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암흑 같은 시간을 만나지만, 암흑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어둠의 시대, 빛을 찾아간 아이의 이야기
작가는 이번 작품의 모티프를 청산리 전투 기념사진에서 얻었다고 한다. 사진 속의 독립군들은 갓 10대나 되었을까? 그토록 앳된 나이에 독립운동에 뛰어들다니,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그토록 굳세고 단단하게 만들었을까? 『너의 운명은』은 우리가 한 번쯤 던져 보았을 그런 물음에 답하듯, 역사와 인생의 갈림길 위에서 벌어지는 영혼의 폭풍 성장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고 울부짖는 선비의 통곡에서 난생처음 ‘암흑’이라는 단어를 들은 열한 살 아이는 이상한 변화를 느낀다. 바느질과 허드렛일로 생계를 꾸리는 엄마와 사는 자신의 삶이 온통 암흑에 뒤덮인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소문에 따르면 만석꾼 안 부자가 조상 묘를 명당자리로 옮겨 부자가 되었다니, 아이는 암흑에 싸인 팔자를 바꿀 방법이 제 아버지 묘를 명당자리로 옮기는 것뿐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아이는 한밤중에 지관을 만나려고 무작정 안 부잣집 담을 넘지만, 정작 아버지 묘가 어디 있는 줄은 모른다. 그러고 보니 아이의 엄마는 아들이 아버지 얘기를 꺼낼 때마다 몸이 굳어 버리곤 했다. 안 부자는 그런 아이를 딱하게 바라보면서도 팔자를 바꾸고 싶으면 글을 배우라는 따끔한 한마디를 던지는데…….
아이는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궁금해 하면서도 혹시 몹쓸 죄인은 아니었을까 무섭지만, 자신에게 미래가 없다는 사실에 더 큰 두려움을 느낀다. 칼갈이 노인 얘기대로라면, 가난하게 태어난 조선인은 십중팔구 빚쟁이, 도둑, 병자가 된다는데, 거기다 이제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으니 평생 암흑이 자신을 뒤따라 다니지 않을까?
냉정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아이는 아직 작은 덩치로 남보다 일찍 지게질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산 주인이라는 양반 김 첨지가 아이 앞에 나타나 도둑질한 나무를 모두 제 집으로 실어 나르라는 벌을 내린다.
열흘 동안이나 나뭇짐을 져 나르며 죗값을 치른 끝에, 아이는 이 세상에서 대가를 치르지 않고 가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값비싼 교훈을 손에 쥔다. 그리고 작은 지게를 밑천 삼아 김 첨지에게 한 가지 거래를 제안한다. 그리고 이 일은 아이에게 꿈에도 생각지 못한 놀라운 기회로 바뀌는데…….
과연 인간이란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도 성장할 수 있을까? 『너의 운명은』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아이 눈앞의 암흑은 선비의 울음에서 먹구름으로, 가난과 식민지 현실로, 일자무식의 까막눈과 막막한 절망감으로 변신을 계속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대단원에서 결국 아이는 암흑의 실체를 새롭게 받아들인다. “그건 암흑이 아니라 세상을 제대로 보는 눈이었다.”고.
한윤섭의 역사 동화를 읽다 보면 역사란 성장하는 인간들의 발자취라는 생각이 든다. 이름이 지워졌으나 존재감은 또렷한 주인공 ‘아이’를 통해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더 나은 미래를 쟁취하기 위해 분투하는 역사적인 존재라는 귀중한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엄마를 중심으로 작은 원을 그리던 아이의 세계가 칼갈이 노인과 안 부잣집, 김 초시를 만나 점차 넓어지고, 마침내 좀 더 넓은 세계로 뻗어 나가듯, 우리 아이들도, 우리도 그렇게 세계를 넓혀 갈 것이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항일의병에서 독립군으로 이어지는
두 세대의 ‘용기’ 이야기
항일 운동기를 무대로 하는 많은 역사 동화는 일제의 탄압을 주된 사건으로 다루어 민족 감정을 부추기는 경향이 있지만, 작가는 작품 속에서 잔혹한 장면을 배제한 채 서늘한 긴장감을 유발하는 배경 장치로 일본군을 등장시킨다.
작가는 왜 일제의 지독한 탄압 대신 아이의 성장에 주목한 것일까? 어쩌면 다른 감정이 뒤섞이지 않은 그대로, 당대를 통과했던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의지와 용기 자체를 오롯이 그려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글을 쓰고 자료를 정리할 때, 그 역사의 순간에 있던 인물들의 선택을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자주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 순간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의로운 선택을 한 사람들도 있고 부끄러운 선택을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의로운 선택을 한 사람들에게는 그 선택을 지탱해 주는 용기가 필요했을 겁니다.
의병으로 나가면서,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나면서,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기다리면서, 서대문 형무소에서 그 혹독한 고문을 버티면서, 상해 홍구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지면서,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기다리면서, 그 수많은 독립투사는 몸속 깊이 올라오는 그 지독한 두려움을 용기로 억누르고 있었을 겁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 의로운 용기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_작가의 말
어린 나이에 독립군이 되기 위해 홀로 만주로 떠날 결심을 하는 아이의 모습에서는 김산과 같은 신흥 무관 학교 졸업생의 모습이 비쳐 보인다. 대토지와 재산을 처분한 뒤 만주로 떠나면서 “동지가 필요하지, 하인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안 부잣집 손자의 모습에서는 독립운동의 대부 이회영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인다. 무엇보다 을사년 의병으로 뛰쳐나가 거대한 흙무덤이 된 아이의 아버지는 암담한 시대에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운 이름 없는 의병들의 초상 그대로이다.
따라서 어른이 함께 읽는다면 실제의 역사 현장과 인물 자료를 찾아보고 동화 속 인물들과 연관 지어 보는 재미도 특별할 것이다. 작품 뒤쪽에는 항일 의병의 발자취와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는 부록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