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0년 08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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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08쪽 | 266g | 126*186*20mm |
ISBN13 | 9791190413145 |
ISBN10 | 1190413140 |
발행일 | 2020년 08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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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08쪽 | 266g | 126*186*20mm |
ISBN13 | 9791190413145 |
ISBN10 | 1190413140 |
저자의 말 ― 속물과 인질 1 자본의 생애는 반복된다 ·재생산의 관점에서 본 자본의 정체 ·자본의 운동은 자본의 재생산을 위한 것 ·왜 여기서 ‘자본의 재생산’을 다루는가 2 사라지는 가상들, 드러나는 자본의 정체 ·생산과정은 재생산과정이기도 하다 ·독립성의 가상이 사라지다 ·‘자본가가 지불자’라는 가상이 사라지다 ·등가교환의 가상이 사라지다 3 드러나는 계급관계 ·자본의 재생산은 노동자의 재생산 ·자유로운 교환의 가상이 사라지다 ·노동하지 않는 시간에도 노동자는 생산한다 ·최선의 세팅―노동자계급은 자본의 부속물 ·자본의 재생산은 자본관계의 재생산 4 자본가는 축적을 어떻게 정당화하는가 ·잉여가치는 어떻게 자본이 되는가 ·‘타인의 노동력’ 소유를 통한 잉여가치의 사유화 ·자본축적에 대한 부르주아 경제학의 틀린 생각 ·자본가 또한 자본축적 메커니즘의 톱니바퀴 ·역사적 권리에는 날짜가 없지 않다 ·축적의 길은 고행의 길, 자본가는 수도사? 5 축적은 착취에 달려 있다 ·착취가 늘어나면 축적이 늘어난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왜 빨리 죽는가 ·노동생산력 증대는 축적을 가속화한다 ·규모가 커지면 축적은 탄력을 받는다 6 ‘노동자계급의 밥그릇’에 대한 엉터리 도그마 ·자본은 용수철 신발을 신었다 ·노동자의 수프 접시 크기는 정해져 있다? ·노동자들의 숟가락이 작은 것 ·드디어 찾아낸 범인, 심판의 법정이 곧 열린다 부록노트 Ⅰ―‘건축물’ 비유와 재생산의 관점 주 |
철학자 고병권과 함께 읽는 북클럽 자본 시리즈 열 번째 책 [자본의 재생산]은 마르크스 [자본] 1권의 마지막 편인 제7편 ‘자본의 축적과정’중 제21장 ‘단순재생산’과 제22장 ‘잉여가치의 자본으로의 전화’에 대한 읽기이다. 제7편은 제21장부터 제25장까지이다.
저자는 제7편에서 마르크스가 자본의 생산을 다루기는 하지만 그가 주목하는 것은 생산이 아니라 생산의 반복, 즉 축적과정이라고 말한다. 자본생산의 반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생산물을 판매하여 화폐로 전환하고 그 화폐가 다시 생산에 투입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유통과정을 마르크스는 [자본] 2권에서 다룬다. 또 앞에서 살펴본 대로 잉여가치는 전적으로 자본가의 소유만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자, 지대, 상업이윤 등 여러 형태로 분배된다. 마르크스는 이를 [자본] 3권에서 분석하고 있다. 따라서 [자본] 1권에서는 유통과정과 잉여가치가 분배되는 형태에 대한 분석은 생략하고 단순화했다고 한다. 저자는 그렇게까지 하면서 마르크스가 1권에서 재생산을 다루는 이유는 재생산의 관점에서 자본의 생산을 보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야 생산과정만 분리해서 보았을 때 볼 수 없었던 것들, 즉 개별성이나 우연성에 가려 있던 자본주의적 생산의 정체와 한번만 보아서는 알 수 없었던 자본주의적 생산의 어떤 경향이 보이기 때문이다. 재생산의 관점에서 자본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이고, 축적과 더불어 나타나는 자본의 기본 경향을 읽는 것이 시리즈 열한 번째 책인 다음 책의 주제라고 한다.
재생산의 조건은 생산의 조건들과 동일하다. 생산수단과 생산자인 인간의 충원이 되면 재생산은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적 형태와도 상관이 없다. 자본의 입장에서 생산수단의 충전은 생산적 소비 형태를 띠는 생산재이고, 인간의 충원은 소비재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재생산을 정식을 통해 자세하게 분석하지만 개별자본가의 입장에서 쉽게 말하면 잉여가치가 자본가 자신이 소비하는 돈보다 크거나 같아야 한다는 말이다. 같으면 단순재생산이고 크면 확대재생산이다. 만약 적다면 경제공황이다. 그리고 이것은 생산과 소비가 끊임없이 유통되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생산과 유통은 일련의 유기체적 관계임에도 우리는 서로 독립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자본의 본모습을 쉽게 알지 못하게 만드는 가상이 제거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 노동자는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을 통해 노동력의 대가와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다시 말해 외견상으로는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하지만 실제로는 노동자가 자신이 생산한 임금(노동력의 대가)을 자본가를 통해 받는다. 이는 노동력의 대가가 화폐로 전환되면서 일어나는 착각이며, 거기에 더하여 자본가는 이를 분배의 문제로 바꾸어버렸다고 한다. 이로써 임금의 지불자는 자본가라는 또 하나의 가상이 사라진다고 한다. 결국 마르크스가 이를 통해 주장하는 것은 초기자본은 자본가 자신의 것일지 몰라도 재생산이 이루어지면 그 자본은 잉여가치에서 나온 것이며, 노동력에 대한 등가교환은 단지 외관이자 형식이고 기본적으로는 착취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자본가는 자본의 인격적 구현, 즉 인격화된 자본을 말한다. 사회적 총자본에도 그에 부합하는 인격으로써 총자본가가 있다. 총자본가란 개별적이고 특수한 자본가들을 하나로 합쳐 부르는 말로 자본가계급을 의미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재생산이란 노동력의 재생산이자, 소외의 재생산, 가난의 재생산이며 계급관계도 생산하는 자본관계의 재생산이라고 말한다. 생산과정이란 자본가가 구매한 노동력의 소비과정으로 노동력은 자본가의 전유물이다. 따라서 노동력에 대한 전제적 지배는 노동자에 대한 전제적 지배가 될 수밖에 없으며, 이렇게 볼 때 자본의 재생산은 당연하게 노동력의 재생산이자 소외의 재생산이 된다. 또한 자본의 사회적 재생산을 계급의 관점에서 보면 가난은 자본가의 하수인이다. 가난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출현하는 역사적 조건이자 노동력의 지속적 공급을 보장하는 현실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본의 재생산이 계급을 생산하는 과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일반적으로 잉여가치는 계속해서 자본으로 변신하기 때문에 자본은 성장하고 축적된다. 자본 축적이 진행되면서 더 분명해지는 것은 노동하지 않는 인간이 소유자가 되고, 노동하는 인간은 무소유자가 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를 두고 자본주의적 취득(소유화)방식이 본래의 상품생산 법칙들과 상충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법칙의 위반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법칙의 적용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보았다. 처음 노동력을 구매하여 상품을 생산한다면 그 생산물은 자본가의 것이고, 생산물 속에 포함되어 있는 잉여가치도 자본가의 몫이라는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법칙이기 때문이다. 이는 노동력의 상품화가 자본가의 잉여가치 취득을 정당화해주는 핵심기제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당시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노동가치설을 주장하며 모든 추가 자본은 모두 생산적 노동자가 소비하고 자본의 크기는 고정된 것이라 오도하며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위해 복무했다고 한다. 자본가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이들의 주장을 악용했다. 고정된 것이라는 자본의 크기를 자본 전체가 아니라 가변자본에만 적용한 것이다. 다시 말해 노동자에게 줄 수 있는 돈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마르크스가 당시의 경제학자들을 비판한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자본이 고정된 크기가 아니듯 가변자본 역시 고정된 것은 아니다. 노동생산력의 증대로 잉여가치 생산이 늘어나면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서라도 잉여가치의 일부를 임금으로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노동자들이 사회전체의 생활수준 향상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는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주장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바로 총액임금제라는 말이 그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축적을 향한 자본가의 열망이 자본주의 사회의 사회적 메커니즘인 한에서 자본가의 실존은 자본주의와 더불어 이행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자본가들은 자본축적을 위한 톱니바퀴이자 자본의 죽음, 곧 새로운 사회형태로의 이행을 돕는 톱니바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이행적 성격을 띤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기위해서는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주장하고 비판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더 알아야하지 않을까 싶다. 자본축적과 더불어 나타나는 경향은 무엇일까? 다음 권으로 넘어가야겠다.
이 책의 첫 머리는 '실러'의 작품 가운데 <인질>이라는 제목의 시로 시작한다. 시칠리아의 참주 디오니시우스는 폭군이었다. 그래서 청년 다몬은 폭군을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처형될 참이었다. 다몬은 죽기 전에 '누이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처형장에 반드시 돌아오겠다며 '친구의 목숨'을 담보로 걸었다. 그러자 폭군 디오니시우스는 묘한 조건을 내건다. "좋다. 누이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게 해주겠다. 만약, 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친구를 너 대신 처형하고 네 죄는 묻지 않겠다"라고 말이다. 대놓고 도망을 치라고 권하는 조건이다. 하지만 다몬은 누이의 결혼식을 마치자마자 처형장을 향해 달렸고, 온갖 역경을 딛고서야 겨우 사형시간에 맞춰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지체없이 친구를 살리고 자신이 대신 처형장에 올라갔다. 친구의 목숨을 살리고 자신이 죽겠다는 당연한 결정이었다. 디오니시우스는 다몬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보고 받고, 둘의 우정에 '인간적인 감동'을 느껴 자신도 그들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내용으로 '실러의 시'는 마무리 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연극'을 준비한다. 디오니시우스의 역할을 '자본가'에게 맡기고, 다몬과 친구 역할은 '노동자들'에게 맡겼다. 과연 이 연극에서도 '해피엔딩'의 결말로 마칠 수 있을까? 노동자들의 '인간적인 모습'에 감동한 자본가가 노동자들과 친구가 되는 결심을 하게 될까? 마르크스는 꽤나 회의적인 감상으로 이 연극을 관람했을 것 같다.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해피엔딩'이라면서 말이다.
자본가들은 이윤을 얻어낼 수 있는 기막힌 방법을 잘도 찾아낸다. 자본가들은 하나를 내어줘도 두 개를 얻어내는 비법이라도 있는 걸까? 중세시대의 '영주와 농노 이야기'를 살펴보자. 농노는 일주일 중에 사흘은 '자신의 땅'을 개간하고, 또 다른 사흘은 '영주의 땅'을 개간하며, 주일엔 쉰다. 농노는 사흘간의 노동으로 '자신의 몫'을 챙기고, 사흘간의 세금을 치르는 '자유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주가 농노의 땅을 강제몰수 해버렸다. 그리고 일주일 중 6일을 일하게 만들고, 그 가운데 '사흘치 임금'을 주면서 나머지는 영주가 '자신의 몫'으로 챙겼다. 하루는 쉬게 해주고 말이다. 겉으로 봤을 땐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사흘치의 몫'을 챙기는 것은 똑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느 엄청나게 다르다고 말한다. 자유민일 때는 '생산자'이지만, 땅을 몰수 당한 뒤에는 임금을 받는 '고용자'가 되어 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유민일 때나 몰수 당한 뒤나 '세금'을 내는 의무는 같다. 여기서 또 차이점이 발생한다. 생산자일 때는 '사흘치의 몫'만큼 영주의 땅에서 일한 것으로 세금을 셈했기 때문에 '사흘치의 몫'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지만, 고용자일 때는 6일을 일하고서 3일치의 임금만 받았는데도, 그 '3일치 임금'에서 세금을 또 떼이게 되기 때문이다. 달라진 것은 또 있다. 생산자일 때는 영주가 세금만 받고 간섭을 하지 않았지만, 고용주일 때는 "내 덕에 먹고 사니 고마운줄 알아"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마르크스의 지적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자본가들도 노동자들에게 툭하면 하는 말이 있다. "내 덕에 먹고 사는 줄 알아. 내가 일자리를 만들지 않았으면 너희들이 어떻게 먹고 살 수 있었겠니. 그러니 고분고분 말 좀 잘 들으란 말이야. 파업 같은 거 할 생각하지 말고!"...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반대임을 알 수 있다. 노동자들이 일을 하지 않으면 기업이 하루라도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느냔 말이다. 업무가 멈추는 것은 물론, 공장의 기계도 헛돌 뿐일 것이다. 그런데도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눈치를 보며 쥐 죽은 듯이 시키는 일을 고분고분하게 할 뿐이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왜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이 발생한 것일까? 모두가 평등하다고 주장하고 평등한 관계에서 '합법적인 계약'을 했다고 하면서도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순간부터 '사용자'와 '고용자'는 지배와 피지배적인 관계로 돌변하고 만다. 아무리 억울한 일이 발생해도 '고용자'는 마음대로 사표도 낼 수 없다. 애초의 계약과는 다르다고 항변하지도 못하고 그저 묵묵히 일만 한다. 부당한 처우를 받아도 그저 꾹 참고 버틴다. 왜냐면 이곳을 나가 다른 회사에 취직을 해도 마찬가지 푸대접을 받기 때문이다. 자본가들끼리 서로 '악덕'이 되자고 모종의 합의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자본가라는 계급이 되면 그냥 자동으로 착취를 할 줄 아는 스킬을 습득하게 되는 것일까? 이처럼 '자본주의'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들 사이에 '해피엔딩'이 되기는 애저녁에 글러 먹었다.
그렇다면 자본가들은 어떻게 자본가가 되었을까? 태어날 때부터 자본을 두 손 가득 쥐고 태어나는 걸까? 그건 아니다. 그들도 애초엔 '없었다'. 그래서 악착같이 절약을 했다. 1세대 자본가들은 '수전노'와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는 돈'을 줄이는데 노력했다. 그렇게 돈을 모은 다음에는 자신이 '돈을 버는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면서 돈을 벌기 시작한다. 이른바 '2세대 자본가'다. 이들은 자신의 일을 '도제'에게 대신 시키면서도 일(기술)을 가르친다고 생색을 냈다. 그래서 고용을 했음에도 임금을 주기보다 수업료를 챙겼다. 그렇게 돈을 벌고 또 번 셈이다. 그러다 어느 정도 '자본축적'이 이루어지면 '돈이 돈을 벌어오는 구조'를 만들어서 돈이 알아서 모이도록 만든다. 그게 바로 '자본주의'다. 정확히 말하면 '자본이 돈(자본)을 벌어오는 시스템'이다. 이것이 바로 '3세대 자본가'의 완성형 모습이다.
이런 전통(?) 때문인지 자본가들은 '절약'이 몸에 베어 있다. 절약을 잘 했기 때문에 자본가가 될 수 있었다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절약은 노동자들이 아껴쓰는 것과는 다른 '절약'이다. 자본가들이 즐겨하는 '절약의 실체'는 바로 노동자들의 몫을 주어야 하는데도, 그 몫에서도 또 절약을 해서 빼앗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노동자들에게 제공하는 '한 끼 식사(점심)'의 재료를 값싼 재료로 바꿔치기 하면서 '비용 절감'을 유도하는 것이다.
실제로 영국의 자본가들이 영국 노동자들의 식사에 대해서 논평한 대목이 있다. "영국의 노동자들은 호화로운 식사를 한다.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더 값싼 재료를 절반만 먹고도 영국의 노동자들보다 곱절이나 더 생산을 해낸다(이책, 146쪽)"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무슨 빵까지 먹으려 하나. 귀리와 소금만으로도 배가 부를 텐데(이책, 146쪽)"라면서 자신의 불룩나온 배를 추켜올렸다고 한다. 이들이 피골이 상접한 노동자에게 한 말이라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심정이 들었다.
노동자들은 건강해야 한다. 자신의 유일한 '생산수단'이 맨몸뚱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건강을 잃는 순간 '생산도구'를 잃어버려 굶어죽는 수밖에 남지 않으니 어떻게 해서라도 건강을 잃으면 안 된다. 그런데 집도, 옷도, 먹을 것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아 늘 춥고 배고픈 이들이 '영국의 노동자'다. 이런 처지에 놓인 노동자들의 몫에서 더 많은 '절약'을 해야만 할까?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짓거리다.
암튼, 자본가들의 '자본축적'은 이와 같은 '근검절약'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미 노동자들의 '잉여생산'을 통해서 이윤을 챙긴 자본가들은 '자본을 재생산'하는 방법을 통해서 또 한 번의 '자본축적'을 시행한다. 돈이 돈을 벌어오는 시스템이라는 것이 이렇게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참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셈일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 1권을 읽어나가는 〈북클럽 『자본』〉시리즈의 10 권째이다. 이제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는 느낌이다. 1권 제 7편 「자본의 축적 과정」중 제 21장 "단순 재생산"과 제 22장 "잉여가치의 자본으로의 전화"라는 2개의 장을 다루고 있는데, '자본의 생산'을 높은 봉우리에서 조망하는, 즉 생산 과정의 반복이라는 자본의 자기 갱신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비로소 드러나는 '자본의 정체를 폭로'하는 장이라 할 수 있다.
전체로서 자본주의의 재생산,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산을 고려하는 관점에 서면 생산수단과 노동력 구매, 생산, 유통(판매)이라는 하나 하나 개별일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커다란 틀 안에서 움직이는 것, 그것들이 내재하고 있는 계기와 과정들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게된다. 이 관점으로부터 드러나는 주목할 만한 것은 '자본가는 결코 임금 지불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자본가가 노동자 자신에게 지불한 가치를 생산물가치에 담고, 생산물을 판매하면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지불했던 임금을 회수한다. 애덤 스미스가 말했듯이 "사실 고용주(자본가)는 아무런 비용도 들이지 않았"다고 해도 그릇되다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여기서 단순 재생산이나 확대 재생산을 설명할 생각은 없다. 자본가가 잉여가치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즉 생산에 투입할 것인지, 개인적으로 모두 소비하거나 그저 화폐 축재에 탐닉할 것인지에 따른 분류일 뿐이다. 다만 자본주의의 속성상 자본가는 확대재생산을 통해 잉여가치를 더욱 늘려나갈 것이라는 이해로 족할 것 같다. 잉여가치란 "등가물 없이 취득한 가치 내지 지불하지 않은 타인의 노동"이라는 불불노동(不拂勞動)이므로 이것을 극대화하려는 탐욕을 걱정할 까닭이 없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곧 노동력만 구매할 수 있다면 자본가는 계속해서 "대가없이 취한 돈으로 대가를 지불하며" 부를 늘릴 수 있다는 의미와 같다. 누군가 100억이라는 돈이 있다고 하자. 그 돈이 어떻게 그의 소유가 되었는지는 무시하고, 그가 1년 동안 생산수단 구입비로 80억을, 노동력 구입에 20억을 써서 120억을 벌었다고 할 때, 잉여가치는 20억이다. 단순재생산, 즉 잉여가치를 그가 사적으로 모두 소비(치부)하고, 다시금 100억으로 동일한 생산을 5년간 하면 그는 총 100억의 잉여가치를 다 써 버려도 역시 100억으로 재생산을 반복할 수 있다. 그리곤 이 100억이 자기 것이라고 한다. 그는 최초의 100억을 이미 모두 회수하였으며, 단순 재생산에 투입된 100억은 사실 그의 것이 아니다. 즉 최초의 자본과 5년 후 자본의 성격이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의 법은 이것을 자본가의 재산이라고 한다. 여기에 어떤 모순이 도사리고 있는 것인가?
이는 소위 '사적 소유의 원칙'에 근거한 것이기에 합법적이요 정당화된다. 자본가의 잉여가치 취득의 핵심 기제인 '타인의 노동력 소유', 다시 말해서 "내가 노동하지 않았지만 타인의 노동을 내 것으로 사용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노동한 것과 마찬가지이며, 그 생산물은 내 것이라는 논리"의 성립 때문이다. 일례로 '이 생산물은 내가 몇 명 고용해서 만들어 낸 거야'라고 말하는 자본가의 말 속에서 노동력의 소유, 상품화된 노동을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에 더해 노동하는 시간을 벗어난 노동자의 여가시간은 그렇다면 생산과 무관한 시간일까? 자본주의는 노동자 스스로 노동자를 생산하도록 한다. 즉 노동자의 소비는 자본가의 '낭비적 소비'와는 달리 '생산적 소비'라고 부른다. 노동자는 일하기 위해 먹고, 아니 일하는 중에도 밥을 먹을 뿐만 아니라 근육과 뼈와 뇌를 재생산한다. 자기계발을 하고 보다 쓸모있는 노동력이 되기위해 스스로 관리한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생산한 것으로 가치를 지불하고 더불어 잉여가치까지 얻으며 기계나 그 어떤 설비처럼 관리비도 들이지 않으니 돌멩이 하나로 두 마리의 새를 잡는(一石二鳥) 정도가 아니라 가상의 돌 혹은 던진것 처럼 착각만 일으켜도 두 마리의 새를 잡는(幻石二鳥) 격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출현하는 역사적 조건이라는 '가난'은 노동의 지속적 공급을 보장해주기까지 하며, 최저임금이라는 기막힌 도구가 한 몫 거들어주기까지 한다.
【본문 81쪽 중 부분 발췌】
저자 고병권의 이 책을 모두 옮겨 적어 많은 이들과 생각을 같이하고 싶을 정도이지만 노동의 소외와 노동력의 착취분이 곧 잉여가치임을, 또한 이 노동력 착취분이 자본이 되는 것임을, 노동자에게 지불되는 임금 역시 착취된 자기 노동 가치임을 아는 것만으로 , 자본주의의 순환,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란 바로 이 체계의 반복임을 이해하는 것으로 맺기로 하자. 이 책이 설명하는 『자본』 1권 제 7편인 '자본의 축적'이란 곧 자본의 확대 재생산을 통한 잉여가치의 무한 축적, 노동력의 끊임없는 착취를 토대로 작동하는 것임을 확인하는 다음 책의 예고 문장이야말로 맺음말로 맞춤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