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모든 존재는 부모의 돌봄을 받다가 자기의 생을 영위하기 위해 떠나요. 이건 너무 당연하지 않나요? 아무리 단란해도 결혼을 하려면 집을 떠나야죠. 아니, 그 이전에 머나먼 타국까지 유학도 가잖아요? 학교를 간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집을 떠나는 행위입니다. 학교를 가는 순간 대부분의 시간을 집 바깥에서, 낯선 존재들과 지내는 거죠. 학교를 마치면, 직장으로, 그다음엔 결혼으로. 특별한 경우엔 출가를 하기도 하고요. 이것이 인생의 행로죠. 그러니까 이게 대전제라면, 아예 처음부터 가족에 대한 표상을 바꾸자는 거예요. 집에 문제가 있어서 길에 나서는 게 아니라, 길을 나서는 게 인생이니까 집에 대한 의존과 집착을 버리자는 거죠. 그렇게만 되어도 가족끼리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일은 훨씬 줄어들 겁니다. 또 소위 정상적 가족을 이루지 못한 경우라고 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겠죠. 그저 다를 뿐이지 모자란 게 아니니까요.
---「지은이의 말」중에서
제가 주목하는 건 봉준호 감독의 문제의식이 늘 생태계를 향하고 있다는 거예요. 「괴물」에서는 한강에 흘러든 미군의 독극물이 괴물을 만들어 냈는데, 이것도 역시 문명 혹은 제국의 폭력성이 생태계를 오염시키고 그게 다시 거대한 재앙이 되어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식으로 되돌아오는 거죠. 국가나 시스템은 그걸 감당하지 못해 허둥대고 온갖 부조리를 연출하고…. 「설국열차」에선 비슷하게 지구온난화에 대처한답시고 한 짓이 온 지구를 다 얼어붙게 만든다는 발상인데, 이거야말로 문명의 폭력성과 기술의 오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설정입니다.
--- p.28
박사장 집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창밖에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단 한 명의 사람도 거기를 통과할 수도 없고 오지도 않아요. 세상에 나는 이런 ‘집구석’은 처음 봤어요. 그 정도로 살면 형제든 부모든 사돈의 팔촌이든 막 와 보려고 그러고, 파티든 모임이든 해야 하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인적이 드물 수가 있죠? 그 넓은 집을 어떻게 네 명이 쓸 수가 있어요? 엄마, 아빠, 아들, 딸. 여기도 딱 일촌으로 이루어져 있죠. 가족 구조가 김기사네랑 똑같죠. 창문이 크고 창밖으로 자연이 우거졌지만 오줌 싸러 지나가는 사람도 소독차도 없는 것은 다르지만….
--- p.44
이제는 ‘꿈’이라고는 하지 않는 거예요. “부자를 털어먹을 수 있는 계획이 생겼어요, 아버지”, 이런 식이죠. 사기를 치는 일이 계획이에요. 이 가족한테. 그러니까 가족이 다 직업을 얻는 게 계획인데, ‘직업을 정직하게 해서는 못 얻는다’, ‘남을 속이고 약탈을 해야만 얻는다’. 이게 아주 뼛속 깊이 이미 박혀 버린 거예요. 조금 과장하면, 이건 상당히 큰 변화의 징후라 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지난 10년간 성행했던 ‘꿈’ 담론이 와해된 셈이니까요. ‘꿈타령’은 이제 됐고, 지금 중요한 건 ‘계획’인 거죠.
--- p.50
어쩌다가 이렇게 됐죠? 여기에는 출구가 없습니다. 이 가족이 하는 일은 뭐냐면, 직업이 없을 땐 무력하게, 엉망으로 살아요. 그러다가 누군가 돈을 벌어오면 뭘 하죠? 바로 술과 피자 이런 음식을 진탕으로 먹는 거죠. 나중엔 네 명이 다 취업을 했으니까, 이제 돈을 잘 모아서 빨리 반지하를 탈출하고 새출발하고 이런 계획을 세울 줄 알았는데, 그런 계획 같은 건 일체 없어요. 그냥 큰 집에 대한 욕망만 있는 거죠. 그래서 박사장네가 캠핑 가니까 졸지에 거기 다 모였는데 거기서 또 뭘 해요? 한바탕 때려먹는 거죠.
--- p.74
문제는 아직도 핵가족을 기준으로 해서 그게 안 되면 결핍이라고 해석을 하는 거죠. 기준은 여전히 핵가족인 겁니다. 이런 식의 정치담론이나 휴머니즘 타령이 솔직히 좀 지겨워요. 가족의 화목함, 사랑, 막 이런 게 삶의 어떤 중요한 표지가 되는 것이…. 가족은 그냥 생명의 베이스인 거예요. 태어나서 이 베이스캠프를 배경 삼아서 자기의 길을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수신’을 하고 ‘제가’를 하고 ‘치국’을 하고 ‘평천하’를 하는 쪽으로 가는 겁니다. 누구든 나아가서 새로운 가족이든 새로운 네트워크든 형성을 하는 거라고요. 왜 평생 자꾸 이 핵가족으로 되돌아오냔 말이죠.
--- p.88~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