를 통해 디모테오의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결국 디모테오가 사제직을 내려놓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이제 디모테오에게 남은 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디모테오는 내 예상을 여지없이 깨뜨렸다.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행보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연쇄살인범이었던 아버지가 남긴 땅과 집을 팔아 건물주가 되는가 싶더니 그 건물에 직접 복수전자라는 전파상을 차렸다. 전직 신부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전파상이라니! 도대체 왜 그런 이상한 가게를 차렸을까? 분명 알려지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의심이 많았던 나는 디모테오와 복수전자에 대해 더 깊이 알아내야 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결국 나는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 pp.242~243
모두가 의아해했다. 왜 디모테오를 죽이지 않고 베드로 신부를 죽였는지. 나를 체포했던 경찰조차도. 그 당시 나는 그저 내 분노를 받아줄 대상이 필요했고 그 대상으로 디모테오만 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디모테오를 죽이고 싶었고, 죽이려고 했었다. 하지만 디모테오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만약 디모테오가 내 분노를 조금이라도 두려워했다면, 나는 기꺼이 디모테오를 죽였을 것이다. 그게 가학적인 사람들의 심리였다. 두려움이 없는 얼굴,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얼굴을 좋아할 살인자는 별로 없을 테니까. 안타깝게도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디모테오의 눈빛도 그랬다. 그 어떤 두려움도, 절망도, 분노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디모테오가 과연 나를 죽일 수 있을까?
--- pp.266~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