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학생들이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 중의 많은 학생들이 오사카, 나라, 교토 지역으로 집중되었다. 1,400년 전 불교와 한자 등 우리의 우수한 문화를 일본에 전해 주었다는 자긍심을 느끼게 해 주기 위한 일정이었던 것 같다. 과거의 우월감도 필요하지만 현재의 정확한 모습을 파악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 p.9 「머리말」 중에서
〈NHK〉의 공신력을 등에 업은 이런 대하드라마는 ‘시대의 거울’이라는 평을 받아 왔다. 예를 들면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관한 드라마는 3편이 방송되었는데, 방송 당시의 시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연출되었다. ㆍ구체적으로 1965년에 방송된 제3화 ‘다이코우키’는 고도경제 성장 속 출세 이야기를 담았고 ㆍ1981년 방송된 제19화 ‘온나 다이코우키’는 전란 수습을 바라는 안정된 성장 이야기를 다루었으며 ㆍ1996년 방송된 제35화 ‘히데요시’에서는 버블경제가 붕괴된 이후의 시대를 반영하여 자연인 히데요시의 모습을 중점적으로 묘사했다. 〈NHK〉의 대하드라마가 장기간 유지된 이유는 이런 시대 변화를 잘 담아냈기 때문이다.
--- p.21 「NHK 대하드라마는 이렇게 탄생했다」 중에서
요시다 쇼인은 한국에겐 달갑지 않은 인물이다. 가장 알기 쉽게 요약하자면, 이토 히로부미의 스승이다. 한반도를 정벌하자는 정한론(征韓論)이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요시다 쇼인은 쇼카손쥬쿠에서 문하생들에게 이 정한론과 존왕양이론(尊王攘夷論)을 일본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가르쳤다. 그의 제자들 중엔 메이지 유신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한국 침략에서 주역을 맡았던 인물들이 많다(주요 인물편에 소개). 더 나아가 문하생 대부분이 막부 말기와 메이지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의 근대화 및 산업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 까닭에 쇼카손쥬쿠를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 p.26 「1장 _ 하나모유(花燃ゆ) : 불꽃처럼 살다간 여자」 중에서
잠잠하던 일본에 공포스러운 서양 배가 출몰했다. 1853년 2척의 증기선을 포함한 4척의 군함이 에도만 입구 우라가항(浦賀港)에 입항한 것이다. 대장은 페리 제독. 정식 이름은 미국 해군 동인도함대 사령관 메튜 칼브레이드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 일본에 증기선이 출몰한 것은 페리 제독의 선단이 처음이었다. 방수를 위해 선체가 검정색 수지로 칠해져 있었기 때문에 에도 사람들은 흑선(?船)이라고 불렀다. 이런 페리 제독의 갑작스런 방문을 일본 역사는 ‘흑선내항’이라 기록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주로 이 사건부터 메이지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를 막부 말기 시대라고 부른다.
--- p. 「1장 _ 하나모유(花燃ゆ) : 불꽃처럼 살다간 여자」 중에서
이이 나오스케가 다이로에 취임한 건 1858년 4월이다. 당시 막부에서는 개국과 쇄국을 둘러싼 대립과 더불어 차기 쇼군(?軍) 후계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여기에 두 중심 세력이 등장하는데, 기슈(紀州) 혹은 기이(紀伊) 가문과 히도츠바시(一橋) 가문이다. 이 두 세력을 이해하기 위해선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계도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 p.51 「2장 _ 하나노 쇼우가이(花の生涯) : 역적이냐 충신이냐」 중에서
사쯔마번은 배짱이 두둑했다. 막부도 함부로 제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나마무기 사건에서 영국 상인을 살상했지만 버티고 물러서지 않았다. 군사력을 자랑하던 영국이 이를 두고만 보고 있었을까. 사쯔마번의 배짱이 어느 정도인지…….
--- p.70-71 「3장 _ 아쯔히메(篤?) : 고향 사쿠라지마가 그립구나」 중에서
‘8월 18일의 정변’으로 죠슈번은 교토에서의 정치적 주도권을 잃고 궁지에 몰렸는데, 그 타개책이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 하마구리고몬의 변(또는 금문의 변)이다. 겐지 원년(1864년) 7월 19일, 천황의 거처가 있는 교토고쇼(京都御所)에서 존왕양이파인 죠슈번과 공무합체파인 사쯔마번, 아이즈번 연합세력이 충돌했다. 죠슈번이 군대를 이끌고 교토의 황궁으로 쳐들어 간 것이다. 황궁에 발포한 죄로 죠슈번은 조정의 역적이 되는 사태를 맞았다.
--- p.91-92 「4장 _ 료마가 간다(?馬がゆく) : 태어난 날과 죽은 날이 같은 사내」 중에서
사카모토 료마는 삿쵸동맹을 넘어 국가의 큰 미래를 그려 나갔다. 그 미래상은 1867년 배 위에서 완성됐는데, 바로 신정부의 8가지 국가정책을 담은 ‘선중팔책’이었다. 료마가 도사번 참정 고토 쇼지로에게 제안한 내용을 함께 있던 나가오카 겐기치(長岡謙吉 : 해원대 대원)가 문서로 정리했다.
--- p. 「5장 _ 료마전(?馬?) : 료마를 벤치마킹하다」 중에서
대정봉환은 삿쵸동맹, 선중팔책으로 숨가쁘게 달려온 사카모토 료마의 ‘국가 비전 결정판’이다. 정식 의미는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1867년 10월 14일(양력 11월 9일) 메이지 천황에게 정권 반납을 상주하고, 다음날 조정이 이를 칙허한 것을 말한다. ‘대정’(大政 : 정권)을 쇼군 요시노부가 천황에 ‘봉환’(奉還 : 반납)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역사는 참으로 냉정했다. 사카모토 료마는 대정봉환 한 달 뒤인 11월 15일(양력으로는 12월 10일) 막부파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 p.138 「6장 _ 도쿠가와 요시노부(?川慶喜) : 막부의 마지막 남자」 중에서
왕정복고를 거쳐 메이지 정부를 수립한 사쯔마, 죠슈, 도사번이 중심이 된 신정부군과 구막부 세력, 동북지방 동맹이 싸운 일본의 내전이다. 1868년 1월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시작해 1869년 5월 하코다테전쟁까지를 말한다. 1868년이 간지(干支)로 보신(戊辰)에 해당하여 이런 호칭이 붙었다.
--- p.152 「7장 _ 신센구미(新選組) : 무자비한 막부의 호위무사」 중에서
메이지 신정부는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나라의 중심에 천황이 있다’는 행사를 기획했다. 1868년 3월 14일, 메이지 천황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신에게 맹세하는 제사를 지냈다. 이 자리에서 공경 산조 사네토미가 ‘5개조의 서문’을 낭독했다.
--- p.168 「8장 _ 가츠 카이슈(勝海舟) : 이름대로, 바다에 살다」 중에서
메이지 유신의 일환으로 각 번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版)와 백성(籍)을 조정(천황)에 반납한 것을 말한다. 대정봉환이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 자체의 반납이었다면, 판적봉환은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재산, 즉 토지와 백성을 반납한 것이었다. 판적봉환으로 메이지 정부는 중앙집권체제로 한 발 더 나아갔다.
--- p.185 「9장 _ 세고동(西?どん) : 라스트 사무라이」 중에서
메이지 신정부는 폐도령(廢刀令 : 1871년), 징병령(1873년) 등 급진적인 개혁을 밀어붙였다. 1873년 1월 육군성은 국민개병주의를 규정한 징병령을 발표했다. 특히 이런 개혁 조치로 사무라이의 신분상 특권이 사라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사족, 농민들의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 p. 「10장 _ 카신(花神) : 달마를 닮은 천재 전략가」 중에서
메이지 정부는 사민평등(四民平等)이라는 정책에 따라 다이묘와 무사 계급을 폐지하고 황족(皇族 : 천황의 친족), 화족(華族 : 주로 공경과 다이묘 계급), 사족(士族 : 화족 이외의 무사계급)이라는 새로운 신분 질서를 구축했다. 신분 해체를 맞으면서 사족들은 권위와 경제력이 무너지고 박탈감은 극에 달했다. 급기야 메이지 정부에 반대하는 불평사족들이 봉기하게 된다.
--- p.225 「11장 _ 토부가 고토쿠(翔ぶが如く) : 갈라선 죽마고우」 중에서
메이지 9년(1876), 신정부는 신분 질서를 재편하면서 화족(華族 : 기존의 공경과 다이묘 계급)과 사족(士族 : 기존의 무사계급)에게 금록공채(金?\公債)를 교부하고, 그들에게 녹봉 지급을 폐지한다. 이를 질록 처분이라 한다. 화족과 사족의 특권이었던 녹봉을 강제로 빼앗아 한시적으로 적은 이자만 받는 공채로 바꾸는 급진적인 개혁이었다.
--- p. 「12장 _ 산시마이(三姉妹) : 세 자매의 눈으로 본 사무라이 세상」 중에서
‘대일본제국헌법’은 독일식 헌법을 참고해 만들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유럽헌법조사단을 이끌고 떠난 것이 1882년 3월. 독일, 영국, 프랑스 등을 둘러보며 헌법 연구를 하고 귀국한 것이 이듬해 8월이었다. 1년 5개월 동안의 여행을 기초로 헌법 제정 작업에 착수했던 것이다.
--- p.252 「13장 _ 야에노 사쿠라(八重の?) : 역적의 땅에 핀 꽃」 중에서
일본이 처음으로 참가한 국제박람회(1867년 4월 1일~11월 3일). 에도 막부, 사쯔마번, 사가번이 각각 별도로 참가했다. 일본의 우키요에(浮世? : 서민계층에 유행한 목판화) 등이 소개되면서 자포니즘이 유럽에 크게 유행하는 계기가 됐다.
--- p.272 「14장 _ 사자의 시대(獅子の時代) : 파리의 상투 튼 무사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