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요? 시험이 재밌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전 그냥 집에 돌아와서 기쁠 뿐이에요. 아버지는 내일 올 거예요.” 한스는 신선한 우유를 한 잔 마신 뒤 창문 앞에 걸린 수영복을 집어 들고 내달렸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초원 근처 강가는 가지 않았다. 대신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갔다. 한스는 이곳을 천칭이라고 불렀다. 수심 깊은 물이 높이 자란 덤불 사이로 천천히 흐르는 곳이었다. 한스는 옷을 벗고 손을, 곧이어 발을 차가운 물에 담갔다. 솜털이 곤두섰지만 곧바로 물에 몸을 던졌다. 느릿하게 흐르는 물살을 가르며 천천히 헤엄치다 보니 지난 며칠 동안 묵은 땀과 두려움이 씻겨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차가운 강물이 연약한 몸을 감싸안자 한스의 영혼이 아름다운 고향에 돌아왔다는 새로운 쾌감으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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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우정은 특별했다. 하일너에게는 즐거움이자 사치였고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것이자 변덕이었다. 한스에게는 자긍심이자 소중한 보물이었고 어떤 때는 너무 거대해서 짊어지기 어려운 짐이었다. 여태까지 한스는 저녁 시간이면 늘 공부를 했다. 하지만 이제는 공부에 질린 헤르만이 거의 매일같이 다가와 책을 빼앗으며 함께 놀자고 했다. 한스는 친구를 매우 좋아했지만 그가 매일 밤 찾아올까 봐 두려움에 떨었다. 다른 학생들에게 뒤처질까 봐 자습 시간에는 두 배나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하일너가 그런 노력까지 비웃기 시작하자 한스는 더욱 힘들어졌다. “날품팔이나 마찬가지야.” 하일너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너는 공부를 즐기거나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야. 선생님이나 네 아버지가 무서우니까 하는 거지. 그래서 1등이나 2등을 하면 뭐가 되는데? 나는 20등 이지만 공부만 파는 샌님들보다 멍청하지 않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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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는 자신의 손을 권력자가 내민 오른손 위에 얹 었다. 권력자는 진지하면서도 부드러운 눈빛으로 한스를 쳐다보았다. “그래, 그래야지, 친애하는 기벤라트 군. 다만 너무 지쳐서는 안 되네. 그러면 수레바퀴 아래에 깔려버릴 테니까.” 그는 한스의 손을 꼭 쥐었다. 한스는 한숨을 내쉬며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교장 선생이 한스를 불러세웠다. “하나 더 있네, 기벤라트 군. 자네 하일너와 친하게 지내지 않나?” “네, 맞습니다. 상당히 친합니다.” “다른 친구들보다 하일너와 훨씬 친해 보이더군.” “그렇습니다. 그는 제 친구입니다.” “어떻게 친해졌나? 자네 둘은 성향이 전혀 달라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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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는 그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다른 공간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낯선 땅을 걷는 느낌이었다. 그 땅은 부드럽고 편안했다. 가볍고 꿈같은 풍미가 가득한 향료가 섞인 낯선 공기를 들이 마시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런 그림 위에 어떤 손이 자신의 몸을 가볍게 어루만지는 듯한 어둡고 따스한 자극이 느껴지기도 했다. 한스는 책과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온 노력을 쏟아 부어야 했다. 전혀 관심 없는 내용은 그림자처럼 손에서 미끄러졌고 수업 시간에 필요한 히브리어 단어를 외우려면 수업 시작 30분 전부터 예습을 해야 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갑자기 모든 사물이 구체적인 모습을 하고 눈앞에 나타나는 일이 잦아졌다.
--- p.180
그래서 슬픈 건 아니었다. 한스는 아버지를 실망시키고 기대를 저버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 다. 지금은 푹 쉬고 실컷 자고 지칠 때까지 울고 꿈속 에 잠기는 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었다. 이 모든 고통 을 겪었으니 이제 조용히 쉬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 있는 집에서는 그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두려워졌다. 기차에서 내릴 시간이 다 가오자 머리가 아파 왔다. 어린 시절 열정적으로 뛰어놀던 언덕과 숲이 보이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풍경 사이를 지날 때도 창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그래서 하마터면 친숙한 고향 역에서 내리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 뻔했다.
--- p.201
한스는 사랑의 비밀을 너무 빨리 경험하고 말았다. 그에게 사랑은 아주 조금 달콤하고 너무나 많이 씁쓸한 것이었다. 허무한 한탄과 간절한 추억, 우울한 사색으로 가득 찬 나날, 심장 박동과 가슴 조이는 불안에 잠들지 못하는 밤들, 공포에 짓눌린 꿈들이었다. 꿈속에서는 이해하지 못할 만큼 피가 끓어올라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그림이 되었다. 몸을 휘감아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팔이 되기도 하고, 눈이 불타는 상상 의 존재가 되기도 하고, 현기증이 날 정도로 깊은 나락이 되기도 하고, 활활 타오르는 불빛이 서린 눈이 되기도 했다. 꿈에서 깨면 홀로 서늘한 가을밤의 쓸쓸함에 감싸여 있었다.
--- p.271
“저 사람들 말입니다, 저 사람들도 한스가 이렇게 되도록 도운 겁니다.” “뭐라고요?” 기벤라트 씨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미심쩍은 눈초리로 구두공을 쳐다보았다. “이런 세상에,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그렇게 놀라지 마세요, 이웃 양반. 저 교사들을 말한 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대체 무슨 뜻입니까?” “아닙니다. 더 말해서 뭐 하겠습니까. 당신과 나도, 우리 모두 다 어쩌면 이 아이를 소홀히 했던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 p.306